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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몰라라’ 일본 앞에 해결 요원한 한국의 가장 오래된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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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제주 KAL호텔에서 ‘국제 인권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국제 심포지엄이 제주4·3 기념사업위원회 등의 주최로 열렸다. 심포지엄에서는 국제 인권 기준에 비추어 한국의 과거사 청산의 한계와 성과를 짚어 보고 향후 한국의 과거사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됐다.

1. 유엔 특별보고관이 말한 과거사 청산에 필요한 몇가지
2. ‘나 몰라라’ 일본 앞에 해결 요원한 한국의 가장 오래된 과거사
3.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4. “말뿐인 사과 필요 없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토해낸 울분

일제 강점기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80여 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고령으로 끝내 사죄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위안부, 강제동원으로 대표되는 일제 강점기 국가폭력 사건들은 과거사 청산 작업에 있어 시급한 문제로 꼽히지만, 일본이라는 벽에 부딪혀 성과보다는 한계가 많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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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에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조문을 하며 “왜 갔어 안간다고 했잖아”라며 고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지난 19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주최로 열린 ‘국제 인권 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국제 심포지엄에서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첫 번째 세션 ‘한국의 과거사 청산, 한계와 성과’ 중 ‘청산되지 않은 대일과거사 문제와 피해자들의 인권’에 대해 발표했다.

조 연구위원은 이날 특별 초청된 파비앙 살비올리(Fabian Salvioli) 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 방지 특별보고관을 언급하며 “그의 직무에 긴 이름이 붙은 것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전환기적 정의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 국제사회가 진실, 배상, 재발 방지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사에 관한 유엔의 기본원칙은 2005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 제60/147호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갖는 인권목록을 제시하는데, 크게 ▲진실을 알 권리 ▲정의를 실현할 권리 ▲배상 또는 피해구제를 받을 권리 등으로 나뉜다고 조 연구위원은 말했다.

대일과거사 피해자들의 진실을 알 권리에 대해 그는 “일제와 기업이 생산한 관련 기록의 확보와 생존 피해자들의 증언 청취가 필수적이지만, 일본 정부는 식민지통치와 관련된 자료를 부분적으로만 제공했을 뿐이다”라며 기록이 반환되지 않아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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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주최로 ‘국제 인권 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국제 심포지엄이 제주 KAL호텔에서 진행됐다. 첫 번째 세션 ‘한국의 과거사 청산, 한계와 성과’에 이상희 변호사의 사회로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 김세은 변호사가 발표했다. [2019.03.19ⓒ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그러면서 “국제법상 식민지통치자료는 넘겨줄 것이 요구된다”라며 “기록 반환의 문제는 역사자료의 문제만이 아니라 빼앗긴 사람의 목숨과 재산 못지않은 인권의 요청”이라고 덧붙였다.

정의를 실현할 권리에 대해 조 연구위원은 “올바른 재판을 받을 권리”라고 설명하며, 특히 배상 또는 피해구제를 받을 권리에 대해 “배상은 금전배상뿐 아니라 사죄, 추모, 재교육 등 책임 있는 조치와 사회복귀, 재발 방지 보증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건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됐다. 조 연구위원은 “이러한 민사 소송들은 대일과거사문제가 단지 민족 감정의 문제라거나 역사적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구제와 관련된 법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국가와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판결만을 내렸다. 국가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법리(국가무답책), 소송제기와 필요한 기간의 경과 또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 권리 해결 등이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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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신조(安倍晉삼) 일본 총리가 14일 자위대의 날을 맞아 도쿄 북쪽 아사카(朝霞) 육상자위대 훈련장에서 관열식을 갖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훈시에서 “모든 자위대원이 자부심을 갖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정치인의 책임”이라며 헌법 개정에서 자위대를 명기하는 것에 대해 거듭 의욕을 나타냈다. 2018.10.14ⓒ사진 = 뉴시스

2000년대 들어서 일본 소송에서 패소한 피해자들은 한국법원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이어갔다. 위안부, 원폭 피해자들은 2011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국정부의 부작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현재 이 합의는 헌법소원 사건으로 계류 중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2015년 7월 미국법원에 일본을 상대로 제소했다. 그러나 ‘국가는 동의 없이 외국의 법정에 서지 않는다’고 규정한 국제법에 따라 소송 자체가 봉쇄됐다. 피해자들은 한국법원에서 소송을 이어갔으나 일본 정부는 헤이그 송달협약을 근거로 주권 침해라며 소장의 접수조차 거부하고 있다. 지난 3월 한국법원은 해당 사건에 대해 공시송달 명령을 내렸다.

피해자 권리 구제할 법원이 오히려 ‘재판거래’로 또 인권침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사건은 대일과거사 청산 작업에 있어서 뚜렷한 성과와 한계를 보인다. 2012년 5월 대법원은 원고 패소로 판결한 하급심을 뒤집고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용하는 취지로 판결했다.

이에 조 연구위원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이고 강제동원은 반인도적 불법행위라고 판단해 피해구제의 길을 열었다”라고 평가했다. 해당 판결로 후지코시 회사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피해자 등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이 줄을 이었다.

이후 파기환송심이 대법원판결에 따라 일본 기업에 위자료 1억 원을 각 피해자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하자, 이에 불복한 일본 기업은 상고를 제기했다.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간 지 5년 후인 지난해 10월 피해자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조 연구위원은 “마침내 강제동원 피해가 사법부에 의해 인정됐다”라며 “이 판결로 좁게는 강제동원에 공모한 일본 기업의 책임이 확정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 일본의 국가 책임도 법적으로 확인됐다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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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구속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사법 농단 수사 과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이 과거사 사건들을 재판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강제동원 사건은 그중에서도 대표적 사례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양승태 대법원은 상고법원 신설, 법관의 해외 파견 등 협조를 얻기 위해 청와대·외교부 요청대로 해당 사건 재판을 장기간 지연시켰고, 판결의 결과를 바꾸기 위한 시도를 했다.

재판이 지연되는 사이 애초 4명이었던 이 사건 원고들은 세상을 떠나 결국 1명의 원고만이 최종 선고를 지켜봤다. 유일한 생존 원고인 이춘식 씨는 “기쁜 날인데, 혼자만 남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며 선고 내내 눈물을 흘렸다. 대법원의 해당 사건 판결 선고 전까지 후속 소송을 제기한 총 14건의 강제동원 소송 절차도 멈춰 있었다. 그 사이 고령인 다수의 원고는 끝내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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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승소 판결이 내려진 30일 오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 할아버지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슬찬 기자

강제동원 피해자를 변호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세은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권리를 구제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법부가 오히려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재판 받을 권리라는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했고, 중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들이 실효성 있는 사법적 구제를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새로운 인권침해를 저질렀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법원은 피해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나 배상, 온전한 피해구제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꼬집었다. 법원이 판결을 바로잡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법원에 의한 새로운 인권침해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 차원에서 과거사 청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거래라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사회를 맡은 민변의 이상희 변호사는 “법원 차원에서 과거 권력에 부역했던 진지한 사과가 없었다. 그런 사과 없이 양승태 체제에서 사법 농단이 진행됐다”라며 과거사 청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피해구제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조 연구위원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고려 중인 (강제동원) 생존자와 가족들이 많다”라며 “국가가 나서서 피해자를 찾고 지금 소송을 제기하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강제동원 관련 대법원의 판단에 극도로 반발하는 일본 정부에 대해 그는 “피해자 권리를 다시 침해하는 행위”라며 “명백한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번 판결로) 한일 경제갈등까지 이야기되고 있지만, 양국 정부가 배상 문제에 대해 평화적 분쟁 해결 절차에 따라 마무리 지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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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 대법원장이 1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국정감사에 참석해 눈을 감고 있다.ⓒ김슬찬 기자

법원이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 변호사는 “재판거래 등이 가능했던 과거 사법행정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라며 “개혁의 핵심은 대법원장이 가진 제왕적 권한의 분산과 법원행정처의 실질적 폐지”라고 강조했다. 최근 김명수 사법부의 개혁안에 대해 그는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은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고 법원행정처는 법원사무처로 명칭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대법원에 재판거래 진상규명, 재판거래 당사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 재판거래의 결과 제거, 재발방지대책 마련 등을 요구했다. 또 정부에 국민 중심 사법개혁기구 구성할 것을, 국회에 재판거래 연루 법관에 대한 탄핵 소추안 결의를 촉구했다.

<2019-03-21>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나 몰라라’ 일본 앞에 해결 요원한 한국의 가장 오래된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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