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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부산 대학생들은 왜 미 문화원에 불을 질렀나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3) 부산 미문화원 방화 항거 미의 전두환 군부독재·광주참상 묵인에 항의 부산 대학생들 80년 3월 미문화원에 불 내 폭력적 방법이었으나 세계에 5·18 진실 알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마태오 10,34-35)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토로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행업에 대한 신앙고백과 선언으로, 희생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이 가능하다는 그리스도교의 역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마태오 26,52)라며 사도들을 꾸짖었던 것과는 상반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엇갈린 두 말씀을 깊이 사색하여 분명히 결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선한 지향과 목적을 가지고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라는 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미국은 물러가라” 부산에 터진 외침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지나오는 동안 미국은 우리에게 절대선,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독재자들은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나 않을까 늘
[뉴스타파] 권성연 교육비서관, 찬성 여론 조작 등 ‘박근혜 역사교과서 국정화’ 실무 주도
국정화 찬성 편향 토론회 개최 등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지지 여론 조성’ 주도 국정화 찬성 외부 필진의 기고문 기획해 보수 언론에 게재 등 관주도형 ‘여론 조작’ 보수 단체에 3,000만 원 연구과제 부당 지원 등 위법 행위도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실 교육비서관으로 임명된 권성연 씨가 과거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의 실무 작업을 주도하며 ‘여론 조작’까지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권 비서관은 2014년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장으로 있던 당시 국정화 찬성 여론을 조작하고, 보수 단체에 국정화 연구과제를 몰아 지원하는 등의 위법 행위를 저질렀고, 정권 교체 이후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에서 경고 조치 대상에 올랐던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 단체들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며 권 비서관의 임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권성연 비서관, 2014년 ‘국정화 찬성 여론 조작’ 작업의 실무 책임자 2013년 6월 17일 집권 4개월 차, “역사 교육을 새 정부에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전직 대통령 박근혜 씨의 발언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은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국정농단 사례 중 하나였다.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라는 역사 왜곡 비판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는 4년간 밀어붙였고,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폐기됐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정책의 폐기와 함께 2017년 9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했다. 조사위는 교육부 공무원과 변호사, 역사학자 등 외부 위원으로 구성됐다. 2017년 9월부터 2018년
[오마이뉴스] 부처님 팔아 일왕 모신 승려, 죽음조차도…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홍태욱 전쟁 반대와 평화주의를 논할 때 종종 언급되는 문구가 성경 이사야서 2장 4절이다.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개역개정판)라는 구절이다. 칼을 쳐서 농기구로 만들고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든다는 이 구절과 정반대로 행동한 인물이 있다. 무기를 녹여 무기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무기 아닌 것을 녹여 무기로 만드는 데 조력을 제공한 친일 승려 홍태욱이 바로 그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홍태욱 편은 그가 사찰 내의 금속류를 수집해 일제 침략 전쟁에 바쳤다고 설명한다. (1942년) 11월 봉은사 본·말사가 연합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용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철제류를 수집하여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1944년) 같은 해 11월 봉은사 본·말사에서 수집한 범종과 불구 691점 등의 금속류를 경성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 무관부에 직접 헌납했다. 홍태욱은 불교 수행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일제에 헌납했다. 부처님을 팔아 일왕(천황)에게 충성한 승려였던 것이다. 도둑이 찾아오는 승려의 집 출생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홍태욱은 3·1 운동 2년 뒤인 1921년부터 경기도 고양군 적조암, 양평군 개운사 및 용문사, 광주군 봉은사에서 주지를 역임했다. 마지막 사찰인 봉은사의 소재지는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이지만 이 당시는 경기도 광주였다. 산속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남긴 선시(禪詩) 중에는 낮잠에 관한 시들이 적지 않다. 고려시대에
[팟캐스트] 월간특집 <25共感> 역발상이 추천하는 방구석 영화 1탄 “오퍼레이션 피날레”
☞ (05.12) 월간특집<25共感> : 역발상이 추천하는 방구석 영화 1탄 “오퍼레이션 피날레” 오늘 함께할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오퍼레이션 피날레’입니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작전 ‘최종해결’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추적해 법정에 세운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의 활약을 그린 영화입니다. 2018년에 제작된 따끈한 신작으로 영화 간디로 유명한 ‘벤 킹슬리’가 아이히만 역으로, 인사이드 르윈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역할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오스카 아이작이 모사드 요원으로 출연했다. 독일의 과거청산과 한국의 과거청산을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앞으로 <<25共感>은 매월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역사를 좀 더 재밌게 발견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방송 ☞ (05.10) ‘역발상’ 시즌 1: 삼천만의 여배우’문예봉’_식민지시대 사람들 8편 ☞ (05.03) ‘역발상’ 시즌 1: 민족영화의 대명사 “아리랑과 나운규”_식민지시대 사람들 7편 ☞ (04.26) ‘역발상’ 시즌 1: 대중가요 작사의 쌍두마차 박영호와 조명암_식민지시대 사람들 6편 ☞ (04.19) ‘역발상’ 시즌 1: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 최고의 가수 ‘이난영”_식민지시대 사람들 5편 ☞ (04.12) ‘역발상’ 시즌 1: 영화로 혁명을 꿈꾸다 ‘주인규”_식민지시대 사람들 4편 ☞ (04.05) ‘역발상’ 시즌 1: 식민지시대 사람들 3편 _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난 조선영화의 개척자 “이경손” ☞ (03.29) ‘역발상’ 시즌 1: 식민지시대 사람들 2편 _한국의 고가 마사오 ‘박시춘’ 탁월한 대중성으로 군국가요도 탑 ☞ (03.22) ‘역발상’ 시즌 1: 식민지시대 사람들 1편 _대중가요 최초의 슈퍼스타 남인수 “군국가요에서부터 국가보안법 피해까지”
[오마이뉴스] 부인 덕에 대전현충원에 묻힌 친일행위자들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45] 서훈 취소돼도 이장시킬 수 없는 경우도 있어 친일반민족행위자라 하더라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서 사망한 사람’ 이외의 자격이 있다면 현행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국립묘지법)에 의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2009)나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라 하더라도 최소 29명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서 사망한 사람’이 친일반민족행위로 서훈이 취소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에 이장을 해야 한다. 서훈 취소로 현재까지 대전현충원에서 이장이 확인된 이들은 서춘(독립유공자1-151), 김응순(독립유공자3-360), 박성행(독립유공자1-212), 박영희(독립유공자1-166), 유재기(독립유공자3-891), 이동락(독립유공자2-488)이 있다. 강영석(독립유공자1-264)은 서훈이 취소됐지만 이장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서춘은 1963년에 독립장을 추서 받았지만,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필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 위원 경력이 드러나 1996에 서훈이 취소되었다. 서춘의 묘는 서훈 박탈 8년 만인 2004년 9월 22일에 대전현충원 밖으로 이장되었다. 서훈 박탈 후 가족에게 이장을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전현충원 측에서 묘비를 제거한 후에야 이장했다. 현행법에는 서훈 취소자에 관한 규정이 미비해 서훈이 취소되었다 하더라도 이장이 강제 규정이 아니다. 1990년에 애국장을 추서받은 박성행, 박영희, 이동락은 2011년에 서훈이 취소되었다. 박성행은 1940년대 내선일체 선전 등 각종 강연에 나섰고, 박영희는 1935년 정신작흥전개운동 회의 참석, 1937년 심전개발 순회강연 실시, 1930년 중반 비행기 헌납금을 납부했다. 이동락은 1936년 친일전향단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박성행은 서훈이 취소된 지 4년 만인 2015년 11월
[오마이뉴스] 삼성의 도움으로 재벌이 된 판사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홍진기 판사가 부모 유산 없이 재벌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사회적 지탄까지 받게 되면, 판사를 그만둔 뒤 재벌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유산도 많지 않고 사회적 지탄까지 받았는데도 재벌 기업의 초석을 닦은 판사 출신이 있다. 4·19 혁명 시기인 1960년 3월 23일 시위 진압 책임자인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친일파 홍진기가 바로 그다. 그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내무장관에 홍진기씨’는 그의 일제 치하 경력을 “4273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73년 10월 고문(高文) 사법과 합격, 76년 10월 전주지법 판사”로 소개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1940년에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통과해 일제 판사가 된 것이 그의 친일 이력의 출발점이다. 친일판사, 4.19 땐 “국민 살상의 죄” 사법시험 통과와 판사 부임 사이에도 경력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에 따르면, 경성지방법원과 이 법원 검사국에서 시보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는 검찰이 법원에 속했기 때문에 법원 검사국 시보는 지금의 검사 시보였다. 그는 일제 패망 5년을 남겨놓고 사회에 진출해 친일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기간은 친일행위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1917년에 경기도 고양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판사 재직 당시 20대 중반이었다. 1945년 8·15 해방은 홍진기에게 내려진 ‘역사의 선고’였다. 28세 때 받은 역사의 선고를 그는 43세 때도 받았다. 1960년 4·19 혁명 때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자 “국민을 살상한 죄”를 지었다.
[오마이뉴스] 아산 염치읍 학살지에서 탄피 대신 낫이 출토된 이유
7일 오후 유해 매장 확인… 수십여 구 추정 충남 아산 염치읍에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찰에 의해 집단 희생된 민간인 유해가 추가 발굴됐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아산유족회(이하 아산유족회)에서는 이곳에서만 최소 8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산유족회는 7일 오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새지기 일원에서 집단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아산시와 아산유족회는 아산시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유해매장추정지에 대한 유해 매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 조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날 유해가 확인된 새지기 일원에서의 집단희생은 1950년 9월 26일 새벽부터 3일 동안 마을 내 우익성향의 청년들과 치안대 등이 마을 내 좌익활동 관련자들을 마을 공회당에 구금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이들은 구금자들을 새지기 공동묘지로 끌고 가 집단 살해했다. 증언에 의하면 살해 도구는 총이 아니었다. 쇠몽둥이와 낫, 쇠스랑 같은 농기구였다. 농기구를 마구 휘둘려 상처를 낸 다음 사람들을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로세로 약 8m)에 몰아 놓고 그대로 생매장했다. 이날 시굴 조사에서는 희생자의 두개골과 다리뼈 등 유해와 함께 고무신 등 유품 다수가 나왔다. 다른 집단희생지에서 함께 출토되는 탄피와 탄두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증언을 뒷받침하듯 살해 도구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녹슨 낫이 발굴됐다. 2019년 발굴에서 유해 7구 발굴… 두 명은 형제 이곳에서는 지난 2019년 아산시가 주도한 발굴에서도 유해 7구가 발굴된 바 있다. 이 중 두 명은 서로 친형제였다. 유품으로는 단추,
[오마이뉴스] 우리가 몰랐던 지폐 속 세종대왕 초상화의 진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1TV <태종 이방원> KBS1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세종대왕의 이미지가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묘사됐다. 훗날 세종으로 불리게 될 충녕대군(김민기 분)이 형인 양녕대군(이태리 분)을 제치고 세자가 되는 과정을 <태종실록> 기록을 근거로 묘사했다. 그와 양녕대군 사이에서 경쟁관계가 있었으며, 그가 아버지 이방원에게 자기 능력을 적극 어필했다는 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형제 사이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식의 우애관계가 실제는 없었으며 세종이 형의 양보를 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의욕을 보였다는 이 드라마의 묘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떨어트리지 않는다. 세종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걷어내고 그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종의 참모습에 접근하려면, 이 외에도 극복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친일파들이 만들어놓은 세종의 허구적 이미지를 걷어내는 일도 그 중 하나다. 세종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원권 지폐 속의 세종 초상화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속 인물, 화가의 상상력 역사 속의 인물을 그릴 때는 화가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상상에는, 관행적으로 지켜지는 기준이 있다. 임오군란 2년 전인 1880년에 출생한 역사학자 신채호는 “역사는 역사 자체를 위해 기록해야 한다”며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기록해서는 안 된다”라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예컨대, 화가가 사람의 얼굴을 그릴 경우를 생각해보자. 연개소문을 그릴 때는 생김새가
[한겨레] 80년 5월18일 새벽미사 뒤 정보부요원이 들이닥쳤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2) 5·18 민중항쟁 80년 5월 남산에 두달 감금…‘김대중 내란음모’ 공작 시달려 석방뒤 광주학살 소식에 충격…광주는 “민족의 십자가”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그 안에서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쉴 곳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된 것을 보고 그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오 12,42-45)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그 여자는 배 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묵시록 12,1) 박정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바라던 민주주의가 곧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거저 얻은 것은 거저 잃게 마련입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뜻밖의 결단,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함께 손잡고 유신 잔재를 척결해야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려면 두 배 세 배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야말로 분골쇄신해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장을 찢는 결단’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정치 사회적 표현으로는 과거 청산입니다.
[오마이뉴스] 김구가 천만장자의 별장에서 사망한 사연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창학 친일파 최창학은 손꼽히는 일제강점기 재벌이었다. 그는 금광왕으로 불렸다. 1934년 1월 13일 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 등에서도 “금광왕 최창학 씨”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로도 조선 왕실은 그대로 유지됐고 조선 군주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왕이란 표현이 여전히 사용됐기 때문에, 민간인이 왕으로 불리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용인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재력이 막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그가 해방 뒤 얼마 뒤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해방 10년 뒤에 발행된 1955년 11월 20일 자 <경향신문> 3면 하단 기사는 “왕년의 광산왕 최창학 씨”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게 불린 것은 그 이전부터 그의 쇠락이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위 기사가 나오기 6년 전에 발행된 1949년 8월 10일 자 <조선일보> 2면 하단 기사는 최창학을 “과거 조선 광산왕”으로 소개했다. 같은 달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 기사는 광업계의 원로급 지도자 다섯이 그달 1일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금광 개발을 건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30일 자 기사는 최창학을 그 다섯 중에서 첫 번째로 거론했다. 이는 1949년 당시의 최창학이 예전 같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재계 원로로 활동할 만큼의 재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반에는 훨씬 더 쇠락해졌던 것이다.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그의 사업장 중 하나가 매각된 사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1938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