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오전 10시 방학진 기획실장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성남산업진흥원을 찾았다. 성남산업진흥원 원장으로 있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장병화 회장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장병화 회장은 환하고 밝은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선한 인상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인데도 구김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정말 그 많은 풍상을 겪으신 분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에게서 아버지 장이호 선생의 광복군 활동, 기업인으로 자수성가하기까지 겪은 경험담,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후 지속해온 역사실천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문 : 부친 장이호 선생은 젊은 나이에 광복군에 투신해 국내 진입을 준비하고, 광복 후에도 중국에 남아 동포들의 보호와 안전귀국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뒤늦게 귀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친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답 : 사실, 제가 너무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어린 시절은 외갓집에서 보냈는데, 그때 우리 식구는 너무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죠.
하루 세끼 제대로 먹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보냈어요. 아버지에 대한 관심보다 눈앞의 허기를 채우는 것이 먼저였죠. 고생 끝에 음향회사를 차려 자리를 잡아갈 무렵 당시 남대문시장 안에 광복군동지회가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갔어요. 어르신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분들은 저희 가족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계셨죠. 너무도 반갑게 절 맞아주셨어요. 동지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며, 아버지와 지청천장군이 함께찍은 사진을 내보이시며 일제와 맞서 싸우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열아홉 나이에 고향 신의주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 광복군을 찾아가셨어요. 중국군관학교 한청반(韓靑班)에서 4년간 간부훈련을 받으셨어요. 이후 광복군 2지대에 투신해 일본군을 상대로 기밀탐지와 지하공작 등을 하셨어요. 1944년 광복군 제3지대 분대장이 되어,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 신병 모집을 하시며 김준엽 · 장준하 등의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하셨죠. 해방 직전인 1945년엔 서주지구 일본군 부대에 배치된 조선인 학도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한미합작 전략특수(OSS) 훈련을 받았는데 일제가 항복하면서 작전이 취소되어 귀국을 준비하셨어요. 광복 후 바로 돌아오지 못하시고 서
주지구 군사특파원단으로 파견돼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임무를 수행하다 1946년에야 귀국하셨어요.
1947년 나이 서른에 열 살 아래 어머니와 결혼해 저와 동생을 낳으셨어요.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일제 앞잡이였던 사찰계 형사들에게 온갖 시달림을 받으셨어요. 백범선생의 한국독립당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죠. 제 나이 네 살에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어요. 우리 식구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졌는데도 아버지는 피난을 가지 않으셨어요.
절대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을 믿었기 때문이죠. 9・28 서울 수복을 나흘 앞두고 부모님 그리고 돌도 지나지 않은 동생이 인민군에 끌려갔어요. 동네 빨갱이가 밀고해서였어요. 죽음을 예견한 아버지가 저는 빼돌려 이웃집에 맡기셨어요. 그런데 어머니 등에 업힌 갓난쟁이 동생이 하도 울어대니까 한 인민군이 어머니와 동생을 빼줘서 겨우 살아났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성북경찰서 뒤 돌산에서 총살당하고 말았어요.
1947. 5. 18.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환국 후 환영 기념촬영. 가운데 원이 지청천 장군, 오른쪽 원이 장이호 선생
문 : 부친이 돌아가신 후 생활이 곤란했을텐데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답 : 어머니는 1·4후퇴가 있기 전에 저희 어린 형제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어요. 얼마지나지 않아 친정인 강릉 주문진으로 다시 옮겨갔어요. 외갓집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갔지만, 늘 허기를 달고 살았어요. 그 시절의 배고픔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학교 다닐 땐 성적이 좋았어요. 똑똑하단 소리 좀 들었죠. 하지만 머릿속엔 늘 돈 벌 궁리뿐이었어요. 그게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어요. 누가 일본이 잘산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일본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빠져들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헤엄을 쳐서라도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중학교 졸업 직전 늘 하던 생각을 드디어 실행했어요. 서울행 기차에 올라탔어요. 도둑기차를 탔죠. 차표 검사가 시작되면 기차 난간에 매달리며 목숨을 걸었어요. 결국 청량리역에 도착했지만 역무원에게 붙잡혔어요. 다행히도 학생복을 입고 있는 절 좋게 봐주셔서 꿀밤 몇 대 맞고 풀려났지만요. 부산행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까지 갔지만 철통같은 감시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어요. 그때부터 부산행 기차표 값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어요.
그런데 가출 청소년을 위한 일자리는 없더라고요. 굶기를 밥 먹 듯하며 이곳저곳에서 노숙을 하며 거지나 다름없었죠. 어느 날 제기동의 한 공장에서 밥을 준다는 거예요. 무조건 가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정말 밥만 주지 돈 한 푼 안주는 거예요. 이래서는 부산행 차표를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일자릴 찾아 나섰어요. 하지만 월급 주는 곳은 보증인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서울에 사신다는 외삼촌을 찾아갔어요. 보증은커녕 목 빼고 기다리시는 어머니에게 내려 보내졌지요. 하지만 주문진에 와서도 늘 서울 생각뿐이었어요. 얼마 후 다시 서울에 올라갔어요. 몇달간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외삼촌 소개로 전축을 만드는 성일사라는 공장에 취업했어요. 기술자가 되면 배는 곯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저의 학창시절은 끝이 났어요.
문 : 그러나 취업 후 한결 같은 성실함으로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최고의 기술자 자리에 오르셨어요.
1977년에는 자신의 회사를 차리게 되셨잖아요.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을 것 같은데, 부친
의 광복군 활동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답 : 성일사에 취업해서는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행운도 함께 따랐어요. 가게 문을 열고 닫는 것은 항상 저의 몫이었어요. 늘 성실하게 일하는 날이 계속되자 공장장님이 종로에 있는 한국TV기술학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 기술자가 돼서 제 업체를 갖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저의 상사였던, 옥 아무개 공장장님은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전자분야 최고의 기술자였어요. 절 많이 아끼고 여러 기술을 잘 가르쳐주셨어요. 큰 장롱 같은 진공관 앰프에선 늘 아름다운 소리가 새어 나오고, 그 소리에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새워 일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공장과 학원을 오가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일했어요. 기술이 금세 늘더라고요. 못 고치는 전축과 라디오가 없을 정도였어요.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자 시골내기인 저에게도 기회가 왔어요. 한 3년 지났을 때였는가, 을지로 4가에서 진열장 하나 놓고 노점을 시작했어요. 전축과 라디오를 고치기도 하고 팔기도 했는데, 계속 고객이 늘어갔어요. 그리고 3년 만에 3평짜리 점포를 얻어 전파사 같은 것을 운영하다 군에 가게 되었어요. 할 수 없이 동생에게 가게를 맡기고 갔는데, 제대하니 가게 문을 닫았더라고요. 어쩌겠어요, 노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고생을 해도 기술이 있으니까 두려울 게 없었어요. 그러다 1977년 가을에 을지로 4가 대림상가 3층에 정식으로 생산공장을 만들고 제조업을 시작했어요. 40년을 함께 하게 될 제 기업(음향기기 전문업체인 가락전자)의 출발점입니다.
공장을 차렸을 즈음, 돈이 벌리게 되니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났어요. 남대문 시장 안에 광복군동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갔어요. 아버님과 함께 독립운동 하시던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분들이 동지의 아들은 동지라면서 지청천 장군과 함께 찍은 아버지 사진을 주셨어요.
그 어른들 덕분에 아버지의 공적을 인정받고 훈장도 받게 됐어요. 그때부터 아버지의 과거 활동에 대한 모든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광복군의 후예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무엇이든 할 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서서히 역사에 눈이 뜨이더라고요. 목숨 걸고 일제와 싸운 아버지는 광복 후 독재자의 탄압에 시달리다 전쟁으로 불행하게 돌아가셨는데, 그 아버지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이는 일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다짐한 친일파 박정희라니… 이제부터는 광복군의 아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이 땅에 정의가 늘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더 역사공부에 매달리게 되었죠.
문 : 그 후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많은 후원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임종국상’의 운영경비를 10년 이상 지원해 오고 있으시죠. 또한 이번에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 내의 오디오시설 일체를 가락전자에서 시공해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어떤 계기로 연구소를 알게 되셨나요?
답 :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알게 되니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에 더 큰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시간만 되면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을 막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실망도 많이 했죠. 힘들게 사시는 후손이 너무 많았어요. 광복회는 감투싸움이 그치지 않아 독립운동 정신의 계승과 현양은 뒷전이었구요.
그러다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을 만나고 민족문제연구소도 알게 되면서 답답했던 갈증이 한 번에 풀렸어요. 조선생님은 활동했던 장소는 달라도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목숨을 나라에 내놓으셨던 분이잖아요. 아버지를 다시 보는 듯했어요. 그분이 ‘친일 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을 하고 계실 때였어요. 친일인명사전 편찬도 시민의 모금으로 꼭 이루고 말거라 하시더라구요. 함께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야 만났구나 싶었어요. 그때가 1999년인데 바로 연구소 정기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2005년도에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헌신하며 민족문제연구소 설립의 계기를 마련해주셨던 임종국선생을 기리는 상을 제정하려 한다기에 제가 돕겠다고 했어요. 그해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임종국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기 시작했어요. 친일 청산과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임종국 선생의 뜻이 서려 있는 상이예요. 제가 사업회 회장을 맡고, 임종국상의 상금을 전액 지원하기로 했어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이라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너무 좋아하셨을 거예요.
지난 7월에 가락전자를 맡고 있는 아들이 조문기 선생님 추모식에 다녀오면서 “한 달 후 민족문제연구소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개관하는데, 오디오시설을 기증하고 싶어요” 하더라고요.
아들이 할아버지와 제 뜻을 알아주는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
전 아직도 우리가 완벽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민족정기가 도둑맞고 사회정의가 빛을 잃었다고 생각해요. 민족에게 반역을 저지르고도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 향유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큰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지사들과 그 후손들은 오늘도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요. 이 뒤바뀐 안타까운 현실을 바로잡고 청산해야지, 민족의 아픈 상처를 더 이상 대물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문 : 완벽한 친일파 청산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회장님은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지요?
답 :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죠. 친일파 자료를 더 발굴해야 하고 철저하게 고증해서 후손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지요. 한 번 왜곡된 역사가 민족에게 어떤 피해를 가져오는지 오랜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똑똑히 봐왔잖아요. 더 이상 도덕적 해이와 정신적 오염을 가져오게 하는 혼란은 없어야 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역사적 망언들이 더는 나와서는 안돼요. 또다시 국가의 위기가 닥친다면 누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하겠어요. 과거민족 반역자들을 엄단한 나라들은 지금은 일류국가로 당당하게 우뚝 섰어요. 이 나라들은 민족 반역자의 말로를 후손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었기에 민주국가의 참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거잖아요. 우리 스스로 완벽한 친일 청산을 이루지 못한다면 일본의 망언은 언제까지나 그치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거예요. 가해자로서의 부끄러운 역사를 교과서에서 다 지울 것이 분명해요. 계속해서 야스쿠니 신사를 총리가 앞장서서 참배할거라봐요. 그래서 더욱 우리 스스로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정직하게 기록하고 청산하는 내부개혁
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군의 아들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제 독립운동의 목표를 친일파 청산과 민주사회 구현 그리고 남북통일로 잡았어요. 특히 전 통일된 국가를 만드는 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독립선열들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날이라고 생각해요. 남은 목숨을 통일에 바치려고 해요. 통일 독립군이 되려고요. 하나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며 통일이 되는 날까지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어요.
문 : 현재 성남산업진흥원 원장으로 계신데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성남산업진흥원의 업무를 소개해주십시오.
답 : 이재명 전 성남시장이 청렴함과 경영능력을 갖춘 인물을 성남산업진흥원 원장으로 공모했어요. 이 시장과는 일면식도 없었는데, 저의 청렴함과 경영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낙점되었다 하더군요. 사실 저는 가락전자 30주년을 맞은 2007년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어요. 성남산업진흥원을 맡게 되니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민간기업하곤 확실히 많이달랐어요. 비효율적인 것들을 바꾸느라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였어요. ‘2현 3무’로 개혁을 시작했어요. 저나 직원 모두가 2일은 현장, 3일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형태로 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어요.
창업센터와 특허은행도 설립했어요. 스타트업 기업을 위한 성남창업센터 ‘정글on’은 기업의 태생부터 만들어내는 곳이어요. ‘정글on’은 정글 속에 숨어 있는 무한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처럼,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탄생하도록 지원하고 있어요. 또한 중소기업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IP(지식재산)이지요. 바로 지식재산에 취약한 중소‧벤처기업과 시민에게 지식재산권 상담부터 교육, 권리화, 지원 등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성남특허은행도 만들었어요. 이런저런일을 하다 보니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이 일은 올해 임기가 끝나요.
전 어떤 일을 해도 늘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신 열정을… 저도 그런 열정으로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