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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용산’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없다
역사 속 용산은 만리재부터 청암동까지 2.7㎞ 긴 산줄기… “새 대통령실 설치로 올바른 이해의 출발점 돼야” “최사추 등이 보고하기를, ‘신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봤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의 남쪽은 산 모양과 물의 흐름이 옛 문서와 부합합니다’” -<고려사절요> 숙종 6년 1101년 10월 최근 대통령실 이전으로 국방부가 있는 서울 ‘용산’(龍山)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 용산은 한국 역사에 수없이 나오는 그 용산이 아니다. 대통령실이 이전한 국방부 일대는 역사적으로 ‘용산’이 아니라 ‘둔지산’(둔지미) 지역이었다. 조선의 행정구역상 둔지산이 있던 ‘둔지방’과 용산이 있던 ‘용산방’은 완전히 별개 지역이었다. 한강으로 머리 내민 산줄기 끝이 용을 닮아 역사에 나오는 진짜 ‘용산’은 만리재 부근에서 시작해 효창원을 거쳐 용마루고개, 용산성당, 청암동에 이르는 2.7㎞의 긴 산줄기다. 긴 산줄기 끝이 한강 쪽으로 머리를 내민 모습이 용과 같다고 해서 용산이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의 지도를 보면, 용산의 최고봉은 용산성당 부근으로 해발 77m 높이다. 용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01년 고려가 남경(남쪽 수도)을 정할 때다. 당시 용산은 한양(4대문 안), 노원(노원구 일대), 해촌(도봉구 일대)과 함께 경쟁했으나, 결국 한양에 남경 자리를 내줬다. 당시 네 후보지 가운데 한양(삼각산)과 노원(수락산·불암산), 해촌(도봉산)은 모두 산을 배경으로 했으나, 용산만은 강을 배경으로 한 입지였다. 용산이 다시 <고려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24년 뒤인 충숙왕 12년(1325년) 8월이다. 당시 왕은 원나라
민족사랑 202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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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32편 – 이육사의 꽃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32편 : 이육사의 꽃_이옥비(이육사 딸) ☞ 31편 : 그리운 강남_김시중(백하 김대락 후손) ☞ 30편 : 소년남자가_최재황(권준 후손) ☞ 29편 : 한국행진곡_한종수(한형석 후손) ☞ 28편 : 해방행진곡_손명원(손정도, 손원일 후손) ☞ 27편 : 거국행_박만규(흥사단 이사장) ☞ 26편 : 애국가_김흥태(오희옥 지사 아들) ☞ 신흥무관학교 제8편 : 끝나도 끝나지 않았다 ☞ 신흥무관학교 제7편 : 자랑스런 신흥인 ☞ 신흥무관학교 제6편 : 독립전쟁의 주역, 독립군의 총 ☞ 신흥무관학교 제5편 : 서간도 국치일의 풍경 ☞ 신흥무관학교 제4편 : 신흥무관학교 24시 ☞ 신흥무관학교 제3편 : 서간도는 어떤 곳일까 ☞ 신흥무관학교 제2편 : 망명로드 ☞ 신흥무관학교 제1편 : 신민회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한겨레] 법 악용하는 위선자 호되게 꾸짖은 여대생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4) 부천경찰서 성고문 폭로 노동운동 하다 경찰에 성고문 당해 언론은 방관, 검찰은 면죄부 줘 진실 드러낸 피해 여성 권인숙 국회의원돼 인권·차별금지 등 앞장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마태오 10,16)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루카 16,8) 세상은 약육강식의 무서운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생존의 비결로 ‘뱀 같은 슬기와 비둘기 같은 양순함’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는 제가 신학교에서 사제의 가장 큰 덕목으로 배운 ‘실천적 판단력’의 근거입니다. 지혜와 상식이 바로 법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때 철부지 어린이였습니다. 어린이 사회에서도 나름의 원칙과 원리가 존재합니다. 놀이터에서 이를 어기면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라고 항의합니다. 법이 뭔지를 배운 적도 없는 데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법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데 법을 많이 배우고 잘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무섭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법조인들, 바로 법관과 검찰 그리고 수사관, 경찰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고소해주십시오” 살다 보면 현실이 생각보다 더 잔인하다고 느껴지는 때가 많습니다. 설마설마했던 일들이 나중에 사실로 밝혀져 큰 충격에 휩싸이기도 하였습니다. 부천경찰서
[오마이뉴스]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한 두산그룹의 시조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승직 대기업 중에 100년을 넘긴 곳은 찾기 힘들다. 대한제국 시대에 있었던 기업이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시대까지 유지되는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드물 뿐이지 전혀 없지는 아니다. 동학혁명 및 청일전쟁 발발 2년 뒤인 1896년 지금의 서울 종로4가에서 문을 연 박승직상점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이 기업은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OB맥주로 유명했던 두산그룹이 박승직상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7년에 <경영사학> 제32집 제2호에 실린 신현한, 야나기마치 이사오, 곽주영 세 교수의 공동 논문 ‘두산 120년 – 적응과 변신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장수 기업은 극히 드문 현실에서 두산의 120년 역사는 두산의 핵심 경쟁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창업주 박승직의 경영 역량과 더불어, ‘핵심 경쟁력’으로 거론될 만한 요인이 있다. 위 논문 제목에도 나온 ‘적응과 변신’이 바로 그것이다. 대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정치적 위기들을 때마다 비껴간 것을 핵심 경쟁력의 하나로 포함시킬 수 있다. 1897년에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변모하고 1910년에 일본제국주의가 국권을 강탈하고 1945년에 미군정이 들어설 때에 박승직은 적응과 변신의 면모들을 보여줬다. 이것이 이 기업의 경이적 생존을 가능케 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매판자본 박승직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인 1864년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그는 10대 후반인 1882년경부터 포목 행상을 시작했다. 급료 지체 및 부실 지급에 분노한 하급 군인들이 대일 시장개방에 불만을
[더 팩트] ‘한일과거사 정의로운 문제 해결 촉구’ 외치는 시민단체 [TF사진관]
[더팩트ㅣ이새롬 기자]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와 (사)겨레하나,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8일 오전 서울 용산구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한일관계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한일관계는 마땅히 개선돼야 하지만, 2018년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을 빌미로 수출규제를 단행한 일본은 여전히 한 발짝도 물러서고 있지 않다”며 “‘2015 한일합의’, 1965년 한일회담과 같은 치욕적인 합의와 한미일 군사동맹을 맞바꾸는 식의 한일관계 개선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물론, 우리 국민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어떻게 가능한지, 윤석열 정부는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며 한일 과거사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과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를 촉구했다. 이새롬 기자 saeromli@tf.co.kr 사진영상기획부 photo@tf.co.kr <2022-05-18> 더 팩트 ☞기사원문: ‘한일과거사 정의로운 문제 해결 촉구’ 외치는 시민단체 [TF사진관] [연합뉴스] “한일관계 개선 전 과거사 문제부터 해결해야” 90여개 시민단체, 한미정상회담 앞두고 정부에 촉구 (서울=연합뉴스) 김윤철 기자 = 한미정상회담을 사흘 앞둔 18일 시민사회단체들이 정부에 한미일 동맹을 명분으로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에 앞서 과거사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의기억연대·겨레하나·민족문제연구소 등 90여 개 단체는 이날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관계 개선 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및 강제동원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밝혔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지기는커녕 피해자를 윽박지르고 과거를 왜곡하는 토대 위에 어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가 가능하냐”며 “한미일 동맹을 명분으로 한일 관계가 과거사
[오마이뉴스] “툰드라에서도 피는 꽃처럼, 아버지 이육사는 강인했습니다”
[이육사 탄생 118주년] 이육사 외동딸 이옥비 여사 인터뷰 “우리 아버지 이육사는 <청포도>, <광야>로만 이야기할 분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이육사를 떠올리는 ‘공식’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이육사 선생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의 이 한 마디는 담박했고 또 예리했다. 많은 사람들은 교과서로 이육사의 ‘시’를 배웠다. 과거 획일화된 교육은 <청포도>에서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에만 집중하며 학생들의 심상(心象)을 규정하려 했다. 이육사의 생애, 이육사가 꿈꾼 세상을 ‘가슴으로’ 들여다볼 기회는 주지 않고서 말이다. 사실 이육사의 삶에 대한 이해는 ‘시’의 명성에 비해 다소 부족한 실정이다. 누구보다 강렬했던 이육사의 항일운동과 사상가적 이상에 대한 앎 또한 마찬가지다. 올해 5월로 이육사 탄생 118주년이 된다. 5년, 10년 단위로 끊어내길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기념 정서’와는 조금 맞지 않지만 형식적인 업적 나열이 아닌, 이육사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을 해보기에는 적절한 시점이다. 지난 9일, 이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자 이육사문학관 상임이사로 재직 중인 이옥비 여사(81)를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나봤다. “내 이름은 옥비, 아버지가 살고 싶은 삶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 이육사 탄생 118주년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이육사와 ‘딸’ 이옥비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보통 내가 무남독녀, 외동딸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삼남매의 막내예요. 큰오빠와 언니가 있었는데 둘 다 요절했죠. 큰오빠는 3살, 언니는 3개월, 홍역으로 잃었고 그 바람에 형제 중 ‘제일 못난이’인 나만 살아있는 거죠. 1941년 명륜동에서 늦둥이로 태어나서,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1_혁명을 꿈꾼 독서가들_책과 함께 식민지시대 사람들
☞ (05.17) ‘역발상’ 시즌 1: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_책과 함께 식민지시대 사람들 2회에 걸쳐 대중예술인이 아닌 책을 통해 만나보는 “식민지시대 사람들”을 준비했습니다. 첫번째 시간은 ‘혁명을꿈꾼 독서가들’입니다. 저자 출연:강성호 어렸을 때부터 만화영화와 토요명화를 즐겼지만, 어려운 살림살이에 텔레비전이 없어지면서 불가피하게 독서에 빠져들었다. 예전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만 읽다가 최근 들어 다양한 분야의 책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3년 가까이 골목책방을 운영했던 덕분이다. 요즘은 지성사, 독서문화사, 지역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 중이다. 오늘의 이야기 1.조선 최고의 다독가, 홍명희 홍명희의 독서는 완독(完讀)과 남독(濫讀)의 책 읽기였다. 일단 그는 책을 한번 집어 들었으면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완독을 지향했다. 중간에 필요 없는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 책을 다 읽기까지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재미있는 책은 재미있는 대로, 재미없는 책은 다른 재미있는 책을 얼른 읽기 위해 악을 쓰고 빨리 보았다 2.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가, 정칠성 “노라의 해방은 개인주의적 자각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노라는 눈보라 치는 날 밤에 남편의 집을 뛰쳐나오지요. 이후 노라는 어디 가서 무엇을 먹고 살아가겠습니까. 길거리에 나가 굶어 죽고 얼어 죽는 ‘해방’은 과연 진정한 해방일까요? 그러니 경제적인 해방을 이루지 못하면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3.비밀독서회,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다 비밀독서회는 광주에서 시작된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독립운동이라고 일컫는 광주학생운동은 비밀독서회의 저력이 가장 잘 나타난 경우라 할 수 있다. 차별과
[한겨레] 윤 대통령 첫 교육비서관 권성연, 국정교과서 ‘여론조작 실무자’였다
박근혜 때 국정화 실무 담당하며 국정화 찬성 여론 만들기 위해 토론회 패널 보수인사로 구성하고 보수단체에 수의계약 연구용역 줘 조선일보 등 기고문 계획·실행 여론조작 인정..시효 지나 ‘불문’ 권성연 대통령실 교육비서관이 친일·독재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폐기된 박근혜 정부 역사 국정교과서 추진 과정에서 ‘여론 조작’ 등 실무를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국정교과서 추진 주역인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특별고문으로 임명한 데 이어 국정교과서 관련자를 재차 등용한 것을 두고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17일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확보한 교육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관련 조사 결과 보고서’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백서’를 종합하면, 윤 비서관은 2014년 1월~12월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장으로 일하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실행계획과 핵심 논리를 개발하고 국정화 찬성 여론을 조성·조작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체적으로 윤 비서관은 2014년 8월30일 열린 텔레비전 토론회에 국정화 지지 토론자로 나선 강은희 당시 새누리당 의원에게 직접 토론 자료를 제공했다. 같은 해 9월2일과 9월14일 국정화 지지 교수의 기고문이 문화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리도록 계획했고, 실제로 기고문이 실렸다. 권 비서관은 교육부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사전에 이들 교수와 소통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겨레>는 이날 권 비서관에게 전화와 문자를 통해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권 비서관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특히 권 비서관은 2014년 9월25일 열린 2차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토론회에서 국정화 찬성 의견이 다수가
[전남일보] “5·18 광주 진압 가해자 ‘인명사전’ 만들자”
5·18, 이제는 정리 작업 필요할 때 친일인명사전처럼 가해자 알려야 “반민주·독재자의 역사 기록해야” 42년 전 5·18 광주 진압 가해자들의 ‘인명사전’을 제작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기준을 세우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가해자의 만행을 적극 알려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전두환·노태우 씨가 광주 학살의 진실을 끝내 밝히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이대로 두면 가해자들의 만행이 조용히 묻혀버릴 것이라는 우려에서부터 출발했다. 지난해 10월26일 노태우 씨 사망에 이어 같은 해 11월23일 전두환 씨도 사망했다. 두 사람은 12·12 쿠데타 과정에서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 혐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결국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은 묻지 못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참회나 사과 등 의 뉘우침조차 없었다. 더욱이 두 사람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 14명 가운데 현재 6명이 죽고, 8명만 남았다. 살아있는 이들 또한 고령이어서 언제 사망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 전씨가 사망한 지난해 11월 광주시공공기관협의회는 “광주학살의 철저한 진실규명을 위해 우리도 함께 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5월 학살 주범과 잔당, 부역자들의 인명사전을 제작하자고 제언했다. 협의회는 성명을 통해 “공범 노태우에 이어 주범 전두환까지 죽었지만 잔당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더 이상 손을 놓고 있다가는 그들 역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친일인명사전’처럼 5·18 광주학살의 공범과 잔당, 부역자들의 인명사전을 만들어 끝까지 진실을 밝히고 단죄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5·18민주화운동은 발생 직후 42년동안 광주시민들에게 분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