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진] 안녕하십니까? <저널리즘 토크쇼 J>입니다. 지난주에는 <시민의회>가 방송됐었죠? 결방 안내를 제대로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널리즘 토크쇼 J> 오늘의 패널 여러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저널리즘 전문가죠. 정준희 교수 나오셨습니다.
[정준희] 안녕하세요? 정준희입니다.
[정세진] 팟캐스트 황태자 최욱씨입니다.
[최 욱] 노잼 앞잡이들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독립운동가 최욱입니다.
[정세진] 뉴스토커 KBS 송수진 기자 함께합니다.
[송수진] 안녕하세요? 송수진입니다.
[정세진] 오랜만에 나오셨어요. 일본 간사이 외국어대 장부승 교수님도 함께합니다.
[장부승] 안녕하십니까? 장부승입니다.
[정세진]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님 초대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서중] 성공회대 김서중입니다.
[정세진] 저희가 처음 나오는 분에게는 꼭 여쭤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알고계시죠?
[김서중] 언론 간 상호 비판은 언론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봐요. 이 프로그램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보고요. 또 기존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과 달리 대담 식으로 하는 것이 시청자의 관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고 그래서 잘 보고 있는 편입니다.
[정세진] 최욱 씨가 요즘 공격을 참 많이 당하는데 평가를 해주신다면요?
[최 욱] 대표적 노잼 앞잡이. 너무 노잼 냄새가 납니다.
[김서중] 그래서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정세진] 최욱 씨를요?
[김서중] (웃음) 네. 맞아요.
[정세진] 오늘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진행이 될지 궁금해집니다. 저널리즘 토크쇼 J는 KBS 1TV, myK, pooq, 유튜브, 페이스북를 통해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정세진]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전국 각지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재평가를 위한 움직임 그리고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일제강점기 친일 언론의 잔재는 청산됐을까. 언론의 친일 행적 이야기도 빠질 수가 없죠. 지난 1월 <저널리즘 토크쇼 J> 신년특집 공개방송에 나왔던 시청자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청자분은 조선일보가 일제강점기 일왕 부부를 찬양했던 기사를 인쇄한 종이를 가져오셨는데요. 100년이 지난 이때 언론의 행태와 역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널리즘토크쇼 J>, 오늘 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는 시간 가져보려고 합니다. 먼저 송수진 기자와 정준희 교수님이 일제강점기 시대 언론의 뿌리를 찾아서 다녀온 현장 영상으로 먼저 보시겠습니다.
# 광화문 광장
[송수진] 교수님 오늘 저희가 광화문에서 보는 이유가 있죠?
[정준희] 그렇죠. 우리나라 언론인은 개화기에 시작해서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활동이 됐고 해방 이후로 현재까지 오게 됐는데요. 서울신문, 대한매일신보라고 불렀던 가장 오래 살아남은 신문이고, 대표적인 신문이라고 볼 수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시대 때 창간이 됐기 때문에 이들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면서 한국 언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상적 뿌리랄까? 이런 식의 측면을 같이 이야기하게 될 것 같습니다.
[송수진] 오늘 저희가 교수님의 말씀도 들어보고, 동시에 일제강점기 시대에 구체적으로 언론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한 분을 더 모셨거든요.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실장님. 어서 오세요.
[방학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송수진] 실장님, 우선 민족문제연구소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설명 한 번 부탁드려야 될 거 같아요.
[방학진] 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이라고 하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라고 하는 그런 학술서를 냈고요. 현재도 업데이트 중인데요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있는 언론인들은 44명이 되겠습니다.
[송수진] 그런데 한 가지 또 궁금한 것이 우리가 왜 지금, 이 시기에, 우리 유력 언론사들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살펴봐야 하는 것인지. 그 의의에 대해서 좀 한 번 짚고 우리가 진행을 해야 될 거 같아요.
[정준희] 현재 한국의 지배계층이나 실제로 엘리트 계층이나 주류 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식민적인 역사관, 식민적인 태도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어요. 단순한 어떤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이 100년의 기간 동안 한국을 만들어 오는데 있어서 이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왜 그들이 그런 사고를 가지게 됐고 아직까지 그것들이 철저히 청산되지 못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 현대 역사 어떤 비극을 만들고 있는가. 이런 부분을 짚어 봐야 될 필요가 있다고 분명히 생각을 합니다.
[방학진] 보이지 않는 친일잔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대주의라든지 기회주의라든지 대중추수주의(大衆追隨主義: 인기를 좇아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태도나 경향)라는 거죠.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 물질중심주의 이런 것들인데요. 그런 걸 볼 때 친일청산이 대한민국의 발전, 미래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송수진] 그럼 구체적으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쪽으로 이동하셔서, 어떤 흔적이 남아있는지 한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가실까요?
[방학진] 네. 가보시죠. 네.
[정준희] 네.
[송수진] 교수님 그런데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사)이 한눈에 보기에도 건물 양식이 굉장히 눈에 띄네요?
[정준희] 그렇죠. 식민지 시대 양식이잖아요. 지금 없어진 화신백화점(1931년에 설립된 근대식 백화점)하고도 되게 유사한 그런 모습이었거든요. 지금 근대역사문화를 남기고 있는 되게 중요한 일종의 사적(史蹟)이긴 하죠.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실제로 신문이 찍혀지던 그런 건물이었어요. 조선일보가 저기(옛 조선일보사 본사 터)에서 실제로 윤전을 했었고, (동아일보가) 여기(일민미술관)서 윤전을 했고.
[방학진] 92년까지 사용을 했으니까요.
[송수진]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사가 1926년 12월 전용 사옥으로 지은 건물이다.” 1926년이면 창간 이후 6년 지난 시점. 그 때는 동아일보의 논조가 어땠나요. 교수님?
[정준희] 문화통치(文化統治: 일본이 3·1운동 이후 실행한 식민지 통치 방식. 친일파를 길러 우리 민족의 단결을 억제하고 독립 운동을 막으려는 식민지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이제 시작됐었고 조선의, 동아일보는 일종의 민족자강론, “민족을 약간 바꿔서 좀 더 잘 살게 만들자.” 이런 쪽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창간됐던 대표적인 세 개의 신문사 가운데는 약간은 좀 더 이제 민족적 색채가 있긴 했었어요.
[송수진] 민족지라고 많이 강조를 하는 거 같아요.
[정준희] 그러니까요. 그래서 스스로를 민족지라고 많이 강조를 하죠. 몇 가지 사건도 좀 있긴 있었고.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사실은 일제에 의한 통치의 일환으로 사실 시작된 신문사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죠.
[송수진] 저희가 이순신 동상에서부터 횡단보도 건너서 동아일보 사옥 앞까지 왔는데. 동아일보 하면은 민족지라고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정준희] 조선을 통치하려면 조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되는데 그거를 볼 수 있는 어떤 뭔가가 필요하지 않느냐. 일종의 정보가 필요하지 않냐. 우리가 그걸 해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인의 사고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창(窓)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는 거죠.
[방학진] 3.1 운동 당시에 그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많은 지하신문(당국의 단속을 피해 배포되는 신문)들을 만들어요. 일종의 ‘굴뚝론’인데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이런 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디서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지. 독립운동가들이 어디서 무슨 모의를 하고 있는지 우리 조선총독부가 한 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이제 지하신문을 가지고는 굴뚝을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조선, 동아라고 하는 합법적 공간. 일제 총독부가 허용하는 일정한 합법적 공간을 만들어서 어디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불만이 있는지를 사전에 좀 알아차릴 필요가 있겠다. 라는 그런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되는 것이죠.
[송수진] 저희도 자료를 하나 본 게 기억이 나는데 초반에는 조선총독부가 압수한 기사 목록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건수도 많고.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1940년으로 가까이 갈수록 그 수가 압도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조선총독부의 어떤 구미에 맞는 그런 기사들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더 심화가 됐다는 방증인 것 같기도 한데, 당시 일제시대 당시에 점점 더 그렇게 논조가 친일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적 상황이 좀 있었나요?
[방학진] 가장 중요한 것은 37년 중·일 전쟁(1937~1945년 걸쳐 중국에서 벌어진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 베이징 루거우차오에서 1937년 7월 7일 일본 관동군이 자작극을 벌여 군사적 행동을 벌인 것이 전쟁의 직접 계기이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37년 중일전쟁에 의해서 일본이 그 거대한 중국 본토를 침략하게 되는데 갑자기 중국이, 일본의 입장에서 큰 땅을 얻게 되니까 일본군만으로는 중국 지배하기가 너무 어려운 겁니다. 그 때 바로 많이 활용됐던 것이 바로 친일 언론인, 친일 문학인, 친일 예술인, 친일 종교인, 친일 교육자가 되겠습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조선 청년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요즘에 보면 홍보대사 같은 거죠. 저같이 인기도 없는 사람들이 군대 가자고 하면 안 가겠지만 인기 있는 사람이 청년들에게.
[송수진] (정준희 가리키며) 여기.
[방학진] 그렇습니다. 예.
[정준희] (웃음)
[방학진] 잘생기고 인기 있는 분이 천왕폐하를 위해서 군대 가자고 하면 젊은이들이 가게 되는 거거든요. 거기 앞장선 것이 바로 조선일보, 동아일보라고 할 수 있고 특히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교육자이기도 했거든요. 보성전문학교, 지금의 고려대학교. 교장의 역할, 그다음에 교육자의 역할 플러스 언론인의 역할을 겸하면서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죠.
[정준희] 그러면서 이제 “내가 본토인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 생각을 불어넣는 데 신문사들의 역할이나 언론인들의 역할, 지식인들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는 거죠. 이제 우리가 조선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다).
[송수진] 내선일체. 네.
[정준희] 일본인과 동일하게 살아간다. 실제로 그 동원 시기에.
[송수진] 여기 현수막에 붙어있었던 사진이 있더라고요.
[정준희] 사람들 보고 군대에 가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가 일본인이 되자.’ 라고 사실은 이야기했던 그런 상태였던 거죠.
[방학진] 지금 저기 서울신문이라고 보이지 않습니까? 그 위에 신스(since) 1904년.
[송수진] 1904년.
[방학진] 네, 안 보이세요? 빨갛게.
[송수진] 네, 네.
[방학진] 1904년인데 1904년에는 서울신문이 아니었고 대한매일신보.
[송수진] 대한매일신보.
[방학진] 영국인 기자인 배설(裵說).
[송수진] 배설.
[방학진]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라고 하는데요. 그 다음에 양기탁 선생, 이런 분들이 만드신 이제 항일 민족지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이제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을 빼내고 매일신보가 돼버려요. 매일신보는 뭐냐 하면, 총독부 기관지인데 한글로 된 총독부 기관지입니다. 같은 건물에 뭐가 있었냐면 경성일보가 있었어요. 그건 총독부 기관지인데 일본어로 된 신문이고 또 역시 영문 기관지가 있습니다. 더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라고 하는, 이렇게 3개 신문이 바로 저 자리(현 서울신문 사옥)에 있었어요. 그다음에 해방 이후에 다시 우리가 서울신문이 된 거죠.
[송수진] 실장님, 여기 표지석이 있네요.
[방학진] 네, 여기 창간 사옥 터 표석이네요.
[정준희] 창간 사옥 터.
[송수진] 여기가 창간 사옥 터네요.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사 사옥 터.” “조선일보는 3.1운동 이후 민족 자본으로 이곳에서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족 자본으로 지금 창간했다는 게 굉장히 강조가 된 것 같아요. 실장님, 어떻게 보세요? 민족 자본으로 창간이 된 거 맞나요?
[방학진] 네, 저로서는 되게 불편한 표현인데요. 창간 당시에 그 주체가 되는 단체가 대정실업친목회라고 하는 친일 실업 단체거든요. 그 단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이쇼(大正)라고 하는 그 당시 천황의 이름을 따서 단체를 만들 정도로 대표적인 친일 실업인 단체인데 그 자본을 민족 자본이라고 표현한다는 건 대단히 부적절하죠.
[송수진] 언론학계에서도 민족 자본으로 과연 조선일보가 세워진 게 맞는가에 대해서 좀 문제 제기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요, 교수님.
[정준희] 네, 그러니까 민족 자본이 ‘일본계 자본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민족 자본이라는 의미를 쓸 거냐. 아니면 말 그대로 이제 조선이 근대화 과정에서 기존에 없었던 어떤 민족 고유의 어떤 자산을 가지고 자본화시키는 방식으로 볼 거냐고 했을 때, 이건 민족 자본이라기보다는 매판 자본(식민지에서 외세와 결탁하여 자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토착자본)이었다. 조선의 자산을 팔아먹어서 개인의 부를 축적했던 그런 형태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방학진] 김단야, 임원근, 조선 공산당의 핵심들. 그 당시, 시기에 어떻게 보면 ‘사회주의 신문이다.’ 라고 하면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 조선일보에 열광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만 33년 이후에 평안북도에서 노다지라고 하죠. 금광. 잭팟(jackpot)을 터트린 그 방응모 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죠. 세 번째 주인이 되면서 조선일보는 본격적으로 친일 신문의 길로 일관되게 가게 된 것이죠.
[송수진] 현 조선일보의 사주가, 그러니까 조선일보를 인수했던 방응모 사장의
[방학진] 후손. 족보로 내려오고 있는 거죠. 한국에 조선일보, 그다음에 동아일보는 또 우울한 것이 계속 족보로 계속 내려온다는 것. 그것도 또 하나의 우울한 지점이죠. 개인적으로 제가 또 같은 온양 방 씨여서.
[송수진] 혹시 일가 친척이신.
[방학진] 저희 종친회에서 어렸을 때 이거(조선일보)를 막 의무적으로 구독하게 했던 그런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송수진] 아,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으셨고.
[정세진] 송수진 기자와 정준희 교수님이 일제강점기 시대 언론의 뿌리를 찾아서 광화문에 다녀오셨는데요. 좀 더 자세한 내용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정준희] 우리가 왜 하필 조선과 동아의 친일적 뿌리를 찾으려고 했던가? 이게 첫 번째 질문인데요. 그거는 현재 생존해 있는 영향력 있는 신문들 중에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는 주력 신문들 몇 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조선, 동아, 그리고 서울신문이에요. 그런데, 이 조선과 동아가 스스로를 민족지로 많이 칭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실제 이들이 식민지 시기 때 했던 행동은 민족지라고 말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하는 그런 판단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일제시기에 친일부역적 행동으로 쏠려 갈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부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거고요. 이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제대로 된 혁신이나 개혁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그 부분이 미진했다고 하는 측면, 이걸 얘기하기 위해서 저희가 일종의 기원(祈願)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봤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세진] 장 교수님 어떻게 보셨어요?
[장부승] 우리가 우리말과 글로 신문을 발행하는 것, 그게 어떻게 보면 총독부가 허용해 줬으니까 가능했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1919년 3.1운동 우리 민족의 거대한 힘이 표출된 거 아닙니까? 그런 힘이 표출됨으로써 어떤 공간이 확보되고, 그러한 힘의 뒷받침 속에서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이 가능했던 거 아니냐 또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일본 군대가 완전히 군부 중심의 폭압 정치로 변해가거든요. 그리고 그 영향이 사실은 군국주의의 폭주로 나오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당연히 우리의 영역도 줄어들게 되는데 그걸 우리가 일본에 굴종해가는 과정, 그리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우리의 문화를 지키려고 하는 나름대로의 노력이 있었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저는 그렇게 약간 능동적인 측면을 같이 아울러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송수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10대 ‘궤변’>이라고 해서 이러이러한 것들 때문에 친일 청산이 되지 않고 있다고 밝힌 게 있는데요.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수님 계속 강조하시는 공과론(功過論)이 있습니다. “친일로 한 인간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게 공과론의 핵심인데 그렇지만 “과에 대한 면죄부로 공을 격상해서는 안 된다.”라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김서중] 친일 기사를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탄압이 강하고 그다음에 압력이 강했다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그 시기를 살지 않은 사람의 편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붓을 꺾었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우리가 친일 문제를 보는 데 중요한 시각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당시에 최민지라는 학자가 그 당시를 연구한 책에서 이렇게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인의 삶 향상에만 치중했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논조는 어떤 면에서 보면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당시에 우리는 식민지였고, 우리가 원래 우리의 민족이랑 우리의 국가라는 문제를 고민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라도 표현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요. 저는 그 부분에 굉장히 공감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세진] 언론에 대한 당연한 기대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최욱 씨 굉장히 집중해서 들으십니다. 노잼일 줄 알았는데 빨려 들어가는.
[최 욱] 웃기지는 않는데 들을 이야기가 있네요.
[김서중] 고맙습니다.
[최 욱] 그런데 우리 또 장부승 교수님은 이쪽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하네요. 이해심도 넓으시고.
[장부승] 저는 기본적으로 항상 관대합니다.
[최 욱] 아마 네티즌은 가혹하게 다룰 거예요. 댓글 확인하세요.
[정세진] 일제강점기 시대 그러면 과연 어떤 보도들이 나왔길래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켰는지 구체적인 사례도 두 분이 보고 오셨는데요. 송수진 기자와 정준희 교수가 만나본 현장 함께 보시겠습니다.
[송수진] 저희가 이제 광화문에서 언론사들 한번 쭉 보고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왔는데.
[방학진] 네, 왔네요.
[송수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저희가 당시 일제시대 때 발행됐던 신문들을 볼 수 있는 거죠?
[방학진] 그렇습니다. 조선,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발간된 많은 신문 자료들이 보관돼 있죠.
[송수진]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을 좀 확인하러 가볼까요?
[방학진] 네, 가시죠.
[송수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내용을 한번 보겠습니다.
[방학진] 여기 보시면 이제 동아일보 창간호라고 돼 있고요.
[송수진] 창간호.
[방학진] 네, 창간호라고 돼 있습니다. 동아일보 창간호. 그다음에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 우리가 어떤 취지로 이 동아일보를 이끌어갈 것인지, 어떤 논조로 이 신문을 발행할 것인지에 대한 선명한다는 것이 널리 알린다는 것이죠? 여기 써 있습니다. 1, 2, 3 돼 있는데요.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임을 자임하노라.” 두 번째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세 번째는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송수진]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방학진] 이 문화주의가 어떤 문화주의인지 제가 알 수 없습니다만 1920년에 들어서 문화통치가 되지 않습니까.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뀌면서 거기에 일정 부분 순응하는 듯한.
[송수진] 저기 방금 실장님이 찾아주신 내용 중에서 유명한 얘기가 나오네요.
[방학진] 창간호 바로 다음 페이지를 보면요. “축 동아일보 출판”해서 “천하위공(天下为公: 온 세상은 일반 국민의 것이다), 손문” 돼 있지 않습니까? 그 유명한 쑨원(삼민주의를 주장한 중국 건국의 아버지)이 되겠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의 아버지고 중국을 이제 민주공화제의 나라로 만들었던 쑨원 선생이 직접 친필 휘호를 보내 왔죠.
[정준희] 천하위공이 세상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이런 뜻도 있고요. 저는 사실은 신문이 공기다라고 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으리라고 짐작을 해요. 아까 조선 민중의 입이라고 표현도 했지만 신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권 계급의 도구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도구가 돼야 된다는 의미까지도 저는 해석이 된다고 봐요.
[방학진] 여기 동아일보 1924년 1월 기사인데요. <민족적 경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면에 바로 시작하는 첫 번째 기사로서, 사설로서 비중 있게 다뤄진 글인데요. 바로 춘원 이광수가 썼던 겁니다. 조선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어떤 길은 그냥 일본에게 자치권을 얻어가지고 우리가 2등 국민으로서 내지인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그 비슷한 자치권을 얻자고 하는 것이었는데요. 이 당시 상황이 19년도 3.1혁명 이후 에 임시 정부가 만들어지고 국내 안팎으로 독립의 열기가 대단히 뜨거웠고 그 뜨거워진 열기의 어떻게 보면 부응으로써 동아일보가 만들어졌는데 바로 그 동아일보 지면, 1면에 “우리는 독립할 능력이 안 돼”라고 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얼마나 그 당시에 민중들이 실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송수진] 동아일보에 대해서도 실망하고 춘원 이광수에 대해서도 실망이 컸겠네요.
[방학진] 오히려 동아일보에 대한 실망이 더 컸죠. 왜냐하면 동아일보 불매 운동을 했거든요.
[송수진] 불매 운동까지.
[송수진] 조선일보의 1930년대 기사를 좀 한번 확인해볼까요?
[방학진] 지금 이 기사는 조선일보 1930년 1월 12일 자 1면 기사인데요. 제호 옆에 바로 사설이 있는데, <동요 중인 학생 제군, 책상으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동요 중인 학생이 뭐냐 하면 그 전 해인 1929년도 11월 3일이죠? 광주학생운동, 그 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해를 넘겨가지고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이었는데 그 학생들에게 그렇게 소요를 일으키지 말고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그런 식의 사설을 1면에다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정준희] 광주학생운동은 사실은 우리나라 학생 운동의 뿌리거든요? 우리나라가 유난히 학생 운동의 뿌리가 깊고 오랜 나라인데 민주화 시기에도 결국 핵심 동력이 학생 운동이었잖아요. 그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고요. 학생들더러 돌아가라, 공부해라, 소요하지 말아라, 라는 얘기를 했고 이게 일제강점기 때부터도 이미 있었던 그런 식의 논투인거죠.
[방학진]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거죠.
[송수진] 지금 1940년 조선일보 기사인데 제호 위에 일장기가 있어요.
[방학진] 그렇습니다. 1940년 1월 1일 자 신년호 기사인데요. 특징적인 것은 조선일보 제호 위에 바로 일장기가 있다는 것. 그다음에 당시 천왕폐하의 부부 사진이 이렇게 게재되어 있고요. 그 위에 이제 용 그림이 있으면서 위에 보면 “황기(皇紀: 일본 왕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첫 해로 삼는 일본의 연호) 2600년” 이렇게 돼 있거든요.
[송수진] 황기 2600년.
[방학진] 황기 2600년. 일본 건국 2600년 기념이 되는 해가 바로 1940년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친일적 논설이 시작하게 됐다면 40년도가 되면 노골적인. 언론뿐만이 아니라 전 분야에서. 게다가 전쟁 와중이었고 거기에 더해서 일본이란 나라가 생긴 지 260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이나 식민지 정책, 통치 정책, 침략 전쟁을 홍보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던 거죠. 거기에 적극 부응을 해서 조선일보 제호 위에 일장기, 밑에 보면 방응모의 서명이 보입니다.
[송수진] 교수님 저 신문(조선일보) 1면, 보신 적 있으세요?
[정준희] 되게 자주 돌잖아요. 이 이미지가. 조선일보로서는 아마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역사일 텐데 이게 1회만이 아니라 38년도 1월 1일에도 이제 천왕 사진이 나오고 이미 중일전쟁 이후로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들을 표명했던 것에 상징적인 표현이죠. 황국 신민이 돼서 그 황국 신민으로서의 어떤 역할을 해 나가자 라고 하는 것에 굉장히 완전 일체화된 그런 표현이기 때문에 지워버리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런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송수진] 1940년 1월 1일 신문인데, 그런데 제가 알고 있기로는 폐간 역시 1940년에 이루어지지 않았나요?
[방학진] 네. 네. 1940년 8월에 폐간을 하는데요. 이미 한글로 되어 있는 기관지가 있기때문에 매일신보라고 하는. 매일신보와 같은 똑같은 역할을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이죠. 조선, 동아일보가. 그러니까 굳이 한글로 된 신문이 여러 개일 필요가 없겠다. 이미 매일신보로 충분히 한글 신문으로서 일본의 정책을 알릴 수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더 이상 이제 조선일보라든지 동아일보는 그 역할이 한계가 있다고 보고 폐간을 명령하고 뭐 순순히 응해서 폐간에 이르게 된 것이죠.
[송수진]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특히 민족지를 자임하면서 창간을 했는데 폐간할 때 순순히 폐간을 했다고요?
[정준희] 폐간이 저항의 결과로 폐간이 아니라, 사실은 순응으로 쭉 유지해 왔던 생명을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지니까 사라지게 된 거거든요. 이른바 끈이 떨어진 거고 토사구팽(兎死狗烹: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린다는 뜻)당한 그런 상태라고 볼 수 있고요.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사실은 신문은 폐간했더라도 <조광>이라든가 이런 잡지를 활용해서 친일적 퇴고를 여전히 지속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죠.
[송수진] 지금 저희가 같이 보고 있는 게 폐간을 앞둔.
[방학진] 폐간호입니다. 일제시대 조선일보의 마지막 신문이 되는 것이죠.
[송수진] 조선일보의 마지막 신문이네요.
[방학진] 사설이라든지 방응모의 글을 보더라도, 어디든 저항의 흔적이라든지 저항을 하겠다든지 그 행간 속에서 민중들에게 지금 저항을 해달라든지 라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는 글이죠.
[송수진] 1920년에 같이 창간됐던 신문이 1940년에 같이 폐간이 됐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 조선일보, 동아일보 쭉 언론 활동을 이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정준희] 나중에 이제 해방을 맞고 이제 우후죽순 복간들이 일어나죠. 물론 나중에 용지의 한계 때문에 이런 변동은 좀 있긴 있었습니다만, 여기서 이제 좌우 대립이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고 친일이 이제 친미로 바뀌게 되고, 결국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로 이어지게 되면서 과거의 친일 부역했던 그런 언론이 자신의 어떤 정체성을 탈바꿈 시켜가지고 일종의 ‘꺼삐딴 리’[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과 같은 기회주의자 같은 인물형을 일컬음]처럼 변형이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에는 친미와 독재가 결합된 그런 형태가 친일을 청산하지 않은 세력과 결합이 되면서 결국에는 한국에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고, 여기서 또 한 번의 점프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친일이라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지속적인 지배 세력의 교체와 연관되면서 자신의 위치를 계속 키우는 데에 활용했던 그런 흔적들을 우리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정세진] 동아일보 창간호를 비롯해서 어떻게 논조가 바뀌었는지 일제강점기 시기에 보도된 친일 논란을 일으킨 보도들 살펴봤습니다.
[최 욱] 거기 호칭 같은 것들이 굉장히 불편하고, 몸이 정말 힘들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국의 정부, 자국의 정상도 이렇게까지 극찬하지는 않을 텐데 너무 과도하지 않나. 물론 당시에 저 같은 사람은 겁이 많거든요.
[정세진] 언론인을 안 했겠죠.
[최 욱] 어느 정도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도 이해는 하는데 너무 심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불편합니다, 저는.
[정세진] 그렇게까지 해야 됐나.
[김서중] 식민지가 됐는데 어쨌든 간에 잘 살고 있다, 이런 것도 아니고 “당시 서로 합의해서 더 동양 평화를 위해서 합병을 했다” 이런 식의 표현을 안 써도 되는 걸 억지로 쓰는 있는 것 같은 그런 부분들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거는 이게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이었다.‘ 이런 것의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의 <조광:조선일보가 펴낸 자매지>이라는 잡지에 실린 기사인데요. 사실 <조광>은 조선과 동아가 폐간당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협의해서 자진 폐간했다시피 했는데, 그 이후에도 조광이 살아남은 이유는 법적인 측면이 있지만 <조광>이 또 다른 일본의 선전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체다, 이렇게 본 거죠. 그런데 그게 지금 바로 이런 기사들에서 드러나는 거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어떻게 자리매김 시킬 거냐 하는 것들이 여기에서 왜곡돼서 나타나고 있는 게 보이는 거죠.
[장부승]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웠던 게 제가 옛날에 업무상 북한에서 나오는 노동신문을.
[정준희] 업무상이에요? (웃음)
[장부승] 많이 분석을 했던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 때 노동신문을 읽으면 참 힘들어요. 읽으면 고구마 10개씩 먹어가면서 보는 것 같아. 너무 힘들거든요. 너무 답답해서. 찬양이라든가 미화라든가 일방적인 당의 입장, 이런 게 계속 나오니까. 그런데 오늘 이 1938년, 39년, 40년 이때 나왔던 기사들을 보니까 노동신문 보는 느낌이에요, 지금. 그래서 이걸 보면서 ’아! 독재와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언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런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언론은 사회적인 의견을 가지고 반영하는 창구라든가, 사회적으로 토론이 이루어지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자기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스피커인 거죠, 스피커. 그러니까 군대 팸플릿(pamphlet) 같은 기사들이 나오는 거죠. 참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최 욱] 이해심 넓은 교수님이 봐도 너무 심하죠, 이거는? 교수님이 봐도 이건 너무 심해.
[장부승] 그래도 전 항상 관대하려고.
[최 욱] 이상한 분이네. (웃음)
[정준희] 저는 이것이 탄압이 주가 됐기 때문에 변절이 일어난 것이냐. 아니면 그 탄압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내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냐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적어도 생존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일정한 내적 변화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문필가나 언론인을 보면 알지만, 특히 지식인들이 특히나 그런데요.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매번 거짓말로 써 내려가는 상황을 잘 못 견뎌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절필을 하죠. 이게 저항이라기보다는 못 견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생존을 위해서든 뭐건 뭔가를 계속해서 써 내려간다고 하는 것. 특히 뭔가 이렇게 입에 담기조차 그런 말들까지 했다는 건 탄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내적 변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키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갔다고 보거든요. 그런 표현을 이렇게 보면 ‘지나사변’(중일전쟁)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오직 황공하오신 폐하(일왕)의 보국진충(保國盡忠: 충성으로 은혜를 갚다)을 다한 출전장벽의 무훈이 혁혁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총친화(摠親和)의 대도에 내선일체의 구현으로서 사변 목적 달성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라는 표현들이 나오거든요. 이거는 누가 써줬다기보다는 바로 중국과의 전쟁, 일본이 벌이는 중국과의 전쟁 거기에 조선인이 그냥 조선인이 아니라 완전히 내선일체화된, 즉 일본화된 시각에서 중국을 적대국으로 바라보고 그 다음에 조선인들이 모두 이 안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하는 어떤 시각적 변동의 의미들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단순히 어떤 보도 지침, 탄압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세진] 언론사의 친일 행적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프랑스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예전에 나치 치하에서 언론인들에 대한 청산 잔업에 대해서 굉장히 강도 높게 진행이 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우리 쪽이 반영을 했었더라면, 이런 이야기도 있고 너무 가혹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너무 가혹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정준희] 우리가 친일 청산 문제. 불완전한 친일 청산 문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보통 예로 드는 게 드골(Charles de Gaulle: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 지도자, 군사 전략가로 활동하였고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역임)치하 나치 청산 이슈를 들거든요. 그런데 저는 1:1 비교는 쉬운 문제는 아니고 실제로 약간은 신화화된 측면도 없지 않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참조할 만한 구석들이 있어요. 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나치 시대의 신문을 발행했던 사람들을 잡습니다. 이게 침략자의 선전기구 역할을 했고 자국민의 신문발행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거기서 나치의 논조를 가지고 뭔가를 했다는 거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반민족적 행위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15일 이상 발행했던 신문들을 일단 불법 행위로 기준을 잡고 그다음에 건물 시설의 재산을 몰수하고 새로운 창간 신문사에게 제공하는 상당히 극단적인.
[최 욱] 시원시원하네요.
[정준희] 그리고 실제로 신문사, 언론인 중에서 10명 정도가 처형당했고 투옥당하는 그런 일들까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실 언론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봐도 아무리 잘못해도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심하지 않았나 이런 식의 생각이 들 정도인데. 여기서 중요한 모티브(motive: 어떤 행동의 동기가 되는 제제나 생각)가 그거예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실물적 손해를 끼치는 행동보다도 더 위험한 건 그들의 의식, 그러니까 식민의식을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더 크게 저항을 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서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모티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서중]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잘못했던 것들을 한 번 잘못이었나 아니었나 따져보는 과정이 있었다, 이게 중요하다고 보는 건데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게 없었던 거잖아요. 저는 물리적으로 어떤 결과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에 국민적인 상징과 공감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최 욱] 그러면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우리 언론사들은 어떤 청산은 안 됐던 것 같고 반성이라도 했는지 궁금하네요.
[송수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사례가 좀 다른데요.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자체 진상조사나 아니면 반성 이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최 욱] 없었습니까?
[송수진] 네.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지난 2004년에 과거사법이 통과가 되는데 그때를 전후로 해서 조선일보 자체적으로 과거의 친일 행적에 대한 조사를 벌입니다. 그 결과를 <조선일보 사람들>이라는 책으로 발행을 하는데요. 이 내용들을 보면 주요 내용은 이런 거죠. 그러니까 당시 일제시대 때 우리가 친일을 한 역사는 있다. 그렇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내용입니다.
[정세진] 일단 <조선일보 사람>도 2004년에 나온 거 그 내용 자체에서는 반성보다는 그래도 공(功)을 인정해달라는 얘기가 더 강했다고 평가하시는 거죠?
[송수진] 2004년 <조선일보 사람들>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당시 표현을 보면 “당시 신문사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자선 사업 정도로 인식됐다.” “언론사업이란 수익은 없고 골치만 아픈 사업이었다.” “잡지 <삼천리>는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를 ‘부호의 의미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로 평가했다”고 하면서 방응모 사장의 업적을 칭송하는 그런 입장을 보이고요. <조선일보 사람들>이라는 책에서뿐만 아니라 기사에서도 방응모 사장의 업적을 칭송하기도 합니다. 2017년 6월 24일에 나온 기사를 보면 <방응모·신석우·조만식… 대쪽같던 신문인> 이렇게 업적을 높게 평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 1세기가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신문들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있지만, 서울신문도 있거든요. 그런데 서울신문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은 좀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서울신문의 경우에는 사명(寺名)이 98년에 대한매일로 한번 바뀌게 되는데 이때 일종의 반성문을 싣습니다. 제목이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라는 글을 통해서 이렇게 과거의 잘못을 고백을 합니다. 또 2004년에 <서울신문 100년사>라는 책을 발간을 하는데요. 이때도 1편이 <아! 대한매일신보>였고 그다음에 나오는 2편에서 <식민시대의 기록>. 이렇게 바로 식민시대 때 서울신문이 어떻게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친일 활동을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을 하는 모습들을 보입니다.
[정세진] 그래서 이후에는 서울신문 이야기는 많이 안 나오게 된 거로 파악을 하면 될까요?
[최 욱] 이거 하나 때문에요? 이거 하나 하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까? 왜 이렇게 관대하세요. 이거 하나 정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누가 죽인대요?
[정준희] 그러니까 저는 핵심은 이거라고 봐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공과 과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평가해주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제 이게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개인이나 집단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행위)’거든요. 우리는 한 세력에 의해서 다른 세력이 멸절당하는 그런 식의 경험들을 정치적으로 많이 해와요. 그러니까 생존해야 하는 것들이 반대로 굉장히 크죠. 일종의 매카시적인[※참고: 매카시즘 McCarthyism: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반공사상(反共思想), 요즘은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임. 미국 위스콘신 주(州)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1950년대 미상원 국내치안분과위원장이었던 조지프 매카시(Joseph R. McCarthy)의 이름에서 나온 말]상태에 놓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해방 이후의 상황이 이들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생존이 정말로 문제시 될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 다행히 살아났었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지금 조건상 과(過)를 인정하는 것은 나중에 사면복권될 가능성도 전혀 없이 완전히 죽어버려, 라는 그런 생각이 되게 강하기 때문에 과를 인정하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고, 공은 부풀리는 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이게 사주(社主) 체제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봐요. 그러니까 신문의 역사를 사주 가문의 역사와 동일시하는 거죠. 서울신문은 안 그래도 되거든요. 왜냐하면 대한매일신보 시절은 정당성이 있었고 그다음에 ‘대한’을 빼고 매일신보로 바뀌는 과정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돼버렸고 그다음에 그 뒤로 다시 복간되는 그런 과정에서는 소유 주체나 이런 것들이 사실은 약간은 관적(官的) 소유 주체에서 계속해서 소유돼 왔기 때문에 공영방송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옹호할 사주가 있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정치적 성격이나 상황이 오면 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토대가 있죠. 그런데 조선이나 동아 같은 경우에는 명백한 사주의 가문들이 있고 사주 가문의 어떤 역사를 훼손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최 욱] 그럴 수 있겠다.
[정준희] 그것들을 손대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특히나 사사(社史)를 만드는 행위 같은 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행위잖아요. 그런데 이 사사를 만드는 행위를 실제로 소유주 쪽에서 주도를 하게 돼 있어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선정하고 필진을 만들고 이런 과정을 겪게 되는데 여기서 예를 들면 모욕적인 어떤 일을 드러내고 밝히고 하는 것들을 감히 못 다루게 되는 거죠.
[최 욱] 사사가 회사의 역사입니까?
[정준희] 그렇죠.
[정세진] 자꾸 민족지였다, 항일언론이었다, 자꾸 이런 쪽의 주장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논란을 더 키우는 면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조선, 동아일보. 민족지를 주장하는 기사들 제목을 읽어드리면 2017년 5월 25일 조선일보 <일제, 20년간 기사 압수 471건… ‘어리석은 총독부’ 사설 땐 무기 정간> 이런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요. <특별 기획 3만 호 이으면 지구~화성 거리… “민족의 삶 새겨진 역사의 나이테”>. 그리고 동아일보에서는 2017년 12월 2일 자에 <“윤봉길 의거, 동아일보가 처음 알려”>. 이런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2018년 1월 16일에는 <“동아 보도 보고 청년 독립군이 몰려왔다”>. 2018년 1월 10일 <총칼 대신 한글로 독립정신 일깨우다>. 2018년 1월 17일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얼굴로 지면을 채우다>. 2018년 2월 7일 <“부친 항일기록 찾아준 동아는 큰 은인”>, 이런 제목의 기사들을 실었습니다.
[최 욱] 그래도 생각보다는 공이 많네요.
[정준희] 공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주니까 당연히.
[최 욱] 어찌 됐든.
[정준희] 없지 않다는 얘기죠.
[송수진] 최근에 동아일보 기획기사들을 보면 내년이 창간 100주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획 기사를 시작을 하는데요.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이런 제목 하에 연중 기사들을 내보내는데 핵심 내용은 이거인 것 같습니다. 당시 일제강점기에서 자사의 보도가 독립운동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강조를 하고 있는데요. 최근에 나온 기사 가운데에서 또 어떤 게 있었냐면 1920년 9월 25일 기사인데,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조명한 자사 보도가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보도였다”라고 기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조망한 기사가 나온 것이 1920년이거든요. 1920년은 동아일보가 창간된 첫해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보다도 언론사로서의 어떤 기백이랄까요. 그런 게 강하던 그런 시절에 나온 기사이기 때문에 이것 하나로 동아일보 전체, 일제강점기 시대 전체의 논조를 우리가 파악을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그렇게 보이고요. 그리고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3월 5일부터 지금 100주년 기념 기획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는데요.
앞으로 우리가 조선일보 100주년을 맞아서 어떠어떠한 기획기사들을 내보내겠다고 하는 내용들의 기사만 나와 있는 상태여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로 반성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기 힘든 면이 조금 있습니다만. 2017년 7월 3일에 방상훈 사장이 기념사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그 암흑의 시기에 조선일보에 주어진 민족적 과업은 독립의 밀알을 키우며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만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우리는 과보다는 공 부분이 훨씬 더 부각이 되는 것이 맞다, 이런 시각이 지금 드러나는 것이죠.
[정준희] 이걸 보면 물론 자신의 역사를 쓸 때 부끄러운 거 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른바 사사라는 형식의 뭔가 연간 비슷한 것들을 낼 때 우리 사회에 있는 만연한 태도가 자랑질을 용인하는 태도라는 게 저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기본적으로 사실을 쌓아 올리는 방식도 아니고 그중에 사실의 일부는 상당히 과감히 폐기하고 있고. 그것을 자랑하는 방식의 자신은 언제나 주어로 놓고 되게 낯부끄러운 자랑들을 더해가는 방식을 쓴다는 거 자체가 이것을 국민들로 하여금, 또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의도하는 효과조차 내겠느냐. 저는 그것조차 의구심이 든다는 거죠.
[김서중] 친일 논쟁이 또 한 10여 년 전에 있었어요. 그때 조선일보에서 한때 부탁을 해서 조선일보 일제강점기 기사 중에 친일 관련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기사가 몇 %인지 찾아봐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한 10%라고. 제 기억으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 전후로 나왔다고 했더니 (조선일보에서) 얼마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거를 보고 학교 가서 학생들하고 얘기하면서 “10%가 얼마 안 된다는 게 이게 말이나 되느냐.” 예를 들면, 신문에서는 원래 오보를 안 하는 게 맞는 건데 오보가 10% 된다고 이야기한 거냐 똑같은 거 아니냐, 이런 거죠.
[정세진] 조선일보의 방응모와 동아일보의 창업주 김성수는 지난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가 4년여의 조사 끝에 확정한 1,006명의 친일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포함이 됐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서 굉장히 강력하게 반발을 했습니다. 그 내용 좀 짚어볼까요?
[정준희] 2009년 진상위 조사 결과가 나오고 그걸 발표했을 때 예상 가능한 그런 행동들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로부터 나왔는데요. 그중 흥미로운 발언 중 하나는 조선일보는 “반민특위 활동으로 이미 역사적으로 정리된 사안이다”라는 이야기를 해요. 왜 이렇게 말을 했을까 짐작해보면 반민특위 활동 당시에 자신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기초로 깔고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저는 판단을 합니다. 저는 반민특위 활동은 대부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좌절된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반민특위 활동으로 뭔가가 다 정리됐다고 하는 편의적인 발상이 어디서 나온지 저는 잘 모르겠고요. 두 번째로 이게 핵심이라고 보는데 “정치적인 목적으로 되살려지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요. 저는 이런 식의 이야기는 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늘 친일 문제를 다루는 건 결국은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들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궁지로 몰기 위해서 하는 전략적 행동이라고 보고 실제로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요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인 효과가 나타나요. 그러면 그걸 끊어내려면 자신의 공격을 옹호하고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픈 부분을 끊어내는 또 다른 방식이 저는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수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간다고 하는 거죠.
[정세진] 당시 기사들을 읽어드리면 <외눈박이 친일반민족조사위의 발표를 보고>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는 “김성수와 방응모는 자신의 전 인생과 재산을 민족언론, 민족학교 건립에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수립 6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키고 키운 이들을 친일의 오명 속에 빠뜨려 파묻으려고 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며 누구를 쓰러트리기 위해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설을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인촌 선생 합병 권유, 글과 말은 총독부 기관지가 날조한 것”>.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 결정에 대한 반박. “규명위는 인촌 선생의 경우 두 가지를 문제 삼았다.” “김성수 명의의 학병 권유 글과 말이 게재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촌 기념회는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지와 실린 인촌 선생 명의의 글이나 말은 인촌 선생이 스스로 기고하거나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 두 기관지가 왜곡, 과장, 날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기사들을 실었습니다. 기사들과 언론사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서중] 저는 듣다 보니까 가장 마지막 것이 걸리는데요. 스스로 기고하거나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 두 기관지가 왜곡·날조한 것이다. 만약에 요즘 우리가 어떤 언론사가 내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 그러면 내가 하는 당연한 절차가 있잖아요. 언론사에 전화해서 항의하고. 그 당시에 정정 보도 제도가 있지 않았겠지만 여기에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기사에 나오게 하고 그런 노력을 했을 거라고 봐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게 결국은 그 말에 동의하거나 또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밝힌다는 걸 무서워하는 그런 친일적이거나 일본에 항거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의 행위를 보여준 거잖아요. 그거를 지금 와서 변명한다는 자체가 너무 궁색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장부승] 내가 한 이야기가 아닌데 저건 조선총독이 한 얘기고 내가 한 얘기가 아닌데 ‘왜 항의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냐?’라는 건데 생각해보세요. 그 당시 분위기라는 것이 아까 말씀을 드렸다시피 군국주의, 전체주의, 유신독재보다도 극렬하고 악랄한 것이 당시 일본 군국주의거든요. 일본 군부독재. 나는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다고 가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어떤 상황이 될지 한번 생각을 해보면 그 당시에 저거는 조선 총독이 이야기한 거고 내가 이야기한 게 아니라고 가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쉽지 않은 거라는 점을, 우리가 그 시대의 무게를 생각을 해볼 필요는 있어요.
[정세진] (김서중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김서중] 그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봐요. 저 같아도 그때 못했을 수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반박을 하는 것이) 마땅한 거죠.
[장부승] 마땅합니다.
[김서중] 그런데 그렇게 못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다음에 이게 날조가 된 거라고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웠다”.
[정준희] “미안하게도 못했다.”
[김서중]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못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것이 맞지, 마치 그 쪽(조선총독)에서 내 이름 갖다 쓴 것처럼 표현한다는 건 사실은 다른 데도 아니고. 저는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개인이니까. 그런데 언론에서 만들어낸 문건에 이렇게 표현한다는 건 사실 우리가 저널리즘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하는 게 진실에 기반을 둔다 이런 거잖아요. “나 사실 그렇게 했는데 내 거 아니었는데 그런데 가서 차마 말 못했다. 그렇게 했던 거에 대해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정말 부끄럽다.” 이런 정도의 표현이 나왔어야 하는 것이지. “이건 날조된 거니까 나보고 뭐라 하지 마라.”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욱]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런데, (장부승) 교수님은 두 언론사(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특수 관계자는 아닌 거죠?
[장부승] 특수관계. (웃음)
[최 욱] 왜냐하면 댓글이 가상의 댓글이 제 눈에 보여서 그래요. 전혀 아닌 거죠?
[장부승] 저희 할아버지는 1908년에 태어나셨고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동안 소작농으로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는 뜻으로, 양식이 부족할 때 먹는 험한 음식)로 연명하며 살았습니다.
[최 욱] 그러니까 진정성이 있는 발언이라는 것을.
[장부승] 독립운동을 하지 못했어요. 학교도 못 갔고. 농사를 하느라 바빠서. 하지만 돈 있는 사람들, 힘 있는 사람과 식민지 시대 때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최 욱] 뭐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요.
[정준희] 우리가 한 가지 짚어야 할 건 과거에 조선과 동아가 친일적 행동들을 의지로든 의지가 아니로든 했기 때문에 그 뒤로도 계속해서 친일적 보도를 했을 거라는 건 단순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현대적 사고라는 게 있는 거고 자신들도 부끄러움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노골적으로 친일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바보 같은 행동이죠. 저는 뭘 문제로 삼고 싶냐면 한일 관계라든가 한미 관계라든가 이런 뭔가 이렇게 해외 강대국, 또는 우리가 우방국이라고 생각하는 관계에서 뭔가 삐걱거리는 것이 나올 때. 특히나 우리 정부의 행동에 의해서 삐걱거리는 행동이 나올 때 논조가 명확히 달라지는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거죠. 저는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강제 징용 피해자 판결에 관련된 문제라고 보는데요. 이 부분을 결과가 났을 때 저는 당연히 감성적으로 먼저 터져 나오는 건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오랫동안 잘 끌려왔던 제가 법적으로 판결을 받았구나.” “우리나라 사법권이 그런 판결을 했구나.” 그런 판단이 일단 우선일 것 같은데 대부분 나오는 반응들. 그러니까 문제가 될 수 있는 언론의 반응들 대부분의 형태가 어떠냐면 “한일 관계 문제 생기지 않을까?” “이것 가능할까?” “왜 이렇게 무리한 판결이 나왔지?” 이런 쪽에 대단히 가깝다는 거고. 저는 특히 중요하게 보는 게 바로 <한·일은 북에 맞선 공동운명체, 갈등 해법을 모색해야> 이게 저는 이 시각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결국에는 이들이 한일 관계에 있어서 이 판결보다 더 중요한 걸 한일 관계의 안정성이라고 보는 핵심적인 이유는 뭐냐. 바로 기존의 반공, 지금은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반북인데 이것의 관계에서 한일이 공조를 해야 하고 그래서 북을 몰아붙여야 되는데, 일본하고 어정쩡한 관계를 왜 굳이 만들어서 이와 같은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우려를 내는 그런 방식으로 가고 있다는 거죠. 저는 이것이 바로 한국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이 일부의 보수 언론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화된 식민성이라고 하는 측면들이 드러나고 있는 요소라고 봅니다.
[최 욱] 약간 노예 근성 아닙니까, 그러면?
[정준희] 저는 상당 부분 있다고 봐요.
[김서중] 우리 사회를 이념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배했던 그런 권력과 그들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 이런 것들에 영향을 놓고 본다면 친일을 했던 당시 동아와 조선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당시 지배 권력이 일본 군국주의였던 거죠.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사실 항상 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시기가 훨씬 더 많고. 더군다나 90년 이후는 우리가 언론 스스로가 권력화되었고 권력을 창출했다, 이런 비판을 받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연장선에서 보면 당시의 지배 권력들이 그들의 입지이고. 결국은 항상 기득권이나 지배 권력 쪽에 서 있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속해있었던 언론이 지금도 그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이렇게 평가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정세진] 오늘 <저널리즘 토크쇼 J>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언론의 친일 행각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내년에 창간 100주년을 맞게 되는데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내놓을지 국민들에게 반성의 보도를 내놓을지 주목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세진] <저널리즘토크쇼J>는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유튜브, 팟캐스트 등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으로도 방송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TV가 없는 시청자분들도 저희 프로그램 볼 수 있도록 힘을 쓰고 있는데요. 그 노력의 결과로 시사프로그램으로는 이례적으로 유튜브 채널 개설 1년도 안 돼서 구독자가 1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유튜브 채널 10만 명 돌파. 이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해주시죠. 최욱씨.
[최 욱] 제 유튜브가 5만도 안 됩니다. 굉장한 성과고요. 이제 첫발을 내딛었다고 봅니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요. 소통하는 방송 <저널리즘 토크쇼 J> 더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서중] 다양한 시청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는 건 굉장히 의미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널리즘 토크쇼 J>가 잘 되길 바랍니다.
[정세진] 장 교수님도 축하.
[장부승] 다양한 플랫폼 덕분에 일본에 있는 아는 분들, 친구들이 아주 잘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세진] 중국만 빼고는 다 볼 수 있는 거죠?
[장부승] 중국은 못 보나요?
[정준희] 중국은 우회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정세진] 교수님 어떤 의미를 갖는 건가요?
[정준희] 저는 10만도 중요하지만 이게 구독자라는 게 중요하거든요. TV를 보는 시청층의 성향과 유튜브를 구독하는 것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구독자라고 하는 건 굉장히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일종의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그런 성과로써 충분히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또 이렇게 발전하는 게 그냥 발전하는 게 아니라 계단식으로 가거든요. 그래서 일정 규모로 커졌다가 또 유지됐다가 또 커졌다 하는 식으로 가는데 저는 그런 면에서 한 단계를 넘어간 굉장히 의미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 욱] 10만 중 8만은 제 덕이 아닌가. 고마워요.
[정세진] <저널리즘 토크쇼 J> 오늘 저희가 준비한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방송은 KBS 1TV, myK, pooq, 유튜브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언론의 관행은 여러분이 바꿀 수 있습니다. 다음 주도 일요일 밤 10시 30분에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9-3-10> KBS NEWS
☞기사원문: [저널리즘 토크쇼J] ‘민족지’ 조선·동아, 100년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