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북일수교를 전망하며 남북공동기억센터(가칭) 설립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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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책임연구원

 

4·27 판문점선언 이후 한반도에는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동안 38선을 경계로 한층 고조되었던 군사적·정치적 갈등을 진정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동북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변화의 바람이다. 현란할 정도로 전개되고 있는 남, 북, 미, 중 간의 외교전의 흐름을 볼 때, 이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양상을 띠게 될 것 같다. 물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서 평화체제가 확립될 때까지는 숱한 우여곡절과 일시적 후퇴도 겪게 될 것이지만, 한번 시작된 흐름은 계속 유지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머지않아 북과 일본도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이 추진될 것이다. 다가올 북일수교를 전망할 때 수교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가 다시 제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2002년 북과 일본은 이른바 평양선언에서 이 문제에 대한 큰 해결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평양선언문 2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조선 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했다.
쌍방은 일본측이 조선측에 대하여 국교 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 협력, 저이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경제 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 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 인식 밑에 국교 정상화회담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했다.(생략)

 

요약하자면, 1965년의 한일협정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 내용을 협약문에 넣을지 별도 성명으로 할지는 알 수 없으나 무상자금을 포함한 경제협력 방식은 한일협정을 기준으로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한일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추궁하지 못한 협정이며, 그로 인해 피해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이 더 지난 지금, 북과 일본이 수교하면서 지난날의 수준으로 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은 피해자의 관점이나 민족적 감정, 그리고 국제규범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수용하기 어렵다. 오랜 시간 식민지배의 피해를 극복하고자 유가족과 시민들이 흘렸던 땀들을 ‘제자리걸음 협정’으로 무로 돌릴 수는 없다. 다행히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강제동원 피해 청구소송 판결에서 한일 청구권협정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하여 책임 추궁할 근거를 법적으로는 남겨 놓았다. 그렇다면 북일과의 협정에서도 이런 법적 해석과 책임 추궁이 가능할까. 2002년 이후 여러 변화들을 고려해서 북이 교섭과정에서 1965년 한일협정과 평양선언의 수준을 뛰어넘는 내용을 요구할지, 아니면 평양선언의 틀을 고수할지는 알 수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디에 더 비중을 두고 정치적 결정을 하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사과와 배상의 전제가 되는 피해 실태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한일국교 수교과정에서 일본정부는 관련 자료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이로인해 군인·군속의 피해 규모를 축소해서 한국에 제시했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원폭피해자 문제 등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고, 강제동원 관련 기업 정보 또한 공개되지 않았다. BC급 전범문제는 일본의 거부로 교섭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피해의 증거자료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은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가해 자료는 일본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2004년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여 어느 정도 피해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일제하의 남북 인구 분포나 강제동원 피해 관련 자료들의 조사에서도 확인되듯이 북 출신의 피해자들은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 120만 명 가운데 25% 내외인 30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은 대부분은 일본과 한국에 있다. 일제시기의 정책 자료들은 모두 일본과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북에 있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발생한 인적·물적 피해의 실태를 남북 공동으로 조사·연구하는 남북공동기억센터(가칭) 설립을 제안한다. 일차는 인적 피해 중 남북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강제동원 피해문제를 함께 풀어내고, 이차는 식민지배 하에서의 인권 침해와 재정과 물자 수탈로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다. 센터 설립을 제안하는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향후 진행될 북일수교를 계기로 삼아 일제하에서 발생했던 인적·물적피해 실태를 공동으로 조사함으로써 ‘대일 과거청산’을 위한 종합적인 진상규명을 추진할 수 있다. 관련 자료의 공동 집적과 이용을 통해 분절된 조사·연구에서 통합된 조사·연구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분단으로 인해 벌어진 역사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고 공통의 기억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념과 체제, 생활양식의 차이로 생긴 간극은 생각보다 매우 깊다. 이 간극을 메워나가기 위해서는 민족이 함께 겪었던 고통과 피해의 역사를 함께 정리하고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셋째,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를 받지 않는 분야부터 교류를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목적도 있다. 현재의 상태는 아주 미묘한 상황이다. 북미 간에 비핵화를 비롯하여 포괄적인 협정이 체결되어야 근본적인 교류와 협력이 시작되겠지만 우리로서는 그때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남북 공동조사와 연구는 그런 점에서 효율적인 분야라 할 수 있다.
남북공동기억센터는 남북이 함께 민관공동위원회와 추진단을 구성하고 운영하며, 여기에 일본과 중국 등의 관련 연구자와 시민단체도 참여함으로써 동아시아 차원에서 ‘식민주의 극복과 평화 실현’을 위한 민관 국제연대의 토대가 되리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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