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자료실 김슬기
10월 2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한켠에서는 독도 지킴이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강치상을 기증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청심국제중고등학교 동아리 해밀의 학생들이었다. 11월 11일 일요일에 박물관에서 이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기숙사에 사는지라 집에 올라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일 텐데도 졸린 기색 하나 없이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에 찾아와 주었다. 이 자리에는 강치상을 제작한 김성래 작가도 함께하였다. “독도에 사는 강치를 기억함으로써 역사의 영속성을 알리고, 국력을 키우는 작은 불씨가 되고 싶어 강치상을 제작했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 : 동아리 이름이 해밀이라고 했는데요. 어떤 뜻으로 지어졌나요?
답 : (한재원) 해밀은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저희도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사회적인 이슈들을 저희만의 해석과 시선으로 해결해서 갠 하늘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자 동아리 이름을 이렇게 짓게 되었어요. 2016년에 여기 있는 소윤이, 선배님(태영), 그리고 저를 포함한 7명이 창단 멤버로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문 : 해밀은 주로 어떤 활동들을 해왔나요?
답 : (문소윤) 지구촌 불평등 국가 아이들을 위해 전래동화 번역을 하고요. 방학 때는 캄보디아로 해외봉사, 매년 겨울에는 요양원 김장봉사를 해요. 또 저희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가평 내의 지역아동센터에서 매주 목요일에 바이올린, 영어 등으로 재능기부도 하고, 놀이로 강치를 알리고, 강치벽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한재원) 가장 주요한 활동은 독도를 알리는 활동인데요. 독도에 가서 강치를 보고 배지 같은 것들을 만들기 위해 캐릭터화해서 디자인 출원도 했고, 이를 판매해서 모은 금액으로 강치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문 : 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독도’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답 : (한재원) 동아리 시작 초창기에는 독도의 날도 있고 해서 ‘독도를 한 번 가보자’ 해서 무작정 다녀왔어요. 그리고는 독도명예시민증을 발급받고, 독도 지킴이 활동을 해보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강치상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된 건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독도 알리기·체험하기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더 구체화된 것 같아요.
문 : 저는 아직 독도를 가보지 못해서요. 직접 가본 독도는 어땠어요?
답 : (한재원) 그 자체로 되게 아름다울 줄 알았거든요? 갈매기똥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선현면) 저는 섬에 원래 관심이 많아서 한번쯤은 꼭 독도에 가보고 싶었어요.
(정태영) 저는 배멀미를 좀 했어요.
(한재원) 멀미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것보다 울릉도에 갇혔던 적이 있었어요. 4일 동안요. 육지로 나올 때 배까지 탔는데 파도가 너무 심하다고 해서 내렸어요.
(정태영) 계획했던 날까지는 재밌었어요. 근데 울릉도에 은근 먹을 게 없더라고요. 그래도 도시를 떠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신채연) 저는 그때가 수학여행 전이어서 수학여행 준비도 해야 되고 시험도 준비해야 해서 나가서 할 일이 진짜 많았는데 갇혀서 아무것도 못했고 안에서 진짜 할 일이 없었어요. 일찍 나오는 줄 알고 아무것도 안 들고 왔거든요.
문 : 독도에 대해 느낀 바나 에피소드가 다양하네요. 강치의 존재는 독도에 가서 알게 된 건가요?
답 : (정태영) 독도에 갔을 때 학교 수행평가 기간이었거든요. 수행평가 때문만은 아니지만 독도 박물관 가서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강치 사진을 보게 됐어요. 그전까지는 강치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고 귀여울 줄 알았는데 무섭게 생겼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게 발전된 게 아닐까 생각해요.
(한재원) 2년 전 독도에 처음 같이 간 다음에 강치이야기를 했고, 그 후에 태영 선배님을 통해 강치 얘기가 나오고, 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강치를 통해 독도에 대한 바른 인식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강치상 제작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문 : 여러분이 배운 독도의 강치 역사를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답 : (한재원) 강치이야기를 담은 카드섹션도 저희가 만들었거든요. 카드섹션에 담긴 이야기를 보면 강치가 독도와 울릉도에서 많이 서식하고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동물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강치 가죽을 구하기 위해 강치를 모조리 잡아버려 강치가 멸종하고 말아 이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문 : 찾아보니까 일본인들이 독도에서 강치사냥을 한 사실을 증거랍시고 내밀면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정당화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강치상 제작 전에 작은 강치 상품들을 만들어 판매했다고 하던데요?
답 : (신채연) 네, 바로 후원금을 모아 강치상을 제작하기보다 우리끼리 펀드레이징을 해서 모은 돈으로 강치상을 제작하는 게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재원) 청심제(학교축제)에서 펀드레이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요. 그걸 토대로 시작하게 되었고요. 독도문방구(독도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사회적기업, 울릉도 내 위치)라고 있어요. 거기에서도 저희가 만든 배지와 네임텍과 북마크를 진열해놓고 판매하게 되었어요.
(문소윤) 또 학교에서 캠프를 하는데 외부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서 특히 그때 꽤나 많이 팔았어요. 원래 텀블러도 만들려고 했는데 실행하진 못했어요.
(작가) 학생들이 직접 돈을 모아서 강치상을 제작하려고 생각했는데, 소박한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다음 단계로 가는 게 참 학생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른들이 갖고 있는 역사인식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학생들이 갖고 있는 호기심에서 한발씩 가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작은 강치상을 만들어 펀드레이징을 하고 그렇게 모은 기금으로 다시 큰 강치상을 많이 제작하려고 해요.
(문소윤) 맞아요. 또 삼괴고등학교에서 자기 학교에도 강치상을 세우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저희도 단발성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싶어서 전국 학교 강치상 세우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해요.
문 : 작가님은 학생들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답 : (작가) 저는 4월말에 알게 되었는데요. 본인들끼리만 하면 인지도가 낮아서 보급이 잘 안될 거라는 생각에 그전부터 강치상 제작을 해줄 작가를 찾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4월에 ‘북으로 가는 평화의 소녀상’ 2개를 평양과 파주에 세우려고 작가들과 기금 마련 전시를 하고 있었어요. 민족화해센터 주관으로요. 그때 전시를 보고 학생들이 연락해주었어요. 오는 길도 외진데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단체로 저희 작업실에 방문해주었을 때 좁은 작업실이 꽉 찼어요.(웃음) 그때 자기들이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 어떻게 강치상 제작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죠.
문 : 그렇군요. 강치상을 보면 큰 강치와 작은 강치가 독도에 앉아있는 디자인이에요. 디자인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을 것 같아요.
답 : (작가) 학생들이 처음에 스케치랑 만들어진 강치 상품을 보여주었는데요. 봤을 때는 작고 귀엽고 소중한 이미지였어요. 또 학생들이 지금 강치 동화책을 만들려고 기획중인데 그 디자인도 참고했어요. 다른 강치 디자인도 찾아보고요. 또 이 친구들이 플래시몹으로 찍은 강치이야기 영상을 보니까 강치가 울면서 떠나는 내용이었거든요. 근데 일본의 다케시마 박물관에 가보면 강치 동화랑 강치상이 있어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잘 되어 있고요. 강치 동화를 쓴 일본 작가도 어린이 동화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에요. 강치 동화도 굉장히 슬프게 써놓았어요. ‘우리 강치인데 지금은 없다. 언젠간 그곳(독도)에 갈 거다’ 이런 내용이에요. 그런 걸 보니까 문화적인 접근에서 정서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또 이게 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역사도 바뀌거든요. 독도분쟁이 나면 당연히 우리 땅이니까 ‘당연하니까 내버려둬’, ‘싸울 필요 없어’라는 기준에서만 보고 관심을 안 가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도 학생들을 통해 강치를 알았지 이런 스토리들이 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도 사실 주체적 기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주체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정서적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엄마강치와 아기강치, 독도를 함께 배치했어요.
(한재원) 처음 스케치는 엄마강치랑 아기강치랑 ‘갈매기’를 어디에 둘까 생각했어요. 또 어디를 바라보고 있고, 어떤 자세를 하고 이런 것들을 저희끼리 회의해서 정했어요.
(작가) 아까 갈매기똥을 독도에서 많이 봤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 상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 없는 바위섬에 갈매기만 산다는 것. 이게 너무 중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갈매기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다의적으로 가지 말고 압축적으로 하나에만 집중하자 해서 강치만 넣게 되었어요.
(한재원) 강치상에 보면 ‘우리 땅 독도에 살던 강치를 기억하며 동해바다 독도 수호의 작은 불씨가 되고자 강치상을 세우다’ 문장을 새기고 영어랑 일본어로 번역했는데요. 영어는 대표적인 언어이고, 일본어는 가장 관련 있고, 일본인들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넣었어요. 지금은 스페인어로 번역중인데 어려운 단어는 선생님께 여쭤보면서 저희가 하고 있어요.
(문소윤) 그리고 일단 강치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독도강치’라고 쓰고 옆에 ‘Dokdo Sea Lion’이라고 적었어요.
문 : 이러한 강치상이 3개가 만들어졌다고 하던데 맞나요?
답 : (문소윤) 네. 하나는 학교에, 하나는 동북아역사재단에, 하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있어요. 동북아역사재단은 저희가 거기서 진행하는 독도 체험 발표대회에 참여했는데요. 그래서 독도 체험관에 두었어요.
문 :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알고 이곳에 기증하게 되었나요? 박물관에 기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답 : (문소윤) 원래는 저희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전화해서 기증할 수 있냐고 문의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저희 활동을 더 홍보할 수 있는 곳으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추천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기증하게 되었어요.
문 : 그렇군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러분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요. 여러분은 원래부터 역사나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나요? 사실 방탄소년단을 더 좋아할 나이잖아요.(웃음) 여러분 각자가 꿈꾸는 삶이 있을 것 같아요. 그 비전을 이루어 가는데 지금의 활동들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지속할 수 있는 것 같고요.
답 : (선현면) 저는 업사이클링, 버려진 재료를 활용해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환경을 지키고 싶어서 동아리에 지원했었어요. 근데 해밀 활동을 하면서 어린이들한테는 어떻게 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남을 배려하는 방법, 다문화 아이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사이버경찰수사대가 꿈인데요. 어린이를 대상으로 조사도 해야 하고, 이런 말투는 어느 나이대일 것 같다 이런 걸 좀 알 수 있겠다 싶어서 제 꿈에 더 다가갈 수 있게된 것 같아요.
(신채연) 저는 동아리 들어갈 때는 범죄심리학자가 꿈이었어요. 국제적으로 정신과 일을 하다가 범죄까지 다루는 의사가 되는 거에요. 이런 꿈을 이루는데 국제적으로 봉사하는 게 많은 경험을 쌓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봉사를 많이 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힘들잖아요. 근데 해밀은 봉사동아리라고 해서 관심을 가졌고요. 면접을 보기 전에 해밀이 뭘 했는지 선배들이 홍보하러 오셨는데 캄보디아 다녀오시고 번역 봉사도 하시고 글로벌적으로 멋있는 봉사를 많이 하셔서 ‘하면 되게 재밌겠다’ 생각했어요. 솔직히 모두가 해볼 수 있는 경험은 아니잖아요. 근데 동아리 들어가서 하면 뿌듯한 활동이 될 것 같아서 들어갔어요.
(한재원) 이미 존재하는 동아리에 들어가는 건 어떻게 보면 선배님들에게 따르는 건데 우리는 직접 활동을 주도하고 싶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봉사하고 탐방하는 동아리가 없었어요. 저는 중학교 처음 들어왔을 때 꿈이 신재생에너지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었어요. 근데 이 활동을 하면서 더 발전된 게 단순히 신재생에너지 연구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에 기여하고 힘쓰고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동아리 설립의 목적인데요.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는 게 제 목표이자 꿈이에요.
(문소윤) 저는 처음에 중학교 입학할 때 교육 평등, 모두가 다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게 목표였는데 이제는 교육의 형평성에 관심이 가요. 그냥 ‘교육을 모두 받는다’를 넘어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교육받는 자가 변화될 수 있게 하는 것이에요. 제 꿈이 유네스코 교육위원인데요.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학생들을 도와주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또 저희가 중학교 때만 해도 문과 이과로 나뉘는 게 심했단 말이죠. 문과 사람들은 문과 동아리만 참여하곤 했었는데 문·이과 통합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어서 만들게 된 것도 있어요. 또 무엇보다 학생이 주도하는 것이잖아요. 우리의 주장을 확고하게 말할 수 있고 잘 펼치고 실행에 옮기고 남의 눈치나 시선을 보지 않고 그런 걸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태영) 저는 이 친구들이 지향하는 것이 멋있었고, 이렇게 봉사를 같이 하는 게 한편으론 재밌고 한편으론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같이 참여하게 되었고요. 저희가 주변에 사는 아동인권을 조사했었어요. 간략하게 설명드리면 설문지를 제작해서 각 지역에 600~700장 정도를 배포하여 회수한 후 조사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리고 사후전수조사를 한 후에 아동이 살해된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동 인권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