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정율성의 연안송을 듣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1919년 11월 중국 길림시 중국인 반(潘)씨 성을 가진 집에서 단장 김원봉을 비롯한 13명의 투사들이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그후 의열단은 여러 차례 변모하면서 1932년 남경에 조선혁명정치군사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다음해, 이곳에 자신을 단단한 독립투사로 만들기 위한 청년이 입학하였다. 바로 정율성이다. 중국의 국민가요 <연안송>을 만들었으며, 정식 군가인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그는 지금도 한중 간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정율성, 연안으로 가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베이징 근교 노구교를 공격하면서 중일 전쟁은 본격화됐다. 항일의 전세가 전 중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정율성은 이즈음 연안행을 결정한다.
정율성이 연안행을 택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음악적 요소이다. 본명인 정부은을 ‘율성(律成)’으로 바꿨다. 말 그대로 음율을 이룩하리라, 강한 의지가 반영된 이름은 평생 그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는 ‘조국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음악이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정율성의 연안행은 이러한 이유로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친매부였던 박건웅은 개인적 차원의 한중연합이 아닌 상설기관을 통한 통일적 계획 속에 항일전쟁 수행을 역설했는데 이것이 정율성의 연안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7년 9월 하순 상하이의 전쟁 형세가 위급하자 정율성은 난징으로 갔다. 김성숙의 부인 두군혜(杜君惠)는 정율성에게 혁명음악가로 알려진 이공박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공박은 정율성의 음악적 재질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연안으로 가는 길을 알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협은 그에게 팔로군 서안판사처 주임 임백거에게 보내는 소개신 한 장을 써주었다.
1937년 10월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메고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바로 섬북공학에 진학한 정율성은 3개월 과정을 이수한 후 노신 예술학원에서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에서 정율성은 님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을 만나게 된다. 당시 김산은 일제에 의한 연이은 체포와 석방으로 건강이 악화됐는데, 연안에서 요양하면서 점차 건강을 되찾자 군사위원회 간부특별학급에서 강의요청을 받기도 했다.
연안의 노래를 만들다
정율성은 노신 예술학원에 다니면서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연안송을 작곡하였다. 연안의 보탑과 항일군정대학 학생들의 합창 소리 등이 어우러진 ‘혁명의 성지’ 연안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던 정율성은 여학생 막야(莫耶)에게 시를 부탁하고 자신이 곡을 붙여 연안송을 만들어냈다.
夕陽輝耀着山斗的塔影(연안 보탑산 위에 노을이 불타오르고)
月色映照着河邊的流螢(강변에는 달빛이 흐르네)
春風吹遍了坦平的原野(봄바람은 들판으로 불어 오는데)
群山結成了堅固的圍屛(산과 산들이 철벽을 만들었네
啊 延安 你這莊嚴雄偉的古城(아 연안 장엄하고 위대한 도시여) *이하 생략
연안송은 혁명의 도시 연안의 웅장함과 항일, 연안의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다. 정율성은 척박한 연안의 모습과 열악한 중국공산당 근거지를 동경과 서정이 가득한 낭만의 도시로 연안송을 통해 묘사하였다.
연안송은 팔로군뿐만 아니라 연안에 모여 드는 젊은 청년들에게는 감로수와 같은 존재였다. 연안송은 당시 한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혁명의 노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부주장이었던 최채 역시 연안송을 부르면서 뜨거운 항일의지를 불태웠다고 하였다.
연안송을 작곡한 정율성은 가수 당영매와 함께 중앙대례당에서 음악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마오쩌둥도 참석했다. 그들이 부른 연안송은 바로 항일과 혁명의 노래로 각인되어 전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부인 정설송의 말처럼, ‘정율성과 나는 자기 조국에 대한 피끓는 사랑’ 함께 느꼈으며, 이것이 연안송의 작곡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1938년 8월 경 노신 예술학원을 졸업한 정율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감수성과 정서를 완벽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한인의 정서를 유지하면서 혁명가요 제작에 전념했다. 주덕해를 비롯한 한인 청년들이 연안으로 들어오면서 정율성은 중국혁명과 조국독립이라는 명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독립운동과 중국의 노래를 작곡하다
정율성은 1939년 1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5월 정식당원이 되었다. 당시 섭이와 선성해(冼星海) 등 작곡가들의 특징은 합창곡을 많이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정율성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항일군정대학에서 합창단을 지휘하며 대중적 음악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8월 시인 공목(公木)을 찾아가서 ‘팔로군대합창’을 시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선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공목은 자신의 전투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가사를 완성했다.
공목의 작시를 받아든 정율성은 9월경에 작곡을 완성하였으며, 1940년 초 연안중앙대강당에서 팔로군대합창을 초연하였다. 총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대합창에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불린 팔로군행진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의 전통음악과 비슷한 한국음악의 요소를 잘 조화해 낸 창착물인 팔로군행진곡은 전투적 기상과 민요풍이 농후한 작품이다. 특히 중간 부분에서 모두 위로 돌진하는 신호식 곡조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연안송의 서정적인 감성과 강한 전투적 체제를 갖추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이처럼 정율성의 노래는 연안뿐만 아니라 해방구를 뛰어넘어 전 중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정율성의 노래가 지닌 생명력의 깊이와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정율성의 노래는 생활하고도 직결되어 있었다. 1942년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이동하여 생활할 때 당시 척박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조선의용군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미나리 타령> 같은 노동요도 만들었다. 조선의용군 여성대원인 이화림이 정율성에게 가사를 주고 작곡을 부탁해서 탄생한 곡이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에 찰찰 넘치누나
이 노래는 한국 민요인 <도라지타령>을 모방한 노동요다. 정율성은 태항산을 근거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조선의용군들의 힘든 처지를 노래를 통해 대변하고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용군들은 나무껍질과 산나물을 먹으면서 항전의지를 불태웠다”는 장향산(張香山)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태항산에 주둔한 조선의용군에게는 항상 기아의 그림자가 엄습하였다. 따라서 정율성의 노래가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위안이 되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의열단 100년을 기억하다
70여 년 전 연안에서 중국 혁명가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연안송은 중국의 국민가요로 한 때 애창되었던 노래다. 해마다 10월 1일 중국의 국경절 행사 때 들리는 노래가 바로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 인민해방군가>이다.
한반도의 남부 지방인 광주에서 태어나 전주의 신흥중학을 다닌 정율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했지만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의열단 창설 100년을 기념하면서 정율성을 잠시나마 소환해서 기억하는 것이 그에 대한 작은 예의가 아닐까 싶다.
<2019-04-26> 프레시안
☞기사원문: 중국 혁명성지, 연안에서 만난 조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