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활동
[인천일보]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인천상륙작전의 역사현장 탐방’ 행사 개최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지부장·김재용)는 25일 오전 인천역과 자유공원, 월미도 일원에서 ‘인천지역의 6.25 전쟁-인천상륙작전의 역사현장’ 탐방 행사를 가졌다.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의 세 번째 순서로 개최된 이 날 행사는 인천광역시 지원 사업으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인천역 앞에서 출발한 탐방단은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 북성포구와 월미공원, 월미 전통정원, 그린비치, 월미도 정상 등을 두 그룹으로 나눠 2시간여에 걸쳐 돌아봤다. 해설은 최태육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장과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각각 맡았다. 이 연구교수는 “1950년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빛나는 승리로 회자되고 있지만, 그 뒤에 가려진 월미도 원주민의 아픔은 조명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는 인천상륙작전 과정에서 벌어진 항공기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인해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의 희생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상륙작전을 감행한 미군은 ‘불필요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국제인도법상의 전쟁 규범을 외면한 채 군사적 목표물과 비군사적 목표물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 집중 포격을 자행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이런 희생을 치른 월미도 원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들의 거주지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지금까지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밝혔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지난 2006년부터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공동으로 ‘월미도미군폭격희생자위령제’를 거행하는 한편,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 연구교수는 “인천시와 국방부는 화해와 평화를 얘기하면서도 원주민들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한 채 인천상륙작전을 전쟁축제로 재생하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면서
[한국타임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고려인의 아픈 역사’ 민주인권 포럼 개최
10월2일 오후 2시 광주고려인마을에서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국가가 지키지 못한 백성 ‘고려인의 아픈 역사’ 민주인권 포럼이 오는 10월2일 오후 2시 ‘역사마을 1번지’ 광주고려인마을(대표 신조야)에서 개최된다. 고려인마을 내 월곡고려인문화관에서 개최되는 이번 포럼은 한국 근현대사에 나타나는 ‘국가폭력과 민주인권’ 주제의 제12강으로 광주광역시와 광주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고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가 운영한다. 강사로는 김병학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장이자 전)카자흐스탄한국문화센터소장과 김올가 백마탄장군 김경천 장군 후손, 한동건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이자 전)광주대학교 교수가 발제에 나선다. 고려인들의 마음의 고향 ‘연해주(원동)’는 역사적으로 우리 배달민족의 혼과 얼이 사무쳐 있는 곳이다. 먼 옛날, 고구려, 발해로 이어진 우리 조상의 발자취는 1000여 년의 단절 끝에 19세기 후반, 기아와 곤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을 시작으로 연해주는 다시금, 우리 한인들의 역사에 중요한 장이 되었다. 나라를 강탈당하자 국권회복의 희망을 품은 애국지사들이 연해주로 모여들자, 연해주는 항일 독립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최재형, 김경천, 홍범도, 윤봉길, 신채호, 이상설, 이종호, 이동녕, 이동휘, 안중근 등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나는 애국지사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피어린 투쟁을 연해주를 중심으로 벌였다. 하지만 1937년, 연해주에 거주하던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역사의 흔적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려인은 한국역사에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구 소련이 붕괴되자 또다시 유랑민으로 전락한 고려인 후손들이 새로운 이주지를 찾아 낯선 조상의 땅에 살며시 들어와 ‘곁방살이라도 좋으니 살게만 해달라’고 애걸 복걸했지만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국민일보] 일제침략·강제동원 상징 조병창 건물 철거반대…
8월 철거냐 보존이냐 분수령 일제 침략과 강제동원의 상징 조병창 병원건물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23일 성명서를 통해 “인천시장은 캠프마켓 1780 건물을 존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이하 시민참여위원회)는 1780 건물 철거를 재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같은 성명에서 “캠프마켓 내 1780 건물이 철거와 보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 건물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의 상징이자 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인 조병창의 병원 건물이었다. 국방부가 이 조병창 병원 건물을 8월 중에 철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지역사회는 조병창 병원 건물 철거 반대의 여론으로 들끓고 있다. 문화재청은 2021년 8월 3일 국방부에 2022년 3월까지 철거 유예를 요청했다. 국방부는 문화재청의 요구를 인천시에 통보했다. 철거 여부와 시기는 향후 캠프마켓 부지와 시설물을 인수하게 될 인천시의 판단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인천시장은 지역사회의 요구와 반대되는 철거 계획을 철회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캠프마켓은 일제가 조선에 설치한 무기공장 ‘인천육군조병창’이었다. 중일전쟁 도발 이후 일제는 부평에 조병창을 건설하면서 전국에서 1만 명 넘는 사람들을 강제동원하여 무기를 제조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강제동원에 반대하는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태업을 하고 무기를 빼내서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민족해방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성명에서 “철거될 것으로 알려진 조병창 병원 건물에는 무기 제조 과정에서 산업재해를 당한 어린 학생을 비롯한 많은 부상자들이 있었다. 지난 6월 시민참여위원회에서 한 위원은 ‘부평미군기지 내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역사적 의미가 큰 건물’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면서 “지난 3월 25일
[한겨레] “조선옷 주라”…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 김한동 시민이 서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고 김한동 선생 유가족에 서훈패 전달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좌익이었다는 이유로 외면당한 독립운동가에게 광주시민이 정부를 대신해 서훈을 수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는 “광복 76주년을 맞아 전날 광주 서구 마을카페 ‘싸목싸목’에서 고 김한동(1915∼1950) 선생 유족에게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를 전달했다”고 15일 밝혔다. 1915년 11월18일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1929년 4월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에 입학하며 그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이듬해 1월 퇴학당했다. 그는 1932년 5월 항일·노동운동 단체였던 전남노동협의회에 참가해 체포됐으나 미성년자여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7년 4월 서울에서 항일 적색노동조합 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가 1939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 선고받고 1941년 만기 출옥했다. 1945년 8월9일에는 옛 소련(러시아)이 태평양전쟁에 참여하자 진행된 사회주의자 예비검속 때 붙잡혀 해방 뒤에야 석방됐다. 석방 당시 김 선생이 던진 첫마디는 “조선옷 주라”였다고 한다. 김 선생은 1948년 11월 미군정청의 군정법령을 위반해 5년형을 선고받고 경북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김 선생의 혐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족은 경찰이 여순사건과 엮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좌익계열 수감자 등을 적법 절차도 없이 대거 학살했는데, 김 선생도 1950년 7월 중순께 진주시 명석면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남 김승일(78)씨 등 유족은 1998년 국가보훈처에 김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정부가 외면하니 시민 명의로 서훈패를 증정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KBC] 친일파 부터 착취 유적까지..3년간 37곳에 단죄문
【 앵커멘트 】 오늘은 76번 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광주시는 지난 2019년부터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친일 잔재물을 찾아 단죄문을 설치하고 있는데요. 친일파 선정비부터 친일 시인의 시비, 착취 유적 등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37건에 달할 정도로 우리 주변에 친일 잔재가 여전히 많습니다. 박성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기자 】 선열들의 공적을 기리는 광주공원 비석군에 비석 3개가 눕혀져 있습니다.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 전남 관찰사와 광주 군수 등을 지내며 한일강제합병에 도움을 주거나 의병을 탄압해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와 상 등을 받은 친일파 3명의 선정비입니다. 이들의 친일행적은 쓰러진 비석 옆에 단죄문으로 남았습니다. 친일 시인 서정주가 쓴 허백련 화백의 동상 비문과 너릿재 ‘무등을 보며’ 시비 옆에도 단죄문이 세워졌습니다. 지난 2019년부터 광주에서 발견된 일제 잔재물은 모두 37개. 친일파의 단죄문 뿐만 아니라 어린 여공들을 착취했던 전남도시제사 옛터 등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 건물에도 안내문이 세워졌습니다. ▶ 인터뷰 : 김순흥 /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조선의 많은 여공들이 장시간, 저임금, 강제노동을 당하다시피 해왔거든요. 노동착취를 통해 부를 착취해갔던 것이죠.” 광주시는 그동안 확인된 일제 잔재물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웹페이지를 올해 하반기 내에 구축하기로 했습니다. ▶ 인터뷰 : 정전국 / 광주시 민주인권과 – “지금까지 (단죄문을) 설치했던 현황에 대해서 웹자보를 구축해서 시민들께 홍보할 예정입니다. 또한 이 자료를 가지고 각급 학교, 교육청에도 배포해서 보다
[KBS] 동문회가 반대해서?..일제 잔재 청산 지지부진
[KBS 대전] [앵커] 교육당국도 일제 잔재 청산을 추진하고 있지만,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좀처럼 교체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문들의 반대가 크다는 게 이유인데 교육청에서도 강제할 방법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황정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이 초등학교는 최근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를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교체했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가 일제 강점기 때 보급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학교 곳곳에 심겨진 가이즈카 향나무는 예산을 마련해 모두 제거할 예정입니다. [박재관/대전 옥계초 교사 : “학생·학부모 의견 수렴을 거쳤는데 다행히도 모두 동의해 주셔서 한국 고유 수종인 소나무로 변경하게 됐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를 학교 상징으로 삼았던 대전지역 20개 학교, 충남지역 120개 학교가 수종을 교체했거나 교체를 추진 중입니다. 문제는 교가입니다. 충남의 이 고등학교 교가의 작곡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입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해 일제의 징병과 징용을 찬양하는 노래를 다수 만들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습니다. 학교에서 교가 교체를 추진했지만 동문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성원기/충남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장학사 : “어린 시절의 추억 공유와 또 현재 재학생과의 연결 고리가 아무래도 교가이다 보니까 졸업생들의 반대가 좀 큰 편입니다.”] 친일 인사가 작곡한 교가는 대전에 9개, 충남에 24개 학교에서 불리고 있지만 대부분 학교가 비슷한 핑계를 대며 교체를 미뤄 지금까지 교체된 건 7곳에 불과합니다. [홍경표/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 : “하루 빨리 미래 지향적인 내용으로 교가를 다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지역사회와 학교 동문들도
[KBS] “일제 잔재 청산”..단죄문 세워 역사 알린다
[KBS 광주] [앵커] 이틀 뒤면 제76주년 광복절인데요, 여전히 우리 주변 곳곳에는 일제 잔재가 남아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친일의 흔적을 미래세대가 기억할 수 있도록 일제 잔재에 단죄문과 안내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김정대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광주천 건너에 자리잡은 낡은 방직공장.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여공들의 애환이 서린 이곳은 일제 강점기 어린 여공 수 천명이 저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착취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김순흥/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 “(근로정신대처럼) 국내에서도 이렇게 강제동원했던 역사가 많이 있어요. 이 안에서 여공들이 기숙사라는 것도 거의 감옥 형태로 자유 행동을 할 수가 없었고…”]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이 있었던 광주공원. 일제 천황을 참배하던 신사가 세워진 민족의 아픔이 서린 공간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 신사는 시민들에 의해 헐렸지만, 일제가 만든 이 계단과 중앙광장은 아직 남아있는데요. 이 같은 역사를 잊지 않도록 계단 옆에 ‘단죄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지역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광주시가 3년째 ‘단죄문’ 설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일제 잔재 시설에 대한 역사적 사실, 친일 인사의 행적 등을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동안 세운 단죄문은 17개에 달합니다. [정전국/광주시 민주정신선양팀장 : “현재 광주 시내 현존하는 잔재물이 뭐고, 또 친일 인사의 행적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을 모두 조사해서… 올해 6곳을 대상으로 설치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목표로 3년치 사업이 마무리가 됐습니다.”] 광주시는
[연합뉴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김한동 선생에 독립운동 시민 서훈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참여했으나 좌익 가담 이력 논란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이 무산된 고(故) 김한동 선생에게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가 시민 서훈을 추진한다. 10일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에 따르면 김 선생에 대한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서훈패 증정 행사가 광복절 76주년을 하루 앞둔 오는 14일 열린다. 행사에서는 ‘서훈받지 못하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아픈 역사’를 주제로 강연이 이어진다. 김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11월 18일 전남 함평군 나산면에서 태어났다. 1929년 광주고보(현 광주서중·일고)에 입학해 같은 해 11월 친형인 김재동 선생과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성년이 된 뒤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둔 항일투쟁에 나섰고 일제에 의해 2년간 수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8년 12월에는 미군정청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950년 7월 중하순께 총살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1998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념 배경 때문에 무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는 지난해 이기홍·장재성 선생, 2019년에는 윤윤기·김범수 선생 등 지역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게 시민 서훈을 이어왔다. 정회성 기자 hs@yna.co.kr <2021-08-10> 연합뉴스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김한동 선생에 독립운동 시민 서훈
[오마이뉴스] “백제 오천 결사대 묻힌 ‘황산’ 두 동강, 이게 말이 되나”
[현장] 논산 연산면 송정리 주민들의 오래된 분노… 국토부 “미래의 교통량 증가에 대비” 백제 오천 결사대가 나당연합군과 최후까지 싸운 황산벌. 황산벌의 정확한 위치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통상적으로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인근으로 본다. 연산면 작은 마을인 송정리에는 천호산이라는 뒷산이 있다. 천호산의 옛 이름은 다름 아닌 ‘황산’이다. 옛 황산 앞에 자리잡은 송정리는 지난 2015년부터 도로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3일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마을 앞. ‘결사반대’ 글귀가 선명한 수십여 장의 현수막이 도로변에 빽빽이 붙어 있다. ‘천년 성산(천호산) 파괴하는 국토부 해체하라.’ ‘자연훼손, 주민들만 죽어난다.’ 곧바로 권희용 마을 이장을 만났다. 권 이장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과 충남교육청 일제잔재청산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지역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과 식견도 남달랐다. 7년째 논란 중인 ‘연산~두마 간 국도 우회도로’ 공사 1구간 국토부는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와 대전시 유성구 방동을 연결하는 연산~두마 간 국도 우회도로 개설공사를 벌이고 있다. 인근 국방대 이전과 계룡대 3군 본부로 인한 유동인구 증가로 시가지 교통체증에 따른 우회도로를 만드는 공사다. 총연장 8.5km에 공사비는 약 2500억 원이다. 송정리 주민들이 반대하는 구간은 1공구(1구간)의 3.4Km다. 공사 반대 이유를 묻자 권 이장은 대답 대신 마을 앞 도로(대전~논산 간 4차선 국도, 계백로) 건너편으로 안내했다. 마을 전경과 병풍처럼 펼쳐진 마을 뒷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권 이장이 마을 뒷산 중턱을 가리켰다. “산 중간 한가운데 가로로 움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