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국은 하나다

1166

[추도사]

조국은 하나다

 

1975년 4월8일 학생운동조직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돼 구속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상고심 공판에서 민복기 대법원장이 8명 사형, 무기 9명 확정판결문을 읽고 있다.
이수병 등 8명은 이튿날 아침 4월 9일 전격 사형당했다. <보도사진연감>

 

경애하는 4.9통일 8열사 선생님―서도원 열사님, 도예종 열사님, 송상진 열사님, 우홍선 열사님, 하재완 열사님, 김용원 열사님, 이수병 열사님, 여정남 열사님!
영령들이시여! 저승의 세월도 이 속세에서처럼 유수같이 흘러가나요? 저승으로의 행차 날짜가 같으시니 오늘로 이제 만 44살이 되셨겠군요. 얼마나 통탄스러운 긴 44년이었습니까!
그동안 여러 열사님들의 뒤를 이어 시차를 두고 그곳으로 떠나신 분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석구 선생, 이재문 선생, 전재권 선생, 유진곤 선생, 조만호 선생, 정만진 선생, 이태환 선생, 이재형 선생, 나경일 선생, 이성재 선생님 모두 10열사님이 가셨으니 이제 열여덟 열사님의 영령이 이 자리에 함께 하셨겠군요.
여기 소생 몸과 마음 가다듬어 정중히 인사 올립니다.

1975년 4월 9일, 그때 34살이었던 저가 어언 78살이 되었습니다. 기자촌에 살던 저는 버스로 서대문구치소 앞을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지나다녔습니다. 열사님들이 가시기 불과 1년 전인 1974년에 저가 문학인 간첩단 사건으로 갇혔던 곳이라 남들은 얼굴도 돌리기 싫어한다지만 저는 지날 때마다 그곳을 찬찬히 살피곤 했답니다. 여전히 그곳에는 존경하는 여러 선배님들과 동지와 후배들이 울분을 토하며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투쟁을 이어가던 때여서 그랬습니다.
1974년 봄, 그때 저는 서대문 구치소 5사 하 8방에 있었습니다. 방 구조가 다리를 뻗는 쪽이 복도고, 머리를 두는 쪽 위가 화장실이었지요. 그 화장실에서 마주보이는 4사 아래층에 서도원 선생이 계셨습니다. 4사 맞은편은 3사였고, 거기에는 저와 공범인 문인 간첩단 사건의 이호철 선생이 계셨는데, 바로 거기에 도예종 선생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재판 때 출정하며 이호철 선생과 저는 우리 자신들의 사건 이야기보다 인혁당 여러 선생님들이 당하셨던 고초, 식민지 시대의 일제 악질 특고보다 더 잔혹한 고문을 화두로 삼아 박정희의 폭정에 격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화장실의 악취도 참아가며 고함을 질러야 말소리가 들릴 정도인 데도 서도원 선생님과 안부와 동정을 주고받던 때가 꿈처럼 아련합니다. 다들 독방에 갇힌 처지로 워낙 특별한 감시가 심해 긴요한 대화가 불가능했지만 “식사 많이 하세요, 건강하십시오, 힘내십시오.” 따위의 큰소리를 질러도 괜찮은 싱거운 인사는 맘 놓고 반복했습니다.
그 홍역 같은, 지옥보다 못한 시절의 봄날이 지나고 여름이 와서 교도소 마당의 미루나무 잎이 무성해질 무렵에 저는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 이게 서도원 선생을 비롯한 8열사와의 지상에서의 마지막일 줄이야 미처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 엉성한 공소장으로 인간의 생명을 어찌 앗아갈 수 있습니까!
1975년 4월 9일, 그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살인죄를 저지른 박정희 정권은 한 달 뒤인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합니다. 이후 4년 6개월 동안 1천여 명의 반 유신 투사들을 가둬 고초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박정희는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평등한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탄압했고, 제2차 인혁당 사건은 유신독재 탄압의 기제로 긴급조치 1호부터 9호까지를 강제하고자 저지른 국민 협박용이었습니다.
그 긴급조치 9호 아래서 민주화운동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열사님들의 동지이셨던 이재문선생이 남민전 활동을 하신 건 익히 아시리라 봅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를 그대로 실천하신 이재문 선생의 활약상은 별명을 붙인다면 제3차 인혁당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여러 인연에 얽혀 거기에 몸을 담았던 저는 1979년에 다시 투옥당해 서대문과 광주 교도소를 거쳐 대구교도소로 이감 가서 전창일, 유진곤 선생을 비롯한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투옥 중이셨던 여러 선후배님들과 실로 감격적으로 해후했습니다.
열사님들이시여! 오랜만에 뵙고 이런 한가한 추억담만 늘어놓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열사님들이 그리도 오매불망 염원하셨던 한반도 평화 정착의 실현 가능성을 바로 목전에 둔 올해는 3.1혁명 1백주년입니다. 남북이 화해, 평화를 간절히 실현하고자 하는 데도 미국과 일본이 자신들의 옛 버릇을 개과천선하지 않은 채 여전히 어깃장을 놓아 남북 민족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통일뉴스〉가 전해주는 기사에 따르면, 하노이의 조미회담이 공동선언 없이 끝나자 “유독 일본 반동들만은 마치 고대하던 희소식이라도 접한 듯 박수를 쳐대며 얄밉게 놀아대고 있다”며, “이전부터 이번 하노이회담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본 것들이 놀아댄 못된 짓거리들을 보면 우리 행성에 과연 이런 개종자들도 있는가 하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간특한 속통에 가득 차 있는 먹물을 깨끗이 토해내지 않는 한, 과거 죄악을 충분히 배상하고 군사 대국화의 날개를 접지 않는 한 우리와 상종할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라고 경고도 했답니다.
“주목할 것은 아베가 조미관계 개선의 흐름을 가로막기 위해 ‘납치문제’는 물론 완전한 비핵화에다 생화학무기, 미사일 등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강하게 주장해왔는데 이것이 미제국주의의 화신 같은 존재인 존 볼튼과의 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어 “지구상의 200여개 나라의 수반들 가운데서 회담결과를 놓고 ‘환호’한 사람은 아베뿐이라고 〈로동신문〉은 지적했는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세계 언론들 가운데서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인것은 유독 일본뿐이었다”고 꼬집었습니다.
트럼프는 트위터에다 “아주 중요한 정상회담을 위해 베트남으로 간다.”라면서 “완전한 비핵화로 북한은 급속히 경제강국이 될 것”이라고 했답니다. 자기 돈주머니를 열지 않고 생다지로 입놀림만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이골이 난 제국주의적 수법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있습니다.
3.1혁명 백년을 맞이하며 그동안 민족자주성을 지키고자 끊임없이 투쟁해온 남과 북은 결코 미국과 일본이 지난날 저질렀던 제국주의적 기만술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듣기 좋은 말로 ‘편안히 안식하십시오’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저는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땅 위에서 투쟁하셨듯이 그곳에서도 우리 민족을 위해 싸워주십시오’라고 정중히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 땅은 열사님들이 싸우셨던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민주화와 통일의 길로 가까이 다가섰습니다만 아직도 친일 반민족 세력과 자유당과 5.16군부 쿠데타와 유신의 쓰레기들이 우리의 길을 막고자 방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인 승리는 눈앞에 다가왔지만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투쟁의 대열에서 열사님들의 그 뜨거운 투지가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끝으로 남민전 투사 시인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의 한 구절을 올립니다.

조국은 하나다 / 이게 내 외침이다 /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 남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버젓이 / 조국은 하나다.// … // 압제와 착취가 꾸며낸 새빨간 벽 /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 조국은 하나다.

분단 74년, 열사 가신 지 44년을 맞아
삼가 임헌영 올림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