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리에게 ‘촛불’이 있다면,
100년 전 우리에겐 ‘만세’가 있었다.”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3․1운동 100주년 기념작★
열아홉 살 소년부터 농민과 노동자, 순사보까지
역사의 스포트라이트 뒤에 있던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을 만나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100년 전,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던졌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는 그것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현대사 연구자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조한성은 3·1운동이 단순한 선언으로 이루어진 엘리트 운동이 아니라 해외그룹과 국내종교그룹, 학생그룹 등 다양한 그룹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민족운동이었으며, 한 번의 시위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이어 벌어진 커다란 흐름이었다고 주장한다. 3·1운동은 조선의 남녀노소, 100년 전 민초들이 이루어낸 촛불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책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보통 영웅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만세열전』을 통해 저자는, 제대로 된 지도부도 없는 상황에서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3·1운동의 원동력을 ‘사람들의 자발성’에서 찾아낸다. 지금까지 3·1운동 관련 서적이 이 운동 자체의 역사적·사회적 의의에 집중했다면, 『만세열전』은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서사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3·1운동은 누가 기획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렸을까? 또 위험을 무릅쓰고 만세시위를 실행에 옮긴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이들은 어째서 이 일들을 한 것일까?
『만세열전』에는 그 어떤 역사서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전까지 집중 조명되었던 민족대표 33인 외에 역사서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3·1운동의 기획자들부터 전달자들, 실행자들까지, 즉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결심, 실행이 생동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지방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과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민가에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열아홉 살의 나이에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배재고보 2학년 김동혁은 이 책에서 처음 다루어진 인물이다.
이외에도 조선을 독립시키고 싶어 지하신문 《각성호회보》를 만들었던 노끈장수 김호준, 아비를 따라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3·1운동 역사상 최연소 시위대’였던 열 살 아이들, 그리고 그저 조선 사람이기에 독립을 외친 무수한 만세시위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1운동은 그들의 땀과 눈물, 고민과 갈등, 희망과 기대, 주저와 실행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책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역사의 스포트라이트 뒤에 있던 3‧1운동의 숨은 주인공들, 『만세열전』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3·1운동 시기 독립과 자유를 위해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던졌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중에는 저명한 독립운동가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명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대개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소중한 삶을 희생했지만, 역사책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그들의 삶을 역사로 복원하는 것이다. (…) 이것은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 가려진 보통 사람들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지금은 물론 1919년 당시에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조선땅에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라는 봄을 불러온 ‘진짜 영웅’들이었다. 이름조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통 영웅’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변화를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보통 영웅들의 힘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촛불의 역사를 되짚다
100년 전 민초들의 촛불 이야기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된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가 3·1운동을 거쳐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45년 건국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2016년 촛불시위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투쟁의 중심에 3·1운동이 자리하며,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발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만세열전』에는 강요나 강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의지와 뜻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법정 증언을 보면 왜 독립운동을 했냐는 일제 판사의 질문에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기록들이 다수 나오고 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기에 스스로 했을 뿐이다.
“피고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 – 배재고보 2학년 김동혁에 대한 예심판사의 심문에서 오간 말 |
“피고는 겨우 17세로서 독립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누구에게 선동을 받아 참가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참가한 것입니다.” – 이화학당 2학년 유점선에 대한 예심판사의 심문에서 오간 말 |
저자는 당시 신문자료와 역사사료, 경찰심문조서, 예심심문조서, 공판시말서 등을 샅샅이 훑으면서, 3‧1운동을 기획한 사람들, 전달한 사람들, 실행한 사람들을 생생히 고증하려고 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서중석 이사장의 추천처럼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촛불의 역사를 되짚는 과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책은 3‧1운동의 결과와 의의를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한정짓지 않고 더 폭넓게 조망한다. 저자에 따르면, 만세시위는 이 땅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쟁취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청년·종교·노동·여성단체 등 수많은 단체를 만들어내는 청년운동의 시대를 열었다.
만세시위는 독립운동의 방법도 다양화시켰다. 만세시위를 통해 민족을 실감하고, 자유·평등·민주주의를 각성한 사람들은 일부는 외교적인 수단으로, 일부는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또 파괴와 암살을 표방한 의열단체가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제국주의국가를 타도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3·1운동이 낳은 새로운 독립운동세대였다는 점이다. 의열단의 김원봉이 그랬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그랬다. 서울파 공산주의자 김사국, 상해파 공산주의자 이봉수 등 공산주의 주요 계파의 지도자들도 3·1운동이 낳은 새로운 독립운동세대였다.
이렇듯 민초들의 촛불은 독립과 자유를 염원하는 희망의 횃불을 밝히고, 이는 들불처럼 번져 독립운동을 다양화시키며, 결국은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100년 전 그날’과 생생히 조우하는 역사 버라이어티
하지만 이 책이 단지 숨은 주역들을 조명하며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인물이 처한 상황과 고민, 그들이 벌인 활동과 잡힌 후 경찰과 검사, 판사의 심문 과정 등이 생생하게 전개되며,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동감과 몰입감은, 독자로 하여금 시계를 100년 전으로 돌려 ‘그날’, ‘그곳’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세열전』은 ‘100년 전 그날’과 생생히 조우하는 한 편의 역사 버라이어티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모두가 암흑에 절망할 때, 결연히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3․1운동의 기획자들
모든 변화에는 변화의 그림을 그리는 ‘기획자들’과 이를 널리 퍼뜨리는 ‘전달자들’, 그리고 행동에 옮기는 무수한 ‘실행자들’이 있다. 3‧1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독립과 자유의 씨앗을 뿌린 여운형과 신한청년당부터 지하신문과 격문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만방에 퍼뜨린 사람들, 독립만세를 부르짖은 농민과 노동자, 고학생까지, 이 책에는 3‧1운동을 기획하고, 전달하고, 실행한 사람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먼저 기획자들의 이야기다.
독립과 자유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1929년 7월, 그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자 전 조선의 이목이 쏠렸다. 한 기자가 물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전 조선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냐고. 그의 이름은 여운형. 조선의 독립운동에 씨앗을 뿌린 주인공이었다. 그는 어떤 씨앗을 뿌렸는가, 그가 뿌린 씨앗은 무엇이 되었는가.
독립선언서로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리다: 손병희와 천도교인들
손병희는 망설였다. 동학농민운동 이래 위기에 처했던 천도교를 친일행위까지 감수해가며 힘들게 키워놓지 않았던가. 독립운동은 교단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손병희와 천도교는 ‘의로운 변심’을 결정한다. 그들을 움직인 결정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교의를 넘어 대의로, 오직 한길로: 이승훈과 기독교인들
기독교와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데 극적으로 협의했다. ‘조선독립’이라는 하나의 큰 뜻 앞에서 그들은 교파를 넘어, 당파를 건너 ‘온전한 자유인’이 되어 거침없이 나아갔다. 오직 한길로.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학생 지도부종교계와 독립운동에 협조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학생 지도부는 제2, 제3의 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3월 5일, 오로지 학생들만의 힘으로 준비한 만세시위가 열린 날, 남대문역 일대는 붉은 수건으로 붉게 물들었다. 붉은 수건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불덩어리를 내 친구, 내 이웃에게 전하는 도구였다.
해외 각지에서 독립의 뜻을 모은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교파를 넘어 한뜻으로 뭉친 천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독립운동을 단 1회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계획 아래 2차, 3차 시위를 준비한 학생 지도부까지, 3‧1운동의 기획자들은 아무도 억압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 아무도 착취당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만세시위의 토대를 마련했다.
“넌 독립운동을 그만두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가?” 여운형에 대한 일제 경찰의 심문에서 오간 말 |
“그대는 어찌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나?”“조선 사람이니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이오.” “그래서 어떤 수단으로 독립을 하려 했나?”“조선 사람이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독립을 성취하려고 했소.” –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던 보성법률상업학교 3학년 강기덕에 대한 검사의 심문에서 오간 말 |
희망의 빛이 방방곡곡 비출 때까지, 목숨걸고 횃불을 들다
3․1운동의 전달자들
3‧1운동이 소수의 기획자들에 의해 계획되는 데서 그쳤다면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희망의 빛을 방방곡곡 비추기 위해 스스로 나서 독립운동 소식을 알렸던 전달자들을 살펴보자.
만인이 죽어 백만 인을 살리는 길: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
청주경찰서 경부 이성근은 인종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체포한 지 몇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기고 매달아도 묵묵부답이었다. 부풀어오른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 간혹 보이는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몸수색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매가 나왔는데, 그는 대체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가 무수한 고문과 구타에도 지키려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그저 당연한 일을 했던 열아홉 살 소년: 배재고보 2학년 김동혁동혁은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 같은 날 만세시위에 참여한 혐의, 3월 2일 《조선독립신문》 2호를 낙원동 부근 민가에 배포한 혐의, 3월 5일 《조선독립신문》 3호를 배포한 혐의 등으로 본심에 회부됐다. 그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불타는 마음은 총칼로도 없앨 수 없으니: 지하신문과 격문을 만든 사람들
《조선독립신문》은 독립운동의 소식을 신문으로 만들어 전함으로써 일회성의 독립선언을 보완하고, 독립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기획된 지하신문이었다. 대표자로 이름을 올린 윤익선을 포함해 처음 신문을 만든 사람들이 체포된 이후에도, 끊길 듯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문을 내는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앞서서 나갔던 사람들의 뒤를 이어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한 사람들,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기 위해 신문을 만들고 뿌린 사람들,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자 격문을 써서 붙인 사람들, 3‧1운동의 전달자들은 그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횃불이 되어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알렸다.
“만인이 죽어 백만 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것이오. 만인을 죽이면 만인의 피가 백만을 물들이고, 백만을 죽이면 백만의 피가 천만을 물들일 것이오. 그럼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 “그대가 감옥에 들어가면 가족은 어떻게 하나?” –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에 대한 경부의 심문에서 오간 말 |
그날, 만세 소리가 들불처럼 조선땅을 뒤덮었다
3․1운동의 실행자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이 펼쳐졌던, 그해 3월. 자기 앞에 놓인 길을 피하지 않고 용감히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삶은 곧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았던 3‧1운동의 실행자들을 만나보자.
열 살 아이부터 학생과 교사, 순사보까지,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만세시위자들
독립만세시위는 순사보의 마음도 움직였다. 3월 5일 오전 9시 30분, 덕수궁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순사보 정호석은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휴가를 얻었다. 그는 넷째손가락 둘째 마디를 물어뜯은 후 그 피로 광목에 태극기를 그렸다. 그리고 근처의 학교로 들어가 만세삼창을 한 후 함께 만세를 부르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린 여학생 한 명이 나와 만세를 불렀다. 열 살 먹은 정호석의 딸이었다. 만세를 부르며 경성으로 향하는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여자아이들이 만세를 부르며 따라왔다. 3·1운동 역사상 최연소 시위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폭민’인가 ‘의민’인가, 돌멩이와 몽둥이를 든 주민들: 순사 피살사건의 진실
순사가 죽었다.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경찰관주재소 소장 가와바타 도요타로였다. 가고시마현 사쓰마군 출신으로 1917년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면서 부임해온 젊은 일본인 순사였다. 그는 왜 죽었는가. 일제 경찰의 주장대로 ‘폭민’들이 계획한 살인인가, 아니면 농촌의 독립운동 중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고인가.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장채극과 자동차시위대
장채극은 서린동에 있는 중국음식점 봉춘관 앞에서 마지막 준비를 마친 후, 보신각 앞으로 이동했다. 그는 평범한 행인인 양 가장하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은 정오였다. 얼마 후 저 멀리서 만세 소리가 들렸다. 깃발을 들고 뛰어오는 이들이 보였다. 어젯밤 만들었던 ‘국민대회’와 ‘공화만세’라고 쓰인 깃발들이었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장채극은 시위가 시작되는 것만 확인한 후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국민대회’는 그렇게 막이 올랐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인들의 발걸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것은 독립과 자유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만두장사, 고학생, 교사, 농민, 노동자…… 그들은 왜 만세를 불렀을까? 두려움과 공포를 무릅쓰고 거리로 뛰쳐나간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대는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삶에 쪼들리고 있는 2천만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이와 같은 일을 하면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그렇습니다. 각오하고 한 일이니 목숨이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조선인 순사보 정호석에 대한 검사의 심문에서 오간 말
이 모든 사람들이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뭉쳐 행했던 3·1운동은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일제의 압도적인 폭력과 강압에 독립은 쉽지 않았지만, 조선인들은 그들의 통치에 동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항거했다. 100년 전 포기할 줄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이 오늘을 열었다.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 국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 당당히 싸우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 3·1운동이 있었다. 이것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우리가 무명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 저자 소개
조한성 |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료 읽는 법과 연구사 정리하는 법 등을 훈련하며 역사학의 정수를 배웠다. 반독재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을 탄압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이 일으킨 유도회사건을 연구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교와 수원과학대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에 참여했다.
2006년부터 3년 반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는데, 이때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반대편에 섰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고뇌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진지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물음들을 좇아 일제강점기의 기록을 조사하고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최근까지 발표된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여 3·1운동의 역사를 정리했다. 2014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레지스탕스』, 『해방 후 3년』,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공저) 등이 있다.
■ 추천사
오늘의 우리에게 ‘촛불’이 있다면, 100년 전 우리에겐 ‘만세’가 있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대서사시인데도 권장할 만한 책이 마땅치 않다. 저자는 엄숙한 주제를 쉽고 편안하게 녹여내 얘기해주는 솜씨로, 그날 그곳으로 가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춤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을 조명한다. 만세시위는 누가 기획했는가, 이를 알린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 실행에 옮겼는가?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촛불의 역사를 되짚는 과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 차례
프롤로그|만세 전
1장. 모두가 암흑에 절망할 때, 결연히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 기획자들
독립과 자유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 :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독립선언서로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리다 : 손병희와 천도교인들
교의를 넘어 대의로, 오직 한길로: 이승훈과 기독교인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학생 지도부
호외 1. 일제 군경 당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언제 3·1운동을 알게 됐을까
호외 2. 열여섯 살 채순병이 전단을 뿌린 이유
2장. 희망의 빛이 방방곡곡 비출 때까지, 목숨걸고 횃불을 들다 : 전달자들
만인이 죽어 백만 인을 살리는 길: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
그저 당연한 일을 했던 열아홉 살 소년: 배재고보 2학년 김동혁
불타는 마음은 총칼로도 없앨 수 없으니: 지하신문과 격문을 만든 사람들
호외 1. 인종익의 선언서는 어디까지 전해졌을까
호외 2. 팩트 체크, 지하신문의 진실과 허구
3장. 그날, 만세 소리가 들불처럼 조선땅을 뒤덮었다
열 살 아이부터 학생과 교사, 순사보까지,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 만세시위자들
‘폭민’인가 ‘의민’인가, 돌멩이와 몽둥이를 든 주민들 : 순사 피살사건의 진실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장채극과 자동차시위대
호외 1. 조선인 고등계 형사 신승희는 왜 죽었나
호외 2. 3·1운동은 어떻게 거대한 물결이 되었을까
에필로그. 만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