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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편찬, 완전히 끝나지 않아… 더 보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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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14일 무악재역 인근에서 윤경로 고문을 만났습니다.ⓒ 경실련

올해 경실련은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30주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작년부터 월간 경실련에서는 특집 인터뷰로 고문들을 찾아뵙고 있습니다. 올해도 경실련이 꼭 만나야 할 분들을 찾아다니며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지난 14일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분과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시고 상임집행위원장, 통일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던 윤경로 고문을 찾아 뵀습니다. 3·1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남북관계 전망 등 역사학자로서 바라보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귀한 말씀들을 나눠주셨습니다. -기자말

–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입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활동도 하고 계시는데,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100주년 기념사업 활동 소개 부탁드립니다.

“100년 전 3·1운동 당시는 나라의 국권이 빼앗긴 식민지 시대였어요. 일제에 우리가 강제합병된 지 10년 만에 나라가 없어지고 국권을 상실했을 때 민이, 백성이 스스로 궐기해서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독립을 찾겠다고 운동을 일으킨 것이지요.

그 때 독립을 외쳤지만 바로 독립은 안 됐죠. 45년까지 기다려야했죠. 어쨌든 국권을 상실했을 때 민이 중심이 돼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 여파로 한 달 뒤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어요. 그래서 비록 임시정부, 망명정부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국호가 갖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그 전에는 대한제국 시대였어요. 황제에게 모든 주권과 국권이 주어졌던 봉건 사회였지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대한민국이 됐다는 건 주권과 국권이 민에게 주어진 주권제민의 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직속으로 16개 각 부처에서 모여서 위원회가 구성됐어요. 저도 기억‧기념분과위원장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는데, 3·1운동 100주년이니까 기념행사도 하지만 3·1운동이 갖는 역사성을 어떻게 현재화 하느냐 그런 것을 분과별로 의논하고 있어요. 그래서 행사도 정부나 기관에서는 후원하고, 주로 민이, 백성이, 시민이 중심이 된 다양한 컨셉을 잡으려고 합니다.”

– 3·1운동을 3·1혁명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시는데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이 시작됐는데, 이 조약이 굉장히 불평등하게 맺어졌어요. 그래서 이런 불평등을 뒤늦게 알고 그걸 어떻게든지 바꿔보려고 무척 애를 썼지요. 애국계몽운동, 항일의병운동, 독립협회니 만국공동회 등 이런 운동들을 쭉 했는데, 1919년까지도 운동은 많이 전개됐지만 성취하진 못했단 말이에요. 많은 운동들이 모이고 모여서 쌓여서 3·1 혁명이 일어났다고 봐요.

앞에서 세류(細流), 물줄기와 같은 여러 모양의 운동들이 모이고 모여서 3·1 혁명을 일으켰고 그 결과 대한민국이 생겼다, 제국의 시대에서 민국의 시대로 갔다는 것은 완전히 혁명이거든요. 그 중요한 계기가 3·1운동에서 시작됐다고 보기 때문에 이전의 많은 운동과 똑같은 운동으로 보는 것은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낮춰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1911년 중국에서 쑨원을 중심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났잖아요. 왜 신해혁명이라고 하나요? 하, 은, 주, 진, 한 수천 년 내려오던 봉건적인 완조를 마감하고 중화민국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3·1 혁명이라는 말을 정부에서 바로 받아서 쓰는 것은 반대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발할 사람들이 많아요. 마치 건국절 논쟁처럼 되는 건 별로 생산적이지 않아요.

학계에서 충분히 논의되도록 맡겨주는 게 좋아요. 내가 고등학교 때만 해도 다 동학난이라고 가르치고 동학난이라고 배웠어요. 지금은 동학난이라는 말 아무도 안 쓰잖아요. 동학혁명이라고 하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혁명이 될 거예요. 그걸 가지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할 필요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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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하실 때마다 한자가 나오면 직접 써주시며 뜻을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경실련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도 하셨는데, 우리나라의 친일청산은 얼마나 이뤄졌다고 보시는지요?

“우리가 일제 하에 35년, 36년 식민지배를 받다보니까 대부분은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1~2년도 아니고 한 세대가 넘도록 지배를 받다보니까 자연히 거기에 순응하는 거죠.

3·1운동 당시에도 민족대표 33인을 뽑을 때 지명도가 높은 분들을 민족대표로 모시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다 거부했어요. 바위에 계란 던지기지 만세 몇 번 부른다고 해서 일본이 식민지를 내놓을 사람들이 아니라고 본거죠. 괜히 피해만 온다고 거절했지요. 그래도 종교인들은 양심적인 세력 아니에요? 지금은 많이 세속화 됐지만. 그렇게 그분들이 나서게 된 거지요.

일제 30년, 오래 지배를 받다보니까 자연히 친일부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45년 해방 되고 새 나라를 건설했으니, 과거 잘못됐던 것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 된다고 반민특위를 만들어서 친일한 사람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려고 했죠. 그런데 이승만 정권 자체가 국내에서 친일했던 세력들과 가깝다 보니 반민특위가 1년도 못 하고 강제해산 당했지요. 그 뒤로 60년~70년이 흐른 거죠.

역사학자로 ‘역사는 무엇이냐?’고 했을 때, 역사는 ‘고백하는 것’이라고 봐요. 말하자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것도 역사화해야 되지만 우리가 부끄러웠던 과거의 역사도 한번쯤은 고백해야 한다, 정리하고 역사화 시켜야 된다, 한번쯤 털어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친일 명단을) 2005년 1차 발표하고, 2009년 11월 효창공원 백범 김구묘소 앞에서 최종 발표했어요. 그것이 준 사회적 파장은 상당히 컸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옛날에 일제 때 내가 뭐하고 뭐했다 자랑스러워 했어요. 집안의 가문의 영광으로 말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친일했다는 걸 자랑스러워하진 않잖아요.”

– 논란도 참 많았던 것 같아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박정희를 넣느냐 마느냐가 제일 논란이었죠. 그런데 우리가 그 근거를 찾았어요. 1931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박스기사로 22살의 조선의 젊은이가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혈서를 썼다고 실린 거예요. 일본에서 볼 때는 장한 조선 청년이었던 거죠. 처음에 집안에서 명예훼손 걸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대로 아들(박지만) 이름으로 발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이겼죠.

또 여러분도 다 알만한 인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있어요. 그 양반이 민족의 애국자로 여겨지는데, 1905년 외교권 박탈당하고 합방된 이후 친일적인 글을 많이 썼어요. (이 글들이) 다 높게 평가받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친일 인사였느냐며 충격을 많이 받았지요.

친일인명사전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고 빨갱이 소리도 듣고 그랬지만 역사학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했다는 자긍심이 있어요.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저는 아직 위원장직을 맡고 있고, 이제 10년 돼서 보완을 좀 하려고 해요. 들어간 사람들 중에 잘못된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때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해외에서 밀정 노릇을 한 사람 등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다 못 넣었거든요. 추가 보완할 계획이에요.”

– 통일이 되기 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끝난 게 아니라고 하는데, 현재 남북관계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만절필동(萬折必東) 이란 말이 있어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현재, 우리가 100년 전의 사건을 다시 체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주평화’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당시는 잃었던 국권과 주권을 되찾는 ‘자주독립’을 구호로 내걸었다면, 오늘날은 ‘자주평화’가 중요합니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중국의 고사입니다. ‘중국의 황하에서부터 시작해 수업이 여러 번 꺾이며 굽이쳐 흐르고 수만 리를 내려와 만 번 굴절하지만, 반드시 동쪽 황해바다로 물이 흘러내려간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맞다고 봐요.

지난 70년 동안 남북 간에 별 일이 다 있었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있겠지만, 사람이 인위적으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순 없어요. 독재자든 어느 누구든, 어느 인물, 한 시대에 그 흐름이 막히진 않아요.

남북문제가 70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반드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하는 그 날이 올 거예요. 그런 조짐이 보여요. 우리가 똑똑해야 돼요. 국민들이 지도자를 잘 뽑고, 잘못 할 때 감시하면 남북문제도 서서히 풀릴 것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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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고문은 현재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억·기념분과위원장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경실련

– 마지막으로 좌우명 같은 게 있으신가요?

“내가 2000년즈음 상집위원장할 때였는데, 미국에서 경실련이 취재를 나와서 상집위원장인 나를 인터뷰 했어요. 한국의 시민운동에 대해서 인터뷰하고 마지막으로 당신 좌우명을 묻는데 이렇게 얘기했어요.

‘나는 역사학도다.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그 문제에 대해서 행동하거나 발언할 때 당장 내 입장에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훗날 이 문제가 어떻게 평가될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발언하고 행동하려고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당장 욕 먹더라도 훗날에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당장 박수를 받을지라도 훗날에는 잘못될 수도 있으니 먼 훗날에 어떻게 평가받을지 생각하며 행동하고 발언하려고 해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경실련 1-2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이 글을 쓴 윤은주씨는 경실련 회원홍보팀 간사입니다. 

<2019-01-30>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인명사전 편찬, 완전히 끝나지 않아… 더 보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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