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비망록 41
이순우 책임연구원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6월 15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이날 아침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때마침 쏟아지던 소나기도 그치고 요란하던 전차와 자동차 소리도 잠시 적막으로 변하던 순간 김구(金九) 민주의원 총리와 함께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윤봉길(尹奉吉, 1908~1932), 백정기(白貞基, 1896~1934)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였다. 최석봉(崔錫鳳, 한독당 경남지부장), 윤남의(尹南儀, 윤봉길 의사 동생), 이강훈(李康勳, 상하이 육삼정 의거 동지) 등 세 사람의 가슴에각각 안겨 운구된 이들 유해는 역전 광장에 모여든 추모 인파를 헤치고 두 대의 봉영차에 나뉘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로 옮겨져 그곳에 안치되었다.
이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그해 7월 6일에는 삼의사의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원래 계획은 6월 30일에 장의를 실시하려 했으나 여러 날 폭우가 내려 교통이 두절되면서 삼의사의 유가족과 각 지방 대표자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묘역 조성을 위한 산역(山役)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일정이 연기되었다고 알려진다.
이날 아침 10시에 태고사를 출발한 장의행렬은 안국동 네거리, 종각, 남대문, 서울역, 연병정(남영동), 용산경찰서 앞을 거쳐 금정(錦町, 효창동)에 이르렀고, 효창원에 도착한 것이 낮 12시40분이었다. 특히 이봉창 의사의 출생지가 ‘원효로 2가’인데다 1918년에서 1924년 사이에 살았던 집터인 ‘효창동 118번지’가 행로 도중에 인접한 까닭에 남다른 감회를 자아냈다. 이어서 오후 1시에 식이 거행되어 애국가 제창, 개회사, 주악 연주, 식사 낭독, 분향, 제문 낭독이 있은 뒤에 오후 3시에 하관(下棺)과 입토(入土) 절차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삼의사 묘역이 조성되었으며, 장차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유해를 봉환하는 것에 대비하여 빈 봉분이 따로 마련되었다. 삼의사 묘역의 묘단에 남아있는 ‘유방백세(遺芳百世)’라고 쓴 돌판 글씨는 김구 선생의 것으로 1948년 봄에 부착되었다. 이 당시 효창원이 장지로 선정된 연유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김구 선생이 남긴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잘 서술되어 있다.
…… 나는 즉시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렬(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쳐 무도한 왜적에게 각각 학살을 당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영접차 특별열차를 타고 부산을 향하였다. 3열사의 말없는 개선에 유골봉환식을 거행하고, 영구를 서울로 봉환하기 위해 부산역을 출발하였다. 부산역 앞에서 서울까지 각 역전마다, 사회단체와 교육기관은 물론이고 일반 인사들까지 운집·도열하여 추도식을 거행하니, 산천초목도 슬퍼하는 듯 감개무량하였다.
서울 도착 즉시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고, 유지 동포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경의를 표할 수 있게 하였다.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 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漢城)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
출처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412~414쪽.
원래 효창원(孝昌園)은 익히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가 묻힌 곳으로, 이곳 묘역 안에는 정조의 후궁인 의빈성씨(宜嬪成氏, 1753~1786)의 무덤, 그리고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1854)와 그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1817~1829)의 무덤도 함께 자리했다. 하지만 이곳의 묘역군은 일제의 패망을 불과 열 달 가량을 앞둔 시점에 이르러 1944년 10월 9일에 서삼릉으로 일괄 천장(遷葬)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쨌거나 해방 직후의 상황이란 것이 우선은 일제 치하에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지사들의 유해를 서둘러 봉환하는 일은 당연한 도리이자 당면과제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할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립묘지라는 제도는커녕 관념조차 거의 없던 시절이다 보니 임시방편으로나마 이러한 유휴공간을 묘역으로 재활용하게 된 것은 그러한 시대상이 반영된 불가피한 결과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나 이번에는 옛 의빈묘 터에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선생과 차리석(車利錫, 1881~1945) 선생에 이어 조성환(曺成煥, 1875~1948) 선생이 안장되면서 임정요인묘역(臨政要人墓域)이 조성되는 상황이 뒤따랐다. 이동녕 및 차리석 선생의 유해봉환과정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48년 8월 11일자에 수록된 「이동녕 선생 등 6영주(靈柱), 8일 무언환국(無言還國)」 제하의 기사에 간략하나마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철제(鐵蹄) 밑에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끝끝내 그 빛나는 날을 보지 못하고 만리이역에 백골을 묻게 되었던 이동녕(李東寧), 차리석(車利錫), 민병길(閔炳吉) 3씨와 김구(金九) 씨 자당, 부인, 장남의 여섯 유해는 김신(金信) 씨의 정성과 노력으로 수십 년 만에 지난 8일 하오 3시 그리워하던 고국의 비 내리는 인천 부두에 말없이 돌아왔다. 인천으로부터 자동차로 서울에 돌아온 유해는 즉시 경교장(京橋莊)에서 합동위령제의 구슬픈 추도식전을 마치고 이동녕 씨 유골만은 사자 이의식(李義植) 씨 댁에 안치하고 장지의 결정을 기다려 단체장 또는 개인장 등을 결정하기로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김구 선생의 자당, 부인, 장남은 차례대로 곽낙원(郭樂園, 1858~1939), 최준례(崔遵禮, 1889~1924), 김인(金仁, 1918~1945)을 가리킨다. 『동아일보』 1948년 8월 18일자에 실린 ‘부고광고’에 따르면, 이때 이들 김구 선생의 가족 유해는 8월 20일 경교장 정원에서 장의식을 거친 후 ‘정릉리 가족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는 별도로 이동녕 선생과 차리석 선생은 그해 9월 22일 휘문중학교에서 거행된 사회장(社會葬)을 거쳐 효창원 묘역에 모셔졌다. 이때 불과 보름 후에 임시정부 군무차장과 군무부장을 지낸 조성환 선생이 자신의 거처 낙산장(駱山莊, 동숭동 129번지)에서 숨지자 10월 13일 훈련원(訓鍊院)에서 사회장을 거행한 뒤 임정요인묘역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해를 넘겨 1949년 6월 26일에 안두희(安斗熙)의 총탄에 피격되어 김구 선생이 숨지면서 7월 5일에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고, 그의 무덤이 효창공원 안에 새로 조성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해방 이후 불과 4년 남짓에 효창공원 일대는 자연스레 순국애국열사의 묘역군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효창공원 구역은 마땅히 순탄하고 온존하게 관리되어야 할 공간이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러하질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오래지 않아 일제강점기의 그것에 못지않게 꽤나 가혹한 수난사로 점철될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 1954년 5월 24일자에는 「대서울건설에 진공지대(眞空地帶), 황폐(荒廢)하는 각 공원」 제하의 르포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9.28수복 직후 희생자들이 임시 매장되거나 암장(暗葬)된 무덤들이 늘어나는 통에 200여 기의 봉분이 효창공원 내에 어지러이 잔존하고 있으며, 판잣집들도 이곳저곳 무단 점거하고 있는 등 무질서가 극치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지역의 공간 훼손을 무엇보다도 가속화하는 시발점이 된 것은 ‘효창운동장’의 건설계획이었다. 서울특별시 도시위원회에서 신종합경기장(新綜合競技場) 후보지를 효창공원으로 낙착을 보아 현장조사와 더불어 도면제작에 착수한 것이 1954년 8월의 일이었다. 이 계획에는 당시 서울운동장(29,000평)의 약 2배가 되는 5만 평의 대지 위에 트랙을 갖춘 축구장,정구장, 풀, 배구장 등을 갖춘 종합운동경기장을 조성하며 여기에는 실내체육관에 실내스케이트장까지 배치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56년 5월 무렵에는 육군 209공병대대에 의한 운동장 건설공사가 착수되었고, 이와 함께 임정요인묘역의 이장 방침을 유족들에게 통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삼의사묘와 김구묘의 경우에도 운동장 스탠드가 턱밑에 놓이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사회 각계각층의 반대의사 표출이 줄을 이었고, 이와 더불어 묘역 보존과 이전에 관한 논란이 거듭되는 와중에도 운동장 건설은 간헐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을 뿐 계획 자체가 철회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60년 가을로 예정된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의 개최를 빌미로 효창공원의 운동장 건설부지에는 국제규격의 축구경기장이 들어서는 것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이에 따라 우선 1959년 10월에는 국제축구장건설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7,882평의 대지에 약 3만 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축구장을 세우기 위해 운동장 정지작업(整地作業)이 착수되었고, 곧이어잔디를 이식하고 스탠드를 조성하는 공사가 잇달아 전개된 결과 1960년 10월 12일에 효창운동장의 개장식이 거행되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볼 사항은 효창공원에 조성된 애국선열묘역에 대한 이장 요구가 왜 이 시기에 그토록 집요하게 이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경향신문』 1960년 6월11일자에 수록된 특집연재물 「혁명전후(1) 효창공원; 선열 묘소 밀어버린 독재정권, 이장(移葬)은 이승만 특명」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 그 무렵 이런 말도 떠돌았다. 서울에서의 정부통령 선거의 참패가 역연하게 보이게 되자 어느 고위관리가 이승만 박사에게 “각하 이거 큰일입니다. 효창공원의 백범 묘지에 해마다 참배자가 늘어가고 있어 민심을 모으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조치가 있어야 될 줄 아뢰오” 했다는 것. 그러자 이 박사도 비서에게 선열묘지 이장을 뜻하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 1962년 11월13일자에는 「김구 선생 등 순국 7열사묘 천장(遷葬), 고양군 서삼릉(西三陵) 곁으로, 북적대는 효창공원을 떠나 명추(明秋)엔 완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김구선생 및 육위천장위원회’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1리 송현부락 뒷산 서삼릉 숲속(99,000평)으로 효창공원의 애국선열묘역 전체를 일괄 이장하기 위해 진입도로공사가 이미 착공되었다는 소식과 아울러 묘역배치약도와 천장지 전경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면 이들 묘역의 이장 문제가 불거진것이 비단 이승만 정권 때만의 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벌어진 효창공원 일대의 공간훼손사례도 그 비중이 결코 낮지 않다. 이 가운데 선두에 선 것은 1969년 여름과 가을에 잇따라 등장한 원효대사 동상(송영수 조각, 김기승 글씨, 조중훈 헌납, 1969.8.16일 제막)과 ‘북한반공투사위령탑(박동진 설계, 김기승 글씨, 이성산업 건축, 1969.10.19일 제막)’이다.
한때 서울시청 앞에 자리했다가 남산공원으로 옮겨진 김유신 동상(김성곤 헌납)과 사직공원에 서 있는 율곡 이이 동상(이양구 헌납) 및 신사임당 동상(이학수 헌납)도 이 시리즈에 들어있는 작품들이다.
현재 효창공원 구내에 남아 있는 이질적인 기념물과 시설물 현황이다. 왼쪽 위에서 차례대로 효창운동장, 원효대사 동상,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이고, 오른쪽은 대한노인회 중앙회관, 고 육영수여사 경로송덕비,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관의 순서이다.
모르긴 해도 근처에 ‘원효로’가 있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효창공원에 원효대사 동상을 배치한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원효로’라는 것도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의 왜색 지명인 원정(元町, 모토마치)을 대체하기 위해 그저 역대 위인의 이름을 무작위로 붙인 것이라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지명유래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사실고증이 뒷받침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원효대사 동상이 효창공원에 꼭 있어야 할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른바 ‘동상전성시대’의 흔적이라는 것 이외에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는 요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질적인 기념물 이외에 다시 이 구역을 잠식한 것은 1972년에 효창공원의 서쪽 언덕에 들어선 ‘새마을노인회관(1972.7.28. 준공)’과 그 아래쪽 평지에 터를 잡은 ‘효창도서관(1972.9.19. 개관)’이다. 이 가운데 새마을노인회관은 처음에 단층건물이었으나 한보주택 정태수 회장이 지상 3층으로 증축하여 기부함에 따라 ‘대한노인회 중앙회관’으로 전환되면서 1978년 11월 11일에 준공식이 거행된 바 있다. 이곳에는 1975년 10월 20일에 세운 ‘고육영수여사경로송덕비(故陸英修女史敬老頌德碑)’와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각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새마을노인회관 개관기념식수’라고 쓴 표석 하나가 건물의 측면에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과 이웃하는 자리에 건립된 ‘효창도서관’은 학교법인 신광학원에서 건립하여 9년 가까이 운영되다가 1981년 9월에 서울시에 기부채납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후 1984년 4월에 이 건물은 대한노인회 종합복지관(노인복지회관)으로 재개관되었고, 다시 1989년 3월 이후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가 위탁 운영하는 형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89년 6월 8일에는 마침내 문화공보부 고시 제766호에 따라 ‘효창공원’이 문화재보호법에 명시된 사적(史蹟) 제330호로 지정된다. 당시 관보에 고시된 내용에는 사적지정면적이 135,589평방미터(41,015.7평)로 표시되어 있는데, 일제패망기인 1940년 3월 12일에 총독부 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결정’에 나타난 효창공원의 전체면적이 317,000평방미터(96,060평)였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효창운동장을 비롯하여 그 주변에 포진한 기념물과 시설물 등이 잠식한 규모가 얼마나 큰지 대략 실감할 수 있다.
왕조시대의 문화유적이던 효창원 일대가 해방 직전 일제가 손을 대는 바람에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 뜻하지 않게 애국선열의 묘역군으로 변신한 지도 벌써 70년에 가까운 세월을 넘기고 있다. 지금이라면 의당 국립묘지에 모셔졌을 테지만 그러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조성되기 시작한 이들 묘역군은 그 자체가 이미 사연 깊은 하나의 역사 공간으로 굳건히 자리매김된 것은 엄연한 현실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인 측면에서 수난의 굴레에서 말끔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서둘러 풀어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효창공원 묘역에 모셔진 피장자(被葬者)의 숫자에 관한 부분이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현재 삼의사묘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3인, 임정요인묘에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등 3인, 그리고 백범묘에 묻힌 김구 선생 1인을 합쳐 모두 7인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1999년 4월 12일에 최준례 여사의 유해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정리에 있는 가족묘지(1982년에 정릉리에서 이장)에서 옮겨와 김구 선생의 묘에 합장되었고, 이 사실은 묘비석의 측면에도 분명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피장자의 숫자는 1인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이때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과 아들 김인의 무덤도 이보다 며칠 앞서 1999년 4월 9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옮겨 봉안되었다.
그리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1961년 4월 18일에는 차리석 선생의 부인 강리성(康利聖) 여사가 숨지면서 임정요인묘역에 합장된 것이 당시의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효창공원 순국선열묘역은 모두 9인의 독립지사들과 그 가족이 묻혀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정확하게 명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