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배재대 이승만 동상에 대해 니들이 떠들 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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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소동

 

배재대 이승만 동상은 1987년 2월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항쟁 과정에서 재학생들에 의해 철거됐다. 이후 1990년 2월 학교 측이 동상을 재건립 했으나 학생들이 달걀과 페인트를 끼얹으며 철거운동을 계속하자 1997년 자진 철거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8년 6월 5일 학교 측은 건국 60년을 기념한다며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대학총동창회와 총학생회가 함께 재건립을 추진했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끊임없이 동상 철거를 요구해 오고 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 동상은 총동창회에서 건립한 것으로 학교가 철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동상 철거 건은 학교가 협상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 학교측에서 세운것도 아니고 배재대 졸업생 동문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을 니들이 왈가불가 왜 시비거는 거냐고. 배재대 학생들끼리 훼손하고 철거하고 다시 세우고 하는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재학생들의 의견 개진 과정이니 이해 하겠는데.. 일부 시민단체등 왜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 간섭질인거지. 남의 집에 걸려있는 초상화 걸어라 마라 지적질 해대는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동상, 기념관, 학술상, 기념상 등 친일인사 기념사업 수두룩

대학가 친일동상 · 기념관 · 장학금 현황

– 경북대 : 사범대 건물 내 박정희 안면 부조

– 고려대 : 김성수(호 인촌) 동상, 인촌기념관

– 단국대 : 홍난파(호 난파) 흉상, 난파 기념 음악관

– 덕성여대 : 송금선(호 남해) 남해 장학금

– 동덕여대 : 조동식(호 춘강) 춘강학술정보관(도서관). 춘강장학금 

– 동의대: 김임식 동상, 기념관

– 상명대 : 배상명(호 계당) 서울천안 흉상, 계당 기념관, 계당 장학금

– 숭실대 :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 흉상

– 서울대 : 장발 동상 (미대 앞) / 현제명 동상 (음대 앞)

– 서울여대 : 고황경(호 바롬) 바롬 교육관, 바롬 장학금, 바롬인성교육, 바롬하우스

– 서울예대 : 유치진(호 동랑) 반신상, 동랑 청소년 연극제

– 성균관대 : 600주년 기념관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 성균관대 총장 명패)

– 성신여대 : 이숙종(호 운정) 이숙종 동상, 운정그린캠퍼스, 운정관, 운정장학금

– 연세대 : 백낙준(호 용재) 동상, 용재관, 용재상, 용재석좌교수 / 유억겸 기념관 

– 이화여대 : 김활란 동상

– 인덕대 : 박인덕 전신상 

– 전북대 : ‘덕진 공원비’ 친일파 박기순의 공적을 기린 비석

– 중앙대 : 임영신(호 승당) 영신관(단과대), 임영신 동상(좌상), 영신기념관(음대, 안성), 승당 임영신 장학금

– 추계예술대 : 황신덕 학교 입구 쪽 전신상, 황신덕 장학금

– 한국외국어대 : 김흥배 동상 (글로벌캠퍼스)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대표적인 것이 대학 사회다. 해방 전후에 설립된 대부분의 대학에 친일 인사들이 자리를 잡거나, 종래의 대학 운영권을 유지했다. 

예컨대 해방후 서울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이춘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기독교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기독교인이다. 이 밖에도 고려대학 총장을 역임한 유진오, 연세대학의 백낙준, 이화여대의 김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성신여대의 이숙종, 상명여대의 배상명, 서울여대의 고황경, 중앙대학의 임영신 등 이들 대학 설립자나 총장, 이사장을 지낸 이들은 조선임전보국단등에 가입한 친일 대부들이었다. 덕성여대의 송금선도 마찬가지로 1급 친일 부역자였다.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서울대 (경성제국대학) 출신과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친일인물 12명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성균관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 총장 명패에서 확인할수 있다.

 

동아일보 창립자이기도 한 김성수는 1938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자 이사였고,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면서 친일행위를 했다. 이후에도 흥아보국단 결성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했다. 그러나 고려대에는 김성수의 동상 뿐 아니라 그의 호를 딴 ‘인촌기념관’을 두고 있으며, 같은 재단의 중앙고등학교에도 김성수의 동상과 인촌기념도서관이 있다.

 

친일 부역했던 매국노 동상들이나 대학에서 철거해라. 

친일 매국노 대학들이 매국노 행위를 기리며 친일파 동상, 단과대, 호딴 장학금 퍼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 한미도 못 꺼내는 녀석들… 

2019년 3월 1일은 광복된 날을 기념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광복 100주년 아직도 남아 있는 대학의 일본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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