주요기사
[세계일보] 출산 보름도 안 돼 ‘위안부’ 끌려가… 中 피해자 3명 추가 확인
101세인 팡(方)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던 그 날을 여전히 기억한다. 1939년 당시 18세였던 그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지 보름도 되지 않은 어느날, 일본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시아버지는 일본군을 막아 섰다가 총검에 목숨을 잃었고, 일본군은 집을 약탈한 뒤 팡 할머니를 데려갔다. 여드레가 지나 집에 돌아왔을 때, 아기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아기였다. 팡 할머니는 일본군에 폭행당한 후유증으로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중국 후난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 할머니 세 명이 추가로 확인됐다. 난징대학살희생동포기념관은 29일 101세 팡 할머니와 95세 어우(欧) 할머니, 91세 선(沈) 할머니를 찾아 위안부 피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자원봉사자들은 세 할머니와 가족들, 마을 주민들을 만나 일본 침략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어우 할머니는 1941년 일본군에 끌려갔다. 당시 그는 14세에 불과했다. 일본군이 마을에 왔을 때 사람들이 도망갔지만 어우 할머니는 귀가 들리지 않아 도망가지 못하고 붙잡혔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어우 할머니가 집에 돌아온 뒤 가족들은 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됐다. 어우 할머니는 일찍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쫓겨났고, 아무도 그를 모르는 먼 곳으로 다시 시집을 갔다. 여동생의 일에 분노한 어우 할머니의 오빠는 군에 지원해 항일 전쟁에 참전했다. 어우 할머니의 오빠는 자원봉사자들과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선 할머니는 13세에 위안부가 됐다. 일본군이 그가 살던 산골짜기를 거점으로
[오마이뉴스] 학살자는 국립묘지에, 피해자는 구덩이에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48] 상반된 무덤, 대전현충원과 대전 산내 골령골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의 맨 아래부터 110계단을 올라가면 맨 위쪽 8번째에 함병선 중장의 묘(장군 제1-8)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던 함병선은 제주 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온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였던 제2연대의 연대장이었다. 이후 중장까지 진급 후 예편하여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북촌 학살사건은 1949년 1월 17일, 한날한시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 4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집단 총살 당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제2연대는 1946년 2월 28일 대전에서 창설된 부대로, 1948년 12월 29일에 제주 제9연대와 교체해 제주에 주둔했다.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는 구체적으로 제2연대 3대대다. 3대대는 비밀리에 입대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해 이른바 ‘서청대대’라 불리었다. 대전현충원에는 서북청년회를 주도했던 인물도 안장되어 있다. 바로 서북청년회 초대위원장을 지낸 선우기성(독립유공자 1-85)과 서북청년회 중앙본부 위원장을 지낸 문봉제(경찰1-501-8)다. 4.3 사건 당시 3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은 대전형무소로 끌려왔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 모두 학살됐다. 이들은 70여 년 동안 대전의 동남쪽에 위치한 산내 골령골의 땅속 긴 구덩이 속에서 누구의 뼈인지도 모른 채 뒤엉켜 있었다. 그런데 4.3사건의 가해 책임자들은 정반대 편, 대전의 서북쪽에 위치한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제주에 주둔하기 직전 제2연대는 여수에서 봉기한 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해 순천과 여수에 투입되었다. 제2연대(1, 2대대, 3대대 일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 작전부터 1949년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1_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_식민지시대 사람들 9편
☞ (05.31) ‘역발상’ 시즌 1: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_식민지시대 사람들 9편 오늘의 이야기 : 1930년대 신민요 가수로 ‘여왕’ 소리를 함께 들었던 왕수복과 이화자 출연 : 이준희(옛가요 전문가)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1. <고도의 정한> 왕수복은 공전의 히트곡 <고도의 정한>으로 최초의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로 선정. 바로 그때 이화자는 김용환의 테스트를 받으며 가수로서 가능성을 확인 2. <노랫가락> 평양 권번에서 음악을 익힌 왕수복과 역시 기생 출신의 이화자..기생은 어떤 삶을 살았나? 3.<아리랑> 이화자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분방하게 생활. 남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자를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연애를 실천 4.<화류춘몽> 최고의 신민요 가수로 갈채를 받기는 했지만, 그런 인기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허허로움이 있었는지, 1940년대 들어 이화자는 심각한 아편 중독자가 됨. 부산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요릿집 운영에 나서기도 했으나 5.<꼴망태 목동> 왕수복은 해방 후 남한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었고, 북한에서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 왕수복의 독특한 창법은 민족적이면서도 봉건적이지 않은 노래로 평가 6.<어머님전상백> 계절에 맞지도 않는 낡은 여우 목도리를 언제나 두르고 다니며 삶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이화자 ※지난 방송 ☞ (05.24) ‘역발상’ 시즌 1: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_책과 함께 식민지시대 사람들 ☞ (05.17) ‘역발상’ 시즌 1: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_책과 함께 식민지시대 사람들 ☞ (05.12) ‘역발상’ 시즌 1: 월간특집 <25共感> 역발상이 추천하는 방구석 영화 1탄 “오퍼레이션 피날레” ☞ (05.10) ‘역발상’ 시즌 1: 삼천만의 여배우’문예봉’_식민지시대
[오마이뉴스] 고분고분했으면 주교ㆍ추기경 됐을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 52] 추기경하고 논쟁할 때나 신학교를 떠나올 때… 그의 말과 글은 논리적이지만 매우 날카롭다. 사회적 강자와의 대화와 글에서 특히 그러하다. 상대가 아무리 높은 위치라도 할 말을 하고 기탄없이 잘못을 지적한다. 가톨릭 내부의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김옥균ㆍ정진석 주교 등과의 갈등은 바깥사회에도 알려졌다. ‘갈등’이란 표현보다 고분고분하지 않는 ‘이의 제기’ 또는 ‘반론’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이 집권한 얼마 후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 김승훈ㆍ김택암ㆍ안충석ㆍ문규현 신부와 함께였다. 김대중은 민주화운동의 동지이면서 ‘옥중동지’였다. 취임 초기 정부가 제2건국위원회를 준비하면서 참여를 요청했으나, 신부는 그런 데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사양했다. 다음은 청와대에서 직언한 내용이다. 인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했어요. “호남 분들을 잘 기용하는 것은 좋은데 대통령께서 쓰시는 호남 인사들은 사실 과거 정권 때 다 공직을 맡으신 분들입니다. 출신은 호남이지만 사실상 호남인들을 짓밟고 고통을 준 분들인데, 호남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시 승승장구하게 하는 건 조금 잘못된 것 같습니다. 동진정책 쓰신다고도 하셨는데, 그런 영남이나 대구에서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분들을 써야지,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중용한다든지, 정보부에서 인권탄압의 대명사였던 이용택 같은 사람들을 기용하는 건 안 됩니다. 우리가 참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외교 면에서 훌륭하시고 경제정책도 잘하신다는 평이 있지만, 많은 분들이 김영삼 대통령 때의 인사정책과 김대중 대통령의 인사정책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희들 마음이 참 아픕니다. (주석
[서울경제] 日 또 망언…”한국 식민지배 惡이라는 자학사관 버려야”
前통막장 “韓 거부한 욱일기, 절대로 내릴 수 없는 것” 산케이 “日정부 사과·변명이 사태 악화” 보수우익 성향의 일본 언론이 문재인 정부 시절 자위대 욱일기 관련 한일 갈등을 재론하며 과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자국의 반성을 ‘자학사관’이라고 폄하했다. 이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나 제국주의 군대에 바탕을 둔 자위대의 긍지를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산케이는 26일 ‘한국의 해상자위대 욱일기 게양 거부 문제…전 통합막료장이 밝힌 속내’라는 칼럼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산케이는 “일·한(한일)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하는 등 반일 정책을 추진해 일본과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킨 한국의 문재인 정권이 물러났다”며 “윤석열 정부에서는 양국 관계 개선과 일·미·한(한미일) 안보체제의 강화가 기대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한국의 반일 감정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불신이 워낙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에 앞날은 험난할 것”이라며 욱일기 갈등을 거론했다. 신문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 일한 관계 악화가 국방 분야에까지 미쳤음을 각인시킨 것 중 하나가 2018년 10월 한국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서의 자위대 욱일기 문제였다. 한국 정부가 관함식에 초대한 해상자위대 함정에 자위함기인 욱일기의 게양을 불허하자 일본은 참가를 취소했다. 한국 측이 욱일기 게양을 거부한 배경에는 욱일기를 ‘전전(戰前)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의 상징’, ‘전범기’ 등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반일 사관이 자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에 대해 당시 통합막료장(한국으로 치면 합참의장)이었던 가와노 가쓰토시(68)는 “한국이 욱일기를 비판하는 것은 일본의 대응이 잘못된 탓도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가와노 전 통막장은
[오마이뉴스] 가족을 9명이나… ‘빨간 베레모’ 그 남자가 포기 못한 이유
[나의 학살 현장 답사기] 문경 석달마을 사건 진상규명 위해 평생을 바친 채의진씨 한국 전쟁 전후로 국가가 저지른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는 정치 사회뿐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존재한다. 영화 <바람난 가족> 도입부에서 변호사인 황정민은 차를 몰고 어느 산골짜기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유골을 발굴하고 있다. 곧이어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한 경찰들이 들이닥치며 유가족들과 소란이 벌어진다. 이때 유가족들 중 빨간 베레모를 쓴 한 노인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보조 출연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문경 석달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이자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바친 채의진이다. 한겨울의 토요일 오후, 문경 석달마을 1949년 12월 24일 정오 무렵, 문경 석달마을에 70여 명의 군인이 들어온다. 이들은 태백산 일대 빨치산 소탕을 위해 나선 태백산지구사령부 예하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와 3소대 소속이었다. 부대는 인근 지역의 정찰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선 그들은 더 이상 정찰대가 아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 빨갱이라고 윽박지르며 집집마다 불을 지른다. 그리고 마을 앞 논으로 주민들을 불러 모은다. 곧이어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과 소총을 쏘았다. 1차 사격 후 생존자들을 일으킨 다음 다시 사살한다. 잠시 후 마을 청장년 몇 명이 마을로 돌아오던 중 입구에서 몇 명의 군인들을 만났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곧이어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겨레] 10월 말, 건국대에 모인 학생들이 경찰에 포위됐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5) 애학투련과 86년 건국대 항쟁 신군부 계엄·광주 비극 등에 충격 NL계 주도 연합체 건국대서 항쟁 경찰, 무장헬기·사과탄 등 동원해 1288명 단일사건 세계 최다 구속 “하느님께 욕된 말을 삼가라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의 죽음을 가져온다. 빗나간 생활을 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하지 말고 그릇된 행위로 파멸을 초래하지 말라.”(지혜서 1,11-12)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겠느냐?”(루카 14,28)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시구는 윤동주 시인의 확신과 신념입니다. 하늘을 생각하며 민족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시인의 결단은 숭고하며 그 자체가 웅변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고비 고비마다 숱한 윤동주가 존재합니다.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선조들과 동체감을 느낍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우리는 선조들이 겪었던 아픔과 죽음을 똑같이 체험합니다. 선조들과의 동체감이 바로 민족애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감이 바로 신비체와 공동체의 원리이며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우는 청년의 열정입니다. NL·PD로 갈라진 학생운동 1970년대 우리 가톨릭 사제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어낸 이들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싸웠던 청년학생들입니다. 어느 날, 저는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민족통일에 투신한 청년학생들의 행업에 큰 감동을 받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재희 선생은 그 감흥을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셨습니다.
[오마이뉴스]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로 불린 남자… 대구 동성로의 비밀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중양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과거에 매우 유명했던 친일파가 있다. 1957년 10월 23일 자 <경향신문> 3면 중간에 “친일파 거두”로 언급된 박중양(朴重陽)이 바로 그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활동했던 시기에 발행된 1949년 7월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에는 “반민(反民) 거물”로 언급돼 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57년, 그는 경무대(청와대)에 보낸 <신년 소감>이란 책자로 인해 명예훼손 수사를 받았다. 만 83세인 그가 집필해 각계 인사들에게 무료 배포한 그 책자가 이승만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해 9월 15일 자 <동아일보> 3면 하단에 따르면, 그 책자에 “쏘련이 우세, 미국인이 퇴거하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은 보찜 싸노라고 분망할 것이라”라는 글귀가 있었다. 소련이 강해져 미국이 나가게 되면 이승만이 짐 싸들고 분주하게 도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책을 경무대에도 보냈던 것이다. 그 책에 그런 내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9월 17일 자 <경향신문> 3면 좌상단은 “그 내용인즉 현세를 비방하며 행정 수반인 이 대통령을 모독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는 것인데”라고 소개했다. 해방 이후의 시대 흐름을 비판하고 이승만을 모독하는 것에 더해 친일적 주장까지 담은 책자였던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는 조사 과정에서 박중양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됐다. 10월 23일 자 <경향신문> 3면 우중간 기사는 “(부장검사는) 박(朴)이 84세나 된 고령 관계로 밀우어 혹 정신이상에서 온 것이 아닌가 보고 소(蘇) 정신병원장에 박의 정신감정을
[오마이뉴스] 일본 극우, 도쿄 한복판에서 ‘위안부’ 소녀상 조롱·망언
일본제일당, 소녀상과 비슷한 모습의 풍선 인형 모욕… “일 극우 따라 하는 한국 극우 경계해야” 흰색 저고리에 검은색 긴치마를 입은 남성이 옆 의자에 앉힌 ‘평화의 소녀상’과 비슷한 풍선 인형에 펌프를 이용해 바람을 넣으며 히죽거린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이렇게 위안부가 줄지어 서 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위안부 중에 이용수라는 노인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고 있어서 큰일이다”라고 발언한다. 그가 바람을 넣는 인형 왼쪽 어깨에는 일본 지폐로 만들어진 작은 새가 올려져 있다. 일본 극우 세력인 ‘일본제일당’의 당수 사쿠라이 마코토가 지난 21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실시간으로 중계한 영상의 일부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상에는 같은 당 소속 또 다른 인사가 소녀상 모양의 풍선 인형 어깨에 자리한 작은 새를 가리키며 “실제 소녀상은 여기 잉꼬가 앉아 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장난감 돈으로 만들었다. 당시 결코 강제 연행이 아니고 제대로 대가를 받았다는 걸 의미한다”라고 망언을 하는 모습도 담겼다. 이는 ‘위안부에게 화대를 주고, 성매매를 했다’는 일본 극우의 주장을 반복한 것으로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자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들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만들어진 작은 새 의미를 조롱하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조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화의 소녀상 아래쪽 바닥에는 위안부 피해자의 그림자를 그려놓았는데, 입 모양을 악마처럼 표현해 놓았다. 그림자 왼쪽 어깨에는 나비 그림, 정중앙에 태극 문양을 그려
[한겨레] 일본 최남단 섬의 ‘위안부 추모비’
[특파원 칼럼] 김소연 | 도쿄 특파원 “일본군은 일본 식민지·점령지 여성들을 연행해 위안부가 되기를 강요했다. 여성들은 먼 이국땅에서 무참히 인격과 목숨을 짓밟혔다.” 지난 11일 오키나와 본토 복귀 50주년을 맞아 취재를 위해 미야코지마에 갔다가 그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를 마주했다. 미야코지마는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로 1시간을 더 가야 나오는 섬이다. 2019~2020년 일본 자위대의 ‘미사일 부대’가 생기면서 평화롭던 섬은 달라졌다. 훈련장과 탄약 기지가 생기고 ‘03식 지대공미사일’, ‘12식 지대함미사일’ 등 이름도 생소한 최첨단 무기가 섬에 배치됐다. 미사일 부대가 있는 육상자위대 미야코지마 주둔지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위안부 추모비’가 있는 작은 공터가 나온다. 어귀엔 한글과 일본어로 ‘아리랑비’라고 적힌 바위가 있다. 이 외딴섬에도 당시 16곳의 위안소가 있었다. 매운 고추를 좋아하고 아리랑을 구슬프게 불렀던 조선인 위안부들을 기억하는 미야코지마 주민들과 한국의 연구자, 한·일 시민들이 힘을 합쳐 2008년 9월 추모비를 세웠다. 이 장소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빨래하고 돌아가던 길에 잠시 앉아서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위안부 추모비 바로 근처에는 태평양전쟁(1941~1945) 당시 참혹함을 짐작할 수 있는 노래비도 있다. 전쟁 막바지 미야코지마에는 약 3만명의 장병이 배치됐고, 지상전은 없었지만 연일 공습에 시달렸다.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식량과 의약품이 끊기면서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섬은 아비규환이 됐다. “미야코여, 8월은 지옥”이라고 울부짖던 일본군 위생병의 처참한 심정을 담은 노래비가 2005년 8월 주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섬사람들은 전쟁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추모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