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익장’이라는 말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올해 만 여든한 살이지만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활동영역이 권력이나 금력 주변이 아닌 초지일관 본인의 학문과 양심 분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삭막한 요즘 사회에서 그는 존경받는 원로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81)은 숙명여대 명예교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국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고, 지금도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 등으로 자료 수집을 위해 프랑스 등을 다닌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도입에 반대하고, 지난 촛불혁명 과정에서도 당당히 앞장서 마이크를 잡았다. 요즘에는 문제 사학재단 상지대 이사장을 맡아 정상화를 모색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을 맞아 그를 만났다. 그는 “3년간 <경향신문>에 기고했던 기억이 새롭다”며 말문을 열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도입 반대
-올해는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4월 13일에서 11일로 바로잡힌 후 첫 번째 기념일을 맞는 해다. 게다가 올해는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이 되는 해다. 정부·민간 차원에서 많은 행사가 추진되는데 잘하고 있는 점과 미흡한 점은 어떤 것인가.
“대통령 직속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기념사업추진위)를 둔 것은 대통령이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겠다는 것으로, 잘한 일이다. 그러나 들리는 얘기로는 공무원 30~40명이 상주하고, 민간은 비상임이다보니 공무원 중심으로 일이 추진되는 것 같다. 물론 행사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참여가 불가피하다지만 민간의 의견이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대표적 사례가 임정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임정기념관을 짓는 과정에서 민간위원보다 조달청 공무원의 편의에 좌우되고 있다는 논란이 아닐까.
“내가 바로 그 임정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이다. 기념관 설계도를 봤는데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썩 만족스럽지 않다. 민간위원들이 보기에 정부청사에 걸맞은 권위와 임시정부기념관이라는 역사성이랄까, 메시지가 미흡하다. 그래서 민간위원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8월 보훈혁신위원회를 만들어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이 위원회는 지금처럼 폐쇄적인 보훈처 서훈문제를 지적했다. 특히 김원봉 등을 서훈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이는 임정기념관 이종찬 위원장도 건의한 사안이다. 그러나 보훈처는 전문가의 의견인 이를 거부하고, 국민청원에 오른 유관순 열사 훈격은 올렸다,
“보훈처에 독립운동가 공적심사위원회가 있다. 처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일절 서훈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들어 이들도 서훈했지만, 북한정권을 도운 사람은 곤란하다는 기준을 뒀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김원봉, 김두봉 등 많다. 이제는 이들, 특히 북한에서 숙청돼 남북 모두에서 외면받은 사람에게는 서훈할 필요가 있다. 또 처음에 친일을 했더라도 나중에 독립운동을 한 ‘선 친일 후 독립’ 인사의 문제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지만 모두 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대동단 총재 등 독립운동을 크게 한 김가진 선생이 대표적 경우다. 김가진 선생은 충청감사 시절 의병과 마찰이 있었다. 혹여 유족이 반발하면 오히려 김가진 선생에게 누가 될지 몰라 서훈을 잠시 보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풀 때가 됐다. 오히려 많이 늦었다.”
문재인 정부는 2월 26일 국무회의를 백범기념관에서 할 정도로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에 의미를 두고 있다. 기념행사는 올해 내내 계속된다. 남북 정상은 이번 3·1운동 기념행사를 공동으로 하기로 했지만 아쉽게 무산됐다. 이 전 위원장은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3·1운동은 민중운동사의 최고봉
“원 기자가 <촛불민중혁명사>를 썼지만 나는 3·1운동에서 최근 촛불혁명까지 역사성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 3·1운동은 독립운동 관점에서 봤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많은 연구자들은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1811년 홍경래 난부터 조선 후기 세도정치 등에 대한 반발로 전국적으로 농민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민중운동의 부족한 사상적 뒷받침은 동학이 메워줘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했다. 동학농민혁명은 표면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역사에 준 영향은 매우 컸다. 이후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저항과 그동안 성장한 민중의식이 결합한 것이다. 특히 봉건왕조를 붕괴시키고 민주체제를 세운 혁명적 전환이다. 임정은 그 결과로 탄생했다. 해방 이후 민중운동은 1960년 4·19 반독재투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통한 반군부 투쟁,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이후 민주화가 원만히 진행됐어야 했는데 이명박·박근혜 반동세력이 들어오자 이를 거부한 것이 바로 촛불혁명이다. 이런 일련의 민중운동사 관점에서 3·1운동은 최고봉이다.”
이 전 위원장의 설명은 광범위하고 정교했다. 기사는 요약해서 정리했지만, 설명에는 중국 신해혁명, 러시아 민중혁명 등 폭넓은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마치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는 최근 3·1운동을 혁명으로 부르자는 움직임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1944년 임정 대헌장 전문에도 ‘3·1대혁명’이라고 했고, <독립신문>이나 광복군이 발간한 <광복> 잡지도 3·1혁명이라고 썼다”면서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도 ‘3·1대혁명’이라 썼고, 제헌헌법 초안에도 ‘3·1혁명’이라고 돼 있는데 국회 논의과정에서 ‘3·1운동’으로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부는 임시정부가 설립된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3·1운동의 구체적 결과물에 대한 ‘예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번에는 임시공휴일로 하고, 앞으로 논의를 통해 정식 국경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100년 전에도 조선의 독립은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한반도 평화는 동북아·세계평화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단지 100년 전 한반도의 과제가 일제로부터의 독립이었다면, 분단된 지금은 평화·통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이 전 위원장은 최근 세미나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3·1운동의 자주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3·1선언 맨 앞에 우리는 ‘자주국’과 ‘자주민’임을 선언했다”면서 “1971년 7·4 공동성명 3원칙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은 3·1운동 정신과 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위원장은 1938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참상을 보면서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목사를 꿈꿨다. 마산고·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해서도 신학대를 생각했다. 결국 그는 신학대를 나와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고 <한국기독교 100년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3·1운동에서 기독교·천도교 등 종교계 활약을 길게 ‘강의’했다. 한국 기독교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최근 개신교의 극우화에 대해 “나름 논리가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용서·화해 관점에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그는 이들을 매서운 단어로 비판했지만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 나이에 그리할 필요가 뭐 있나”라면서 “그냥 안타깝다고만 써달라”고 했다.
서재를 벗어난 ‘행동하는 역사학자’
이 전 위원장은 사병으로 군복무를 하던 시절 한 장교로부터 한국사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자책감으로 한국사를 집중 공부했고, 결국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단재는 그 당시 수준에서 고증역사학 방법론을 동원한 유일한 사람”이라며 “단군조선 등 단재 연구에 동의하지 못할 부분도 있지만 그는 역사적 신념을 가지고 민족주체성을 지키려 한 학자”라고 평가했다.
이 전 위원장은 1982년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대학(숙명여대)에서 해직됐다. 점차 그는 보수신앙을 가진 민족주의적 역사학자에서 ‘진보적 민중역사학자’로 바뀌었다. 1992년부터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지내며 체계적인 독립운동사 정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했고,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편찬위원장을 맡아 이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독립운동사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연구하고 책을 낸 사람은 많았지만 준정부 차원에서 체계를 잡고 집대성한 작업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시작한 이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는 5년여의 작업 끝에 전 60권이라는 방대한 시리즈물로 마무리됐다.
그는 2003년 제8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남북교류가 활발할 당시 혹시 남북 정부의 정통성 문제가 제기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이다. 그는 “북한은 이미 빨치산 전통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고 했는데 우리는 상해임시정부의 전통을 잇는다고만 했지, 정부가 한 일은 임정 관계자 묘 5기를 이장한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60권을 계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은 그가 재임 중 20권을 만들었지만 51권이 나오고 중단됐다. 그는 “프랑스 낭트 고문서보관소에 아직 미발굴 독립운동사 사료가 많다”면서 “60권, 그 이상 자료집을 계속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1991년),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2000년), <역사의 중심은 나다>(2007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2010년),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2014년) 등의 대중 역사서와 에세이집을 냈다.
이 전 위원장은 단순히 서재 속에 있지 않고 ‘행동하는 역사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명박 정부부터 소위 건국절로 상징되는 친일 미화 역사왜곡 기도와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함께했다. 촛불혁명 기간 중에는 함세웅 신부·김상근 목사·강만길 고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민주·평화·정의사회를 위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또 사드 배치 반대 비상시국회의에도 참여하고, 양승태 사법농단 시국선언에도 이름을 올렸다.
여든 평생 역사학과 함께한 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까만 후배의 ‘어려운’ 질문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는 ‘역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나는 역사를 발전 측면으로 본다. 과거 역사는 제왕이나 지배자 등 소수가 주도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이것이 역사 발전이다. 좀 그럴듯하게 말하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문제와 사회 문제를 주체자로서 해결하려는 주체적 존재의 확대 과정’이다. 그 과정이 좀 더 평등하고, 호혜적 관계로 어우러지는 것이 좋은 것이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2019-03-02>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