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부터 기생까지 만세운동 선봉…3ㆍ1운동 직전 첫 ‘여성 독립선언서’ 발표
임시정부 헌장에도 남녀평등 명문화…”독립운동계, 여성 역할에 깊은 이해”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3·1 만세운동때 선봉에 섰던 여성은 유관순 열사만이 아니었다.
어린 학생부터 평범함 주부, 간호사, 기생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은 물론이고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3·1운동은 여성들이 오랜 세월 성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항일운동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3·1운동 이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여성 독립운동단체들도 우후죽순으로 결성돼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3·1운동 직전 만주지역에선 1천335자 한글로 작성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표됐다. 이 선언서의 말미에는 기원 4252년(1919년) 2월이라고 표기돼 있고,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 여성 독립운동가 8인이 서명했다.
국가기록원이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3·1운동 편)’는 이 선언서를 “3·1운동 이전에 발표된 여성들의 첫 독립선언서”라고 평가했다.
선언서는 여성도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국민 구성원임을 강조했다. 자주독립 정신과 함께 남녀평등 의식을 표명한 것이다.
여성들은 3·1운동 당시 서울, 개성, 평양, 부산, 광주, 전주 등 주요 도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도시에는 여학교와 교회 부인회 조직 등이 있어 여성들을 조직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선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배화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여학생과 졸업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부속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들도 서울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중심인물은 동료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한 박자혜 선생이다. 간우회 회원들은 각종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의 전면에 섰다.
개성에선 당시 여자성경학원 기숙사 사감을 지내던 어윤희 선생이 남성들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독립선언서 배부를 자청하는 등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선생이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리는 광경을 본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배부에 동참했고 이는 개성 만세시위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일제에 체포된 선생은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는 3·1운동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몰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왔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 열사가 주도했다. 태극기를 직접 제작해 배포하는 등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열사는 일본 헌병에 체포된 이후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부산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는 경남지역 3·1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교사인 주경애 선생은 12명의 여학생과 시위 준비를 한 뒤 저녁에 기습적으로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했고 이때 거리의 군중들도 시위에 동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수백명으로 늘었다.
평양 만세시위에선 숭의여학교와 교회 여신도들의 활약이 컸다. 숭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직접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고종황제 봉도식(奉悼式)에선 여신도 20여명이 나서 만세시위를 촉발했고, 미국 선교사 거주지인 신양리에선 기독교 부인 20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수원과 해주 등지에선 기생들이 만세시위에 불을 붙였다.
당시 수원 기생조합의 총무였던 김향화 선생은 자혜병원 앞에서 동료 기생들과 만세행진을 벌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향화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해주에선 김해중월 선생 등의 주도로 기생들이 자신의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행진을 벌였고, 여기에 시민들이 동참해 만세시위 군중이 수천 명에 달했다.
3·1운동을 통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선 여성들은 서울과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항일 여성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여성단체 중 서울 중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 중심의 대한애국부인회는 조직 규모가 방대해 지방 곳곳에 지회를 두고 활동했다. 평안남도 순천의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 평안남도 강서의 대한독립여자청년회, 평안남도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회, 평안남도 개천의 여자복음회 등 항일여성단체들도 비밀리에 활동했다. 중국에선 김순애·이화숙 선생 등이 주축이 된 애국부인회, 일본에선 여성 유학생 중심으로 여자학흥회가 조직됐다.
미국에선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여자애국단과 유학생 중심의 근화회, 하와이의 대한부인구제회 등이 결성됐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고 했다”며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계를 비롯해 민중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2019-02-12> 연합뉴스
☞기사원문: [3ㆍ1운동.임정 百주년](25) 성차별 굴레 벗고 항일 주체로 우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