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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으로 근대 이후 한국 사회 가장 크게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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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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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27일 오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18일 취임 1년을 맞았다. 그는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고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다. 어머니(고 지복영 선생)는 1940년 광복군으로 처음 군복을 입은 여성 넷 가운데 한 명이다. 해방되던 해까지 광복군 모집, 광복군 기관지 발간 등의 항일 활동을 했다. 외삼촌인 고 지달수 선생도 독립유공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뒤 독립유공자를 한 명이라도 더 찾겠다고 했다. 독립기념관이 올해부터 체계적으로 유공자 발굴 업무에 나선 이유다. 이전엔 국가보훈처가 직접 했다. “올해 티에프를 만들어 300명 이상 유공자를 찾아 포상 신청을 했죠. 이 중 20명 이상 포상을 받았어요.” 2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이 관장 얘기다.

독립기념관 소속 ‘한국독립운동사연구사’는 현 정부 들어 정규직 연구자가 9명에서 16명으로 늘었다. “정부에서 연구소 확대에 협조적입니다. 연구소가 독립운동 연구의 중심 구실을 하려면 25명 정도는 돼야 합니다. (인력 확충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어요. 연구소는 독립운동 연구자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기능도 해야 합니다.” 지난 2년 새 독립기념관 정부 보조금도 10%가량 늘어 300억 원가량 된단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이다.

이 관장은 기록조차 없는 무명 독립군을 기리는 사업이 유공자 발굴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1919년 시위에 최대 100만 명이 참여했지만 이름을 알 수 있는 이는 만 명도 안 됩니다. 독립군도 비슷해요. 당시 기록은 주로 일본 쪽 자료인데, 거기엔 독립군 간부만 이름이 나옵니다. 모스크바나 파리를 가도 무명용사를 추모하는 시설물이 있어요. 우리도 정부 차원에서 추모 시설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부가 못하면 독립기념관 안에라도 만들어야죠.”

그가 “독립운동가, 특히 해외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아내의 헌신적 지원이 없었다면 남편의 독립운동이 불가능했겠죠. 저는 지청천 장군의 외손이라고 소개받는 것보다 (외조모) 윤용자 여사의 손자란 게 더 자랑스러워요.” 왜? “외조모는 강인한 분이셨죠. 만주에서 1남 2녀를 키운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셨어요. 어머니도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2015년)에서 외조부는 기록이 있어 많이 언급하지만 외조모는 그럴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하셨죠. 외조모 행적에 대해선 빈칸을 많이 남겨놓고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유지를 남기셨어요.”

내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다. 정부와 민간에서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독립기념관도 예외일 리 없다. “내년 2월 말에 3권짜리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낼 겁니다. 1만5천여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분 144명이 수록됩니다.” 독립운동가 인명 편찬사업은 2024년에 최종 마무리된다. 5년 앞서 특별판을 내는 것이다. “(특별판엔) 높은 등급의 포상을 받은 분들과 유관순 열사나 석주 이상룡 선생처럼 훈격은 떨어지지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분들이 포함했죠.” 내년 2~4월에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 100년 특별전’도 열 계획이다. 독립기념관 전시관을 리모델링해 유일본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원본도 전시한단다. “너무 귀중해 평소엔 복제본을 전시했죠.”

그는 4년 전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가 연 학술회의에서 ‘3·1혁명의 재인식’을 주제로 글을 발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시절이다. 1919년 2~4월에 있었던 민족사적 사건의 명칭이 ‘운동’이 아니라 ‘혁명’이어야 하는지를 밝힌 글이다. “제 글 발표 전에도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같은 학자들이 개별적으로 혁명이란 용어를 논문에서 썼어요. (4년 전) 저는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3·1혁명으로 부르는 게 정당하다는 주장을 본격 제기했죠.” 이런 그의 주장은 최근 급격히 세를 얻고 있다. 이낙연 총리도 지난 14일 혁명으로 바꿔 부르는 것에 대해 논의해달라고 학계에 요청했다.

“운동이란 말은 100년 전 우리 역사를 바꾼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도 그렇고 제헌헌법 기초 안도 혁명이라고 했어요. 혁명은 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을 말해요. 근대 이후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 하나를 꼽자면 바로 3·1혁명입니다. 4·19는 정권은 바꿨지만 사회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어요.” 그 근본적 변화란 “제국의 시대가 끝나고 민국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3·1혁명 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국이 등장해요. (1919년 4월 11일 설립된) 상하이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은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인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제를 지향한다는 데에 다 동의했죠.”

올부터 독립유공자 찾기 업무 맡아
300여명 새로 발굴 20명 이상 포상
내년 2월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발간
“기록 없는 무명독립군 추모시설 시급”
4년 전 ‘3·1혁명으로 정명’ 본격 제기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외손자

학계 시각은?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 회의론이 있는 것 같아요. 혁명은 결과로 나타나야 하는데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채택은 선언에 불과했다는 논리죠.” 회의론엔 혁명이 좌파의 용어란 선입견도 깔려 있다고 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혁명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요. 좌파 용어라는 것이죠. 하지만 혁명이란 말은 좌·우와 상관없어요. 프랑스나 러시아 혁명을 보세요.”

그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평화통일의 바탕이었다”면서 혁명 용어는 독립운동의 이런 본질적 의미를 되살리는 구실도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이식한 게 아닙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치열하게 싸우면서 확립했죠. 해방 뒤 큰 논란 없이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원리를 직결시킨 계기가 바로 1919년의 두 사건이었어요.” 말을 이었다. “지금의 분단체제를 생각하면 독립운동가들에게 대단히 죄송해요. 독립운동가들이 좌·우로 나뉘어 한때 싸우긴 했지만 완전한 자주독립이란 대명제를 위해 서로 손을 잡았어요. 1930년대 후반 이후론 좌·우 독립운동가들 모두 독립운동을 혁명이나 혁명운동으로 불렀어요. 정책이나 강령도 외관상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우파 독립운동 단체도 토지 소유 금지나 필요할 땐 기업을 국유화할 수 있다는 강령을 채택했고 좌파 쪽은 계급해방 강령을 유보했어요. 분단을 막기 위한 1948년 ‘평양 4김회담’ 참석자도 대부분 독립운동가였죠. 이분들의 고뇌와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대입을 준비하던 고3 때 어머니는 육사 진학을 완곡하게 권했단다. “외사촌 형님이 육사 시험을 봐 떨어졌어요.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가 군인의 길을 걸었는데 후손 중에 군인 한 명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육사 진학을 권하셨어요.” 어머니의 뜻과 달리 그는 1976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역사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어려서 어머니한테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얘기를 많이 들은 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어머니는 1995년 부친인 고 지청천 장군을 회고하는 책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를 펴내기도 했다. 어머니 나이 76살 때였다.

이 관장은 1991년 연세대 사학과에서 <일제 침략기 농민운동의 이념과 조직>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머니가 60년대에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아 국가 지원금을 받았어요. 중국어도 능숙해 화교학교 교사를 오래 하셨죠. 독립운동가 집안치고는 형편이 괜찮은 편이었어요. 어머니는 35살 때 외조부 수행원 출신인 부친과 결혼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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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박종식 기자

그는 올해 불기 시작한 남·북 해빙 바람이 무척 반갑다. “독립기념관은 10년 전 북한의 평양인민대학습당, 조선혁명박물관과 자료 제공 엠오유를 체결하기로 구두 합의까지 했어요. 그 뒤 남북 관계가 악화하면서 없던 일이 됐죠. 평양인민대학습당에는 신채호 관련 귀중한 자료가 많아요. 그 자료를 받아 신채호 전집 완간본을 만들려고 했어요. 올해 평화 무드가 조성되면서 남북교류 사업을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정부 쪽에도 사업 제안을 한 상태입니다. 북쪽에 있는 일제 강점기 시절 판결문 자료는 독립운동가 발굴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독립운동 연구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면서 말을 이었다. “고 조동걸 선생과 신용하, 이만열 선생 같은 분이 1세대 독립운동 연구자이죠. 2세대는 60대 중반에서 50대 후반으로 대부분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대학들이 2세대 후임으로 독립운동 연구자를 뽑지 않으려는 추세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너도나도 다 독립운동사 연구로 몰려 갔어요. 젊은 연구자들이 지금은 기피합니다. 일상사나 사회사, 문화사에 관심을 갖죠. 2세대만큼 업적을 쌓고 연구역량을 갖춘 독립운동 연구자들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세대’란 말을 쓸 상황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독립기념관 관람객 현황은? “2008년 무료 입장으로 바뀌면서 완만하게 늘다 지난해 이후 더 많이 늘고 있어요. 작년부터 장병 휴가 때 독립기념관에 2시간 이상 머물면 휴가를 하루 더 주는 제도를 군이 도입했거든요. 장병들이 1년 동안 10만명 이상 옵니다. 관람객 증가 효과는 그 이상이죠. 방문 때 가족이나 여자 친구들과 같이 오거든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18-12-30> 한겨레

☞기사원문: “3·1혁명으로 근대 이후 한국 사회 가장 크게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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