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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 58]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그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71세인 2012년 8월 28일, 청구성당 주임신부를 끝으로 현장사목에서 물러났다. 정년퇴임한 것이다. 때로 보호막이고 굴레가 되기도 했던 사제생활 44년의 마무리다. 하지만 그는 “너는 멜키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히브리 5,6)라는 성경말씀 대로 영원히 사제일 뿐이다. 퇴임을 앞두고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사회에서 지금 시급한 일은 뭐라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답한다. “가치관 정립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까이는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그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결국 박정희 같은 친일자가 대통령이 되고 박근혜까지 이어 오고 있잖아요.” (주석 1) 퇴임 5개월 후인 2013년 1월 31일, 그는 친일잔재 청산의 전위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의협심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자리였다. 조ㆍ중ㆍ동을 비롯 수구세력이 가장 적대시하고, 검찰ㆍ사법부가 박근혜 정권의 사냥꾼 노릇을 하던 시절이다. 민문연의 임헌영 소장은 “함 신부는 1970년대부터 한국 민주화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오셨고, 민주주의와 역사 정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서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추대한 함 신부의 활동으로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함세웅은 1991년 민문연의 지도위원, 1993년에는 후원회장을 맡는 등 민문연과 이미 끈끈한 인연을 맺어왔다. 이돈명ㆍ조문기ㆍ김병상에 이어 4대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소신을 밝혔다. “한국은 지금 ‘역사전쟁’ 중입니다.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잘못입니다. ‘바로 잡지
[KBS NEWS][특파원 리포트] ‘노예란 바로 이런 것’ 여든여덟 日 할머니의 눈물
도쿄에서 2시간 남짓. 후지산에서 멀지 않은 야마나시(山梨)현의 한 작은 마을로 향했습니다. 어렵게 찾아간 노지와 마사코(野澤真砂子) 씨의 집에 모인 3명의 여성을 만났습니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출간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들의 자서전 <빼앗긴 청춘 빼앗긴 인생>을 함께 읽은 이들입니다.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힘겨운 소송을 이어가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기억들. 이들은 책을 읽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앳된 소녀들을 일본이 전쟁에 동원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웠고, 지금까지 이런 역사를 잘 몰랐다는 것도 충격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평생을 힘겹게 싸워온 할머니들이 온 힘을 다해 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웠다고 전했습니다. 여든여덟 고령의 나이에도 책을 하룻밤에 다 읽고 말았다는 노자와 씨.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 대신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대한 감상이라도 전하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평소 취미로 해 오던 시와 단가를 쓰는 것뿐. 노자와 씨는 ‘할머니의 노래’라는 시를 지어 할머니들에게 보내왔습니다.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들과 비슷한 나이인 노자와 씨는 시에서 할머니들을 ‘이웃나라 소녀’라고 표현했습니다. 같은 시기 일본 땅에서 전쟁을 겪은 그 소녀들은 자신의 눈에도 ‘노예’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머니의 노래> 송두리째 빼앗겼네 꽃다운 청춘 할머니 글은 서글픈 기록의 바다 이웃 나라 소녀들이 끌려온 전쟁은 슬픔을 쏟아내는 평생의 상처로다 자서전 속 풍기는 인간의 향기 되돌리는 외침에 얼얼한 깊은 밤 노예란 바로 이러한 것이려나 끌려온 이웃나라 소녀들의 진실한 기록 빼앗긴
[세계일보] 출산 보름도 안 돼 ‘위안부’ 끌려가… 中 피해자 3명 추가 확인
101세인 팡(方)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던 그 날을 여전히 기억한다. 1939년 당시 18세였던 그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지 보름도 되지 않은 어느날, 일본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시아버지는 일본군을 막아 섰다가 총검에 목숨을 잃었고, 일본군은 집을 약탈한 뒤 팡 할머니를 데려갔다. 여드레가 지나 집에 돌아왔을 때, 아기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아기였다. 팡 할머니는 일본군에 폭행당한 후유증으로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중국 후난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 할머니 세 명이 추가로 확인됐다. 난징대학살희생동포기념관은 29일 101세 팡 할머니와 95세 어우(欧) 할머니, 91세 선(沈) 할머니를 찾아 위안부 피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자원봉사자들은 세 할머니와 가족들, 마을 주민들을 만나 일본 침략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어우 할머니는 1941년 일본군에 끌려갔다. 당시 그는 14세에 불과했다. 일본군이 마을에 왔을 때 사람들이 도망갔지만 어우 할머니는 귀가 들리지 않아 도망가지 못하고 붙잡혔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어우 할머니가 집에 돌아온 뒤 가족들은 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됐다. 어우 할머니는 일찍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쫓겨났고, 아무도 그를 모르는 먼 곳으로 다시 시집을 갔다. 여동생의 일에 분노한 어우 할머니의 오빠는 군에 지원해 항일 전쟁에 참전했다. 어우 할머니의 오빠는 자원봉사자들과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선 할머니는 13세에 위안부가 됐다. 일본군이 그가 살던 산골짜기를 거점으로
[오마이뉴스] 학살자는 국립묘지에, 피해자는 구덩이에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48] 상반된 무덤, 대전현충원과 대전 산내 골령골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의 맨 아래부터 110계단을 올라가면 맨 위쪽 8번째에 함병선 중장의 묘(장군 제1-8)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던 함병선은 제주 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온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였던 제2연대의 연대장이었다. 이후 중장까지 진급 후 예편하여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북촌 학살사건은 1949년 1월 17일, 한날한시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 4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집단 총살 당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제2연대는 1946년 2월 28일 대전에서 창설된 부대로, 1948년 12월 29일에 제주 제9연대와 교체해 제주에 주둔했다.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는 구체적으로 제2연대 3대대다. 3대대는 비밀리에 입대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해 이른바 ‘서청대대’라 불리었다. 대전현충원에는 서북청년회를 주도했던 인물도 안장되어 있다. 바로 서북청년회 초대위원장을 지낸 선우기성(독립유공자 1-85)과 서북청년회 중앙본부 위원장을 지낸 문봉제(경찰1-501-8)다. 4.3 사건 당시 3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은 대전형무소로 끌려왔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 모두 학살됐다. 이들은 70여 년 동안 대전의 동남쪽에 위치한 산내 골령골의 땅속 긴 구덩이 속에서 누구의 뼈인지도 모른 채 뒤엉켜 있었다. 그런데 4.3사건의 가해 책임자들은 정반대 편, 대전의 서북쪽에 위치한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제주에 주둔하기 직전 제2연대는 여수에서 봉기한 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해 순천과 여수에 투입되었다. 제2연대(1, 2대대, 3대대 일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 작전부터 1949년
[팟캐스트] 역발상 시즌1_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_식민지시대 사람들 9편
☞ (05.31) ‘역발상’ 시즌 1: 신민요의 여왕들 왕수복과 이화자_식민지시대 사람들 9편 오늘의 이야기 : 1930년대 신민요 가수로 ‘여왕’ 소리를 함께 들었던 왕수복과 이화자 출연 : 이준희(옛가요 전문가)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1. <고도의 정한> 왕수복은 공전의 히트곡 <고도의 정한>으로 최초의 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로 선정. 바로 그때 이화자는 김용환의 테스트를 받으며 가수로서 가능성을 확인 2. <노랫가락> 평양 권번에서 음악을 익힌 왕수복과 역시 기생 출신의 이화자..기생은 어떤 삶을 살았나? 3.<아리랑> 이화자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분방하게 생활. 남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자를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연애를 실천 4.<화류춘몽> 최고의 신민요 가수로 갈채를 받기는 했지만, 그런 인기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허허로움이 있었는지, 1940년대 들어 이화자는 심각한 아편 중독자가 됨. 부산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요릿집 운영에 나서기도 했으나 5.<꼴망태 목동> 왕수복은 해방 후 남한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었고, 북한에서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 왕수복의 독특한 창법은 민족적이면서도 봉건적이지 않은 노래로 평가 6.<어머님전상백> 계절에 맞지도 않는 낡은 여우 목도리를 언제나 두르고 다니며 삶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이화자 ※지난 방송 ☞ (05.24) ‘역발상’ 시즌 1: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_책과 함께 식민지시대 사람들 ☞ (05.17) ‘역발상’ 시즌 1: 혁명을 꿈꾼 독서가들_책과 함께 식민지시대 사람들 ☞ (05.12) ‘역발상’ 시즌 1: 월간특집 <25共感> 역발상이 추천하는 방구석 영화 1탄 “오퍼레이션 피날레” ☞ (05.10) ‘역발상’ 시즌 1: 삼천만의 여배우’문예봉’_식민지시대
[오마이뉴스] 고분고분했으면 주교ㆍ추기경 됐을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 52] 추기경하고 논쟁할 때나 신학교를 떠나올 때… 그의 말과 글은 논리적이지만 매우 날카롭다. 사회적 강자와의 대화와 글에서 특히 그러하다. 상대가 아무리 높은 위치라도 할 말을 하고 기탄없이 잘못을 지적한다. 가톨릭 내부의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김옥균ㆍ정진석 주교 등과의 갈등은 바깥사회에도 알려졌다. ‘갈등’이란 표현보다 고분고분하지 않는 ‘이의 제기’ 또는 ‘반론’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이 집권한 얼마 후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 김승훈ㆍ김택암ㆍ안충석ㆍ문규현 신부와 함께였다. 김대중은 민주화운동의 동지이면서 ‘옥중동지’였다. 취임 초기 정부가 제2건국위원회를 준비하면서 참여를 요청했으나, 신부는 그런 데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사양했다. 다음은 청와대에서 직언한 내용이다. 인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했어요. “호남 분들을 잘 기용하는 것은 좋은데 대통령께서 쓰시는 호남 인사들은 사실 과거 정권 때 다 공직을 맡으신 분들입니다. 출신은 호남이지만 사실상 호남인들을 짓밟고 고통을 준 분들인데, 호남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시 승승장구하게 하는 건 조금 잘못된 것 같습니다. 동진정책 쓰신다고도 하셨는데, 그런 영남이나 대구에서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분들을 써야지,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중용한다든지, 정보부에서 인권탄압의 대명사였던 이용택 같은 사람들을 기용하는 건 안 됩니다. 우리가 참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외교 면에서 훌륭하시고 경제정책도 잘하신다는 평이 있지만, 많은 분들이 김영삼 대통령 때의 인사정책과 김대중 대통령의 인사정책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희들 마음이 참 아픕니다. (주석
[서울경제] 日 또 망언…”한국 식민지배 惡이라는 자학사관 버려야”
前통막장 “韓 거부한 욱일기, 절대로 내릴 수 없는 것” 산케이 “日정부 사과·변명이 사태 악화” 보수우익 성향의 일본 언론이 문재인 정부 시절 자위대 욱일기 관련 한일 갈등을 재론하며 과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자국의 반성을 ‘자학사관’이라고 폄하했다. 이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나 제국주의 군대에 바탕을 둔 자위대의 긍지를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산케이는 26일 ‘한국의 해상자위대 욱일기 게양 거부 문제…전 통합막료장이 밝힌 속내’라는 칼럼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산케이는 “일·한(한일)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하는 등 반일 정책을 추진해 일본과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킨 한국의 문재인 정권이 물러났다”며 “윤석열 정부에서는 양국 관계 개선과 일·미·한(한미일) 안보체제의 강화가 기대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한국의 반일 감정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불신이 워낙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에 앞날은 험난할 것”이라며 욱일기 갈등을 거론했다. 신문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 일한 관계 악화가 국방 분야에까지 미쳤음을 각인시킨 것 중 하나가 2018년 10월 한국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서의 자위대 욱일기 문제였다. 한국 정부가 관함식에 초대한 해상자위대 함정에 자위함기인 욱일기의 게양을 불허하자 일본은 참가를 취소했다. 한국 측이 욱일기 게양을 거부한 배경에는 욱일기를 ‘전전(戰前)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의 상징’, ‘전범기’ 등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반일 사관이 자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에 대해 당시 통합막료장(한국으로 치면 합참의장)이었던 가와노 가쓰토시(68)는 “한국이 욱일기를 비판하는 것은 일본의 대응이 잘못된 탓도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가와노 전 통막장은
[오마이뉴스] 가족을 9명이나… ‘빨간 베레모’ 그 남자가 포기 못한 이유
[나의 학살 현장 답사기] 문경 석달마을 사건 진상규명 위해 평생을 바친 채의진씨 한국 전쟁 전후로 국가가 저지른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는 정치 사회뿐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존재한다. 영화 <바람난 가족> 도입부에서 변호사인 황정민은 차를 몰고 어느 산골짜기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유골을 발굴하고 있다. 곧이어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한 경찰들이 들이닥치며 유가족들과 소란이 벌어진다. 이때 유가족들 중 빨간 베레모를 쓴 한 노인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보조 출연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문경 석달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이자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바친 채의진이다. 한겨울의 토요일 오후, 문경 석달마을 1949년 12월 24일 정오 무렵, 문경 석달마을에 70여 명의 군인이 들어온다. 이들은 태백산 일대 빨치산 소탕을 위해 나선 태백산지구사령부 예하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와 3소대 소속이었다. 부대는 인근 지역의 정찰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선 그들은 더 이상 정찰대가 아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 빨갱이라고 윽박지르며 집집마다 불을 지른다. 그리고 마을 앞 논으로 주민들을 불러 모은다. 곧이어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과 소총을 쏘았다. 1차 사격 후 생존자들을 일으킨 다음 다시 사살한다. 잠시 후 마을 청장년 몇 명이 마을로 돌아오던 중 입구에서 몇 명의 군인들을 만났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곧이어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겨레] 10월 말, 건국대에 모인 학생들이 경찰에 포위됐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5) 애학투련과 86년 건국대 항쟁 신군부 계엄·광주 비극 등에 충격 NL계 주도 연합체 건국대서 항쟁 경찰, 무장헬기·사과탄 등 동원해 1288명 단일사건 세계 최다 구속 “하느님께 욕된 말을 삼가라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의 죽음을 가져온다. 빗나간 생활을 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하지 말고 그릇된 행위로 파멸을 초래하지 말라.”(지혜서 1,11-12)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겠느냐?”(루카 14,28)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시구는 윤동주 시인의 확신과 신념입니다. 하늘을 생각하며 민족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시인의 결단은 숭고하며 그 자체가 웅변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고비 고비마다 숱한 윤동주가 존재합니다.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선조들과 동체감을 느낍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우리는 선조들이 겪었던 아픔과 죽음을 똑같이 체험합니다. 선조들과의 동체감이 바로 민족애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감이 바로 신비체와 공동체의 원리이며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우는 청년의 열정입니다. NL·PD로 갈라진 학생운동 1970년대 우리 가톨릭 사제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어낸 이들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싸웠던 청년학생들입니다. 어느 날, 저는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민족통일에 투신한 청년학생들의 행업에 큰 감동을 받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재희 선생은 그 감흥을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셨습니다.
[오마이뉴스] 이토 히로부미 양아들로 불린 남자… 대구 동성로의 비밀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중양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과거에 매우 유명했던 친일파가 있다. 1957년 10월 23일 자 <경향신문> 3면 중간에 “친일파 거두”로 언급된 박중양(朴重陽)이 바로 그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활동했던 시기에 발행된 1949년 7월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에는 “반민(反民) 거물”로 언급돼 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57년, 그는 경무대(청와대)에 보낸 <신년 소감>이란 책자로 인해 명예훼손 수사를 받았다. 만 83세인 그가 집필해 각계 인사들에게 무료 배포한 그 책자가 이승만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해 9월 15일 자 <동아일보> 3면 하단에 따르면, 그 책자에 “쏘련이 우세, 미국인이 퇴거하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은 보찜 싸노라고 분망할 것이라”라는 글귀가 있었다. 소련이 강해져 미국이 나가게 되면 이승만이 짐 싸들고 분주하게 도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책을 경무대에도 보냈던 것이다. 그 책에 그런 내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9월 17일 자 <경향신문> 3면 좌상단은 “그 내용인즉 현세를 비방하며 행정 수반인 이 대통령을 모독하고 친일적인 글을 썼다는 것인데”라고 소개했다. 해방 이후의 시대 흐름을 비판하고 이승만을 모독하는 것에 더해 친일적 주장까지 담은 책자였던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는 조사 과정에서 박중양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됐다. 10월 23일 자 <경향신문> 3면 우중간 기사는 “(부장검사는) 박(朴)이 84세나 된 고령 관계로 밀우어 혹 정신이상에서 온 것이 아닌가 보고 소(蘇) 정신병원장에 박의 정신감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