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기억과 망각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기록과 꾸준한 관심이다 – 콜라보라시옹 전시회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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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광주지부 회원

  5·18민중항쟁의 도시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2018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국립기록보존소) 초청전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이 열리고 있다. ‘콜라보라시옹’ 관람을 위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들어서며, 문득 재작년에 아들(정재찬)과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당시는 서울시민청 시민갤러리에서 ‘콜라보라시옹’ 첫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때다.

  둘째 아들 재찬이에게 콜라보(콜라보레이션)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재찬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대답한다. 아빠… 그거 무슨 말인지 생각났어, 콜라보는 가수들이 팀을 만들어 서로 도와주는거야. 맞지?… TV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주 듣던 말이 생각났나 보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콜라보레이션 흔히 콜라보라고 하는 것은 국악과 양악의 만남, 미술가와 무용가의 만남 등 제각기 다른 장르가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뤄 새로움을 추구하고 결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전시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콜라보라시옹, 즉 나치부역자들을 고발하는 전시회다. 전시 제목의 ‘콜라보라시옹’은 오늘날 협업 또는 공동작업이라는 좋은 의미로 널리 쓰이지만, 나치 독일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대독협력’을 뜻하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 들어선 비시정부의 페탱 원수가 독·불 사이의 국가간 협력이란 뜻으로 사용한 이래, 독일점령기의 나치 부역행위를 일컫는 역사적 용어가 되었다.
  이 전시는 ‘콜라보라시옹의 주역들’ – 비시 파리 베를린, ‘공공의 적’, ‘경찰 조직의 콜라보라시옹’,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나치 부역’, ‘경제계의 나치 부역과 강제 동원’, ‘가자, 전선으로! 독일군과 함께!’, ‘2018 파리-광주로 끝나지 않은 과거청산’ 등 8개 섹션으로 나누어 독일점령기에 나치부역자들이 ‘협력’이란 ‘미명’아래 저지른 반역행위와 반인도적 범죄 그리고 나치의 지배
정책을 다루고 있다. 국가 차원의 협력을 선택한 비시 정부 지도자들, 나치 찬양의 나팔수가 된 언론인과 문화예술인들, 나치즘의 파수꾼을 자처한 파리의 ‘콜라보들(협력자들)’의 다른 이름은 부역자다. 독일점령기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대부분은 극우세력으로 비시정부 기간인 불과 5년 동안 정계와 군부는 물론이고 경제계와 언론, 그리고 교육과 체육,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전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활동하면서 극우사상 전파와 나치의 전쟁 수행을 돕고 유태인 학살에 협력하는 등 나치가 일으킨 전쟁과 반인도적 범죄의 공범이 되었다.
  프랑스의 과거청산은 공소시효나 무조건적 화해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혼란기에 9천여 명이 약식으로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혼란을 수습하고 들어선 드골 정부는 가장 먼저 부역자 청산작업에 착수한다. 사회 전 분야의 나치 부역 혐의자 35만 여명을 조사하고 12만명 이상을 기소했으며 그 중 1,500여 명을 처형하고 38,000여 명 이상을 투옥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권유린과 광기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나치부역자들에 대한 강력하고도 철저한 청산작업을 시행했다. 지난 1964년 프랑스는 전쟁 중 민간인에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없는 범죄로 규정하여 1994년 유대인 처형에 관여한 폴 투비에는 종신형을, 1998년에 모피스 파퐁은 10년 금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현재도 나치 부역혐의가 발견되면 나이에 상관없
이 법정에 세워 처단하고 있을 정도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불과 5년 간의 독일점령기간 동안에도 프랑스는 부역자 수십만명을 처단하고 지금까지도 과거사 청산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근현대사를 얘기할 때 해방 직후,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한다. 미군정은 해방된 조국의 주역이 되었어야 할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배척한 반면 청산해야 할 친일파들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그나마 민족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반민특위도 이승만에 의해 해체되어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그때 이루어지지 않은 친일청산은 우리 근현대사의 모순과 질곡을 만들었고, 해방 후 7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5·18민중항쟁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도 미약하기만 하다. 당시 민간 피해자는 모두 5,000명을 넘는다(5·18 당시 사망자 155명, 부상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 인정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 부상자 1,145명, 연행 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는데도 처형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고, 선고 형량대로 옥살이를 한 사람도 없다. 5·18 당시 학살의 총책임자인 전두환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751일 만에 풀려나 멀쩡히 살아 있다. 전두환의 석방과 사면이 결정되었을 때 광주시민들은 피눈물이 났지만 ‘동서화합’, ‘화해’라는 ‘미명’으로 용인해 주었다. 화합과 화해는 정략적인 요식행위가 아니라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과 참회를 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전두환은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어설픈 화합과 화해보다는 단죄가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끝나지 않은 과거 청산’과 광주의 ‘다시 시작하는 5·18 청산’을 대조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오욕의 과거사에서 교훈을 찾는 프랑스의 지속적인 노력을 보면서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는 시효와 영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5·18민중항쟁 당시 누가 집단발포 등에 책임을 갖고 결정을 내렸는지 명백히 밝혀야 되고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한
다. 프랑스가 나치부역자들의 반역 행위와 반인도적 범죄, 나치의 지배정책 등을 고발·단죄한 것을 본보기 삼아 이제라도 광주의 진실을 철저히 밝혀야 한다.
  앞으로 5·18진상규명을 위해 특조위가 출범할 것이다. 또한 2019년은 3·1혁명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이번 ‘콜라보라시옹’ 광주전시회가 전국 순회전시회로 꾸준히 이어지길 바라며, 부끄러운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 미래가 있다는 것을 많은 시민들이 보고 느꼈으면 한다. 더불어 올해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기억과 망각의 싸움에서 승리할 버팀목이 되길 바란다.
  역사정의를 바로 세워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갈 민족문제연구소 일만 삼천 여 역사독립군 여러분, 두 손 맞잡고 서로 격려하며 응원합시다! 친일청산을 넘어 역사적폐 청산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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