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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공→노무자’ 말 바꾼 아베 총리… 남북이 ‘기억투쟁’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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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남북공동기억센터(가칭) 설립 추진하는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60년대 한일수교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와 전쟁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정부는 군인·군속 강제동원의 피해 규모를 축소해서 한국에 제시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원폭 피해자 문제 등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일본의 거부로 교섭대상에서 제외됐다. 한반도 내 동원자도 한국의 협상력 미숙으로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부분의 가해 자료는 일본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의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문제에 관해선 한국은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었다. 당시 잘못된 협상으로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를 어렵게 하는 결과를 낳으면서 피해자와 희생자 및 유족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등 현재까지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다가오는 북일수교에서 북한만은 우리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나선 이가 있다. 우리가 북한을 도와 북한지역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제대로 조사하고 밝혀내 향후 대일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북한이 일본을 상대로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아래 민문연) 연구위원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지난 3일 “다가올 북일수교를 전망할 때 수교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 문제가 다시 제기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라며 “사과와 배상의 전제가 되는 피해 실태가 먼저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철 교수에 따르면, 일제하 남북 인구 분포나 강제동원 피해 관련자료들에서 확인되듯 북 출신 피해자들은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 약 120만 명 가운데 25% 내외인 30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일제시기의 정책 자료들은 모두 일본과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북에는 자료가 많지 않다”면서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발생한 인적·물적 피해 실태를 남북 공동으로 조사·연구하는 남북공동기억센터(가칭) 설립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북일 국교정상화 과정서 반드시 식민지배 청산 문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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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신상미

때마침 북한도 일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나온 신일철주금 대법원 배상 판결을 전후해 <노동신문>이 연일 강제동원을 비판하는 논설을 쏟아냈다. 지난 11월 초 남북이 금강산에서 만나 ‘강제동원 남북공동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11월 중순 경기도가 주최한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은 “북일 간 평화적 협력을 위해선 역사적 범죄 행위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사과, 적절한 보상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당시 리종혁 대표단장을 원로 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직접 만나기도 했다. 북한이 보상의 근거가 되는 피해자료 수집과 남북 공동연구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문연이 청량리동을 떠나 지난 8월 새롭게 둥지를 튼 용산은 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된 효창원, 일본군 20사단(해방 뒤 미군기지), 총독 관저, 남영동 대공분실 등 근현대사 주요 관람지가 많은 곳이다. 민문연이 용산에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김 교수를 직접 만났다.

– 남북공동기억센터 설립을 추진하려는 취지, 필요성은?
“2000년에 ‘위안부’ 민간 법정을 할 때 남북공동성명서를 채택했다. 당시 북한 대표가 김일성 장군 얘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자 남측은 그걸 빼자고 했다. 남북간 역사 인식 차이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같이 연대를 한다는 것은 수준을 서로 맞추는 거다. 인식 차이가 있는 걸 없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고, 같이 맞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피해 문제는 서로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다.

막대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책임 추궁을 못했던 남북 공통의 역사가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죽었지만, 단 한 번도 추궁을 못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잘못된 거다. 강제동원 인명 피해, 수탈 실태 등을 이번 기회에 교류확대하면서 (공동연구·대응)하는 게 좋겠다.

2002년 나온 북일의 <평양선언문> 제2항을 보면 1965년 한일협정 수준으로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광장히 문제가 많은 협정인데 그 수준으로 하면 안 된다고 현재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북도 공개적으로 일본에 강도 높은 비판을 하고 있고, 그에 따른 요구가 있을 거다. 북쪽은 강제동원 자료가 별로 없고, 우리가 많기 때문이다.”

– 관련해 얼마나 진행됐나?
“민간 차원에서 되는 건 아니고 정부 차원의 지원과 관료만으로도 안 되고, 민간도 참여하는 그런 시스템이 필요할 거 같다. 자료는 있고, 연구자와 공간이 필요하고, 남·북 정부 예산, 각각의 자료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거다. 같이 하면 완결되고 통합된 전체 피해 실태를 밝혀낼 수 있다.

징병·징용 실태는 남북 통합 데이터가 없다. 인명 피해는 남쪽이 많고, 물자 수탈은 북쪽이 더 많다. 기본적 자료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다. 피해자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더 빨리 됐어야 했는데, 북쪽 상태가 어떤지는 미지수다. 서로 확인해 봐야 한다. 북쪽 증언집을 보니 조사가 간단히 됐더라.”

지난 11월 초에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주최로 금강산에서 열린 ‘강제동원 남북공동토론회’에 김 교수가 참석했다. 토론회에서 남북은 공동연구 필요성과 의지에 공감했다. 앞으로 남북 간 실무협상이 진행될 예정이다. 민화협 내 정책국에서 현재 추진 중으로, 민화협 ‘강제동원문제 특별위원회’도 출범한다. 김 교수는 해당 특위에 자문위원으로 위촉받았다.

“배상책임 인정한 한국법원, 타국 피해자들 나설 토대 만들어”

– 아베 일본 총리가 국내 강제동원 대법원 배상 판결 이후 “징용이 아니라 모집에 응한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어떻게 이해하고 반박해야 하나.
“우리가 보통 징용이라고 쓰는 말은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역사적·법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려면 강제동원이라고 써야 한다. 일제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었고 1939년부터 (할당) 모집이 시작됐다. 1942년부터 관알선이 시작됐고 1944년에 징용령에 따라서 끌려갔다. 한데 피해자들과 현 언론은 다 ‘징용’갔다고 생각하는 거다.

탄광에 돈 많이 준다고 하면서 가자고 모집하면 자유의사 아니냐고 하지만 모집과정부터 강제였다. 당시 일본인 노무계원 등의 증언이나 지방 유생의 일기를 보면 농사 짓는 사람들 몸의 리듬이 전혀 다르고, 낯설어서 안 가려고 하니까 강제로 할당량을 줘서 데려갔다.

근로정신대는 12~14살 나이에 명백한 취업 사기로 다녀온 분들이다. 응하지 않으면 배급을 끊겠다고 협박한 예도 있다. 추첨·집단 동원시킨 경우도 발견된다. 일제는 2년만 고생하면 집 한 채 산다고 거짓 선전을 했다. 하지만 홋카이도 탄광 같은 데 가면 죽는다는 공포감이 널리 퍼져 있어서 협박·거짓말로 데려갔다.

아베 총리가 얼마 전부터 용어를 바꾸기 시작했다(이전에는 ‘징용공’으로 칭하다가 배상 판결 후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일원화함: 기자주).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중 강제노동을 규정한 제29호를 보면, 노동은 자유노동, 강제노동, 노예노동으로 나뉜다. 일제 강제동원은 범주상 강제노동과 노예노동 사이다. 제29호에 ‘예외’ 조항이 있다. 죄수노동, 공동체 노동(품앗이·부역), 전시기에 법으로 동원한 경우다.

일본은 세 번째 예외를 빌미로 1910년에 합법적으로 식민지로 삼았고, 1938년 총동원법에 의해서 스스로 돈벌러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1910년의 병합조약은 합법이 아니라 불법 조약이다. 불법적 지배에 대한 피해를 배상하라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 강제동원 배상 소송과 일본 내 양심적 시민 세력과의 연대에 대해 말해달라.
“지난 11월 초에 ‘강제동원 문제 해결 및 대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이라는 조직이 결성돼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 11월 11일 일본에서 결성식이 열렸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전후보상운동을 했던 단체들과 연대 조직을 꾸린 거다. 한국에 먼저 같은 이름의 조직을 꾸렸다.

동아시아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북미-북일 대화 교섭이 앞으로 진행될 거다. 북일이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반드시 식민지배 청산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시민사회단체에서 준비하자, 통일운동·노동·역사 단체, 재일동포 그룹, 양심적 시민운동가들과 남북이 연대하고, 국제 연대를 하자면서 만들었다.”

다음날인 지난 12일, 김 교수는 공동행동·변호인단과 함께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를 방문했다. 공동행동은 지난 4일에도 재차 본사를 방문한 바 있다. 10월 30일 나온 대법원 판결과 맞물려 일련의 방문이 큰 화제가 됐으나 김 교수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신일철주금을 방문했다. 김 교수는 “2001년에 신일철 사장 집에 간 적도 있었다, 그때 사장과 만났었다”며 “교섭에 응하지 않으니 자택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5선 국회의원)이 동행하거나 신일철주금의 주식을 구입, 주주총회에 참석해 문제제기한 적도 있다. 연구뿐 아니라 연구 성과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학자는 흔치 않은데, 김 교수와 그가 속한 민문연은 ‘연구’와 ‘실천’을 조화시키며 한국 사회를 변화시켜 온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 근로정신대 대법원 판결 등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이젠 나왔기 때문에 이전과 상황이 다르다. 일본 기업에게 직접적 배상책임을 물은 판결은 이번이 최초다. 한국 법원이 놀라운 일을 한 거다. 필리핀·인도네시아·중국·대만 피해 유족들이 나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태면철도(태국~미얀마)는 정글을 뚫고 일본군이 건설했는데, 많은 현지인이 동원돼 죽었다. 그 희생자 유족들이 모여서 매년 추모제를 지낸다.

미·일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 당시 전후 배상이 다 경제협력자금이었다. 아베는 이번 판결이 그렇게 번질까 봐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동안 냉전정책 때문에 보상 요구들이 다 억눌려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전후 부흥으로 잘 살고 있는 일본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큰 틀의 정리를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독립운동한 줄 알았더니 친일… ‘기억 투쟁’ 최전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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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일제강점기 역사 전문가로, 경희대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농촌지역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문을 연 민문연의 창립 멤버다. ⓒ 신상미

-1991년 민문연이 출범할 때 신혼집 전세금을 빼서 민문연 사무실을 구할 때 보탰다. 지난 정권에서 국정원이 민문연을 사찰한 일도 밝혀졌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도 친일파 자손들의 회유와 압박이 대단했다고 들었다.
“그땐 목숨 걸고 운동한 사람도 많았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전세금을 연구소에 넣고 2년 동안 (연구소에 딸린 방에서 아내와) 살았다. (연구소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모두 회원들 덕분이다. 오랫동안 같이 했던 조세열 상임이사, 초기부터 합류했던 열성 회원들이 매달 회비를 내고 후원을 해주고 계신다. 전 세계에서 이런 조직, 연구소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거다.

사회운동과 실천, 연구를 같이 하는 싱크탱크는 기업이 돈을 내는 싱크탱크와 차원이 다르다. 교사·군인·경희대 동문들을 비롯해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고 임종국 선생 고향인 충남 천안 분들이 지금까지 후원하고 있다. 한국어 배우는 일본인 후원자도 있다. 당시 한국에선 친일파 얘기를 하기 어려울 때였다. 친일 경력이 있는 자들이 다 스승이고 선배였기 때문이다.”

민문연의 역할은 역사 연구 전문영역이 주를 이루지만, ‘친일 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가장 크다. 해방 후 친일의 역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친일파가 누린 지위와 권력, 재산 등이 그대로 세습되면서 우리 사회는 친일 단죄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게 돼버렸다. 관련 연구도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민문연은 이 분야의 연구를 선구적으로 시작해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세상에 내놨다. 관련 제보를 받을 때 친일파는 위장일 뿐 실제론 독립운동자금을 댔다거나, 조상의 이름을 사전에서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며 거액을 희사하겠다고 제안한 친일파 후손도 있었다. 거의 조사·연구된 바 없었던 미지영역이었던 일제 강제동원 연구도 1995년부터 시작했다. 이후 국가폭력, 6.25 민간인 학살 등으로 영역 확장도 꾀했다.

최근엔 지난 박근혜 정권에서 불거진 일제 강제노동 시설의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 관련 이슈에서 민문연이 큰 역할을 했다. 2015년 당시 김 교수는 유네스코 총회가 열리는 독일로 직접 가서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실태 조사 보고서를 영문 번역해 21개 회원국에 보냈다. 결국 유네스코 위원회는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계획을 마련하라고 일본에 권고했다. 등재 결정 4개월 전이었다.

– 지부가 이렇게 잘 조직·활동하는 연구소가 없을 것 같다.
“지역운동하는 지역모임을 토대로 지부사업도 꽤 했다. 지역사업은 ‘기억’ 투쟁의 최전선에서 일해온 분들이다. 지배층의 국가폭력과 민주주의 억압의 역사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작업을 해온 거다. 지역유지가 독립운동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친일한 사례가 많았다. 그걸 숨기고 왜곡했던 기억을 드러내고 그걸 통해 문제 제기해온 것에 문학적인 감수성을 더해 ‘기억 투쟁’이라고 이름 붙여본 것이다.”

– 한국인들은 양심적 일본인 시민운동가들에게 연대와 지지를 표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 사회 내에선 한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무기력증이 심한 사회다. 일본서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힘을 받고 있을 정도다. 내부에서 너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기 손으로 역사를 바꿔본 적이 없고 혁명이 성공해 본 적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양심적인 시민운동가가 점점 줄어드는 거다. 젊은층 충원이 잘 안 되고 있다.”

<2018-12-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징용공→노무자’ 말 바꾼 아베 총리… 남북이 ‘기억투쟁’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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