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가족과 함께 본 식민지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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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 <구석구석 박물관1>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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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혼자 가도 좋지만 같이 가면 더 좋을 텐데. “얼마 전에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겼는데, 같이 갈래?” 다른 때는 박물관에 가자고 하면 두어 번쯤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벌이는데, 웬일인지 이번은 다르다. 딸아이가 박물관을 본 후에는 자기가 가고 싶은 데 가자며 흔쾌히 대답했다. 같이 박물관을 간다는데 그 정도쯤이야.
“그런데 거기 뭐하는 데야?”
“옛날에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지배를 당한 적이 있어. 그때 역사를 잊지 말자고 만든 곳이야.”
아내와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지인들과 박물관을 새롭게 보는 활동을 하는 덕분에 개관하기 전 미리 박물관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사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아내와 딸은 어떻게 박물관을 볼지 무척 궁금했다. 요즘 우리 가족이 박물관을 관람하는 방법은 이렇다. 나와 딸아이가 같이 다닌다. 대장 역할은 딸아이가 맡고 나는 딸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반면 아내는 따로 다니며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박물관에서 발걸음을 멈춘 곳은 박물관 입구였다. 그곳은 일반적인 박물관과 다르다. 입구를 따라 늘어선 벽에는 후원한 사람과 단체의 이름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이 벽 자체가 무엇보다 강렬한 박물관의 역사였다. 후원자들은 자기 이름을 찾아보면서 얼마나 뿌듯해 할까.
1층은 관람자를 맞이하는 공간이다. 의자와 책상이 놓인 널찍한 곳으로, 나중에는 기획전시 실로 사용할 계획이란다. 딸과 같이 둘러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초석을 놓은 임종국 선생님의 글 앞에서 섰다. 이런 글은 실제로 읽어볼 때 울림이 더하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같이 읽고 난 후였다.
“친일이 뭐야?”
식민지나 친일과 같은 말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아이에게 말해주려고 하면 머리가 멍해진다. 고민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 사람인데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일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거.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만 잘 살려고 그런 거야.”
까다로운 숙제를 마친 기분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오랜 만에 동창을 만나는 기분으로 전시실에 들어섰다. 그때보다 한결 안정되고 정리되었다. ‘관계자들이 그 사이애를 많이 썼구나. 여러 사람 의견을 귀담아 듣고 전시에 반영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박물관은 모두 4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다. 1부는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 2부는 일제의 침략전쟁, 3부는 한 시대의 다른 삶,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 4부는 과거를 이겨내는 힘이다. 이 가운데 3부와 4부는 다른 박물관에서는 보기 힘든 전시 구성으로 박물관의 정체성이 잘 드러난다. 이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증오와 회피와 외면이 아니라 직시와 반성과 성찰에서 온다고 강조하였다.
아내는 아내대로 관람을 하고 나는 딸아이를 따라다녔다. 딸아이가 어디에서 발걸음을 멈출까? 관리들이 찼던 칼, 첫 총독인 데라우치 얼굴, 청일전쟁 전투 그림, 조선물산공진회 선전물 앞에서 멈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군인들은 왜 크게 그렸는지, 여성들 복장은 왜 다른지 등등. 그러다가 친일인명사전 전시 공간에 왔을 때였다.
“아빠, 친일파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좀 알려줘.”
이완용, 송병준, 윤덕영 등등. 딸아이는 검색기에서 찾아보더니 한마디 했다.
“뭘 이렇게 나쁜 일을 많이 했어! 근데 (기록된 분량이) 적다고 나쁜 일을 적게 한 거 아니야.
아주 나쁜 일을 크게 하나 했으면 (기록이) 짧을 거 아냐. 그리고 작은 나쁜 일을 많이 했으면 여기에 길게 있을 거고.”
기록이란 이만큼 무섭고 중요하다. 그들은 죽어서도 죽지 못하지 끊임없이 호출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딸아이를 따라 전시실을 다시 한 바퀴 돌고 나자 아내가 전시를 다 보았다며 다가왔다.
“이야기로만 듣던 역사를 이렇게 유물로 보니까 역사를 다시 보게 됐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구나 싶어. 전시실이 넓지 않지만 보기에 딱 적당해.”
아내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흥분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이 인상적이었어. 일본 사람이 한 말인데 ‘일본인 개개인은 조선인과 마찬가지
로 희생자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가해국의 국민이다. 이것은 중대한 차이다. 그 차이가 일본
의 민중이 단순히 군국주의의 희생자가 아니게 한다.’”
딸과 같이 그 말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일본에서 발행된 전시물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이 전시물은 일본 사람들이 과거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노력과 성찰의 결과물이었다.
“난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이번에는 나를 따라 임종국 선생님이 작성한 수많은 카드 앞으로 갔다. 자료를 찾을 때마다 손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카드들이었다. 카드를 채운 한 자 한 자가 친일 청산이라는 멀고 먼 길위에 난 발자국 같았다. 마침내 이 발자국들이 모여 여기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
전시실을 나가기 전, 방명록 앞 의자에 앉은 딸아이는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하더니 또박또박 글을 써나갔다.
“역사는 바꿀 수 없다.”
“역사는 바꿀 수 없다고?”
“응, 아빠. 일어났던 일은 바꿀 수 없잖아. 역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거지.”
아이와 아내에게 많이 배우는 날이다. 100명이 박물관에 오면 100곳의 박물관이 탄생한다.
같은 박물관을 봐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게 다 다르다. 또 같은 곳이지만 볼 때마다 다르다.
오늘 우리 가족은 세 곳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지었다. 다음에 올 때는 어떤 박물관을, 어떻게 지을까?
박물관을 나와 딸아이가 가고 싶다는 남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아내가 이제 생각난 듯 한마디 덧붙였다.
“아, 일제 강점기를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아서 더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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