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25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구소를 성원하고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온 박영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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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5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구소를 성원하고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온 박영환 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4월 2일 11시 연구소 회원 중 최고령인 박영환 회원(92세)이 연구소를 방문해 인터뷰에 응했다. 거동이 약간 불편할 뿐 연세에 비해 정정하고 과거의 일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어 인터뷰가 무난히 진행되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상근자들을 격려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을 전달하였다. 박영환 회원은 1995년 가입한 이래 지금껏 빠짐없이 회비를 내주었고 서울남부지부(예전의 서울관악동작지부) 고문을 맡아 지부에서 추진한 박흥식·김석원 동상 철거 촉구 시위 등 친일청산 활동에 앞장서 왔다. 박 회원께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건강하시길 빈다.

문 : 일제시대 학교 다닌 이야기를 말씀해주세요.

답 : 1928년 경기도 장호원에서 평범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어요. 장호원심상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2년도쿄로 건너갔어요. 20살 터울의 큰형님이 도쿄에서 토목일을 하고 있었어요. 큰형님 댁에 얹혀살면서 도쿄부립 8부중학교에 다녔어요. 1945년 8부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복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죠. 일본 유학 생활 때 가장 기억나는 것은 형님집 근처 슈퍼마켓의 주인 아들과 교류한 거였어요. 그 일본인 학생을 통해서 당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경제학자가 쓴 <빈곤의 철학>이란 책을 했어요. 그 책을 통해 자본주의 하의 빈부 격차, 노동착취 등 사회문제에 눈뜨게 되었어요.

문 : 해방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하셨나요.

답 : 해방 직후 우리집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어요. 친지의 권유로 1946년 5월경 신설되어 전액 국비로 운영되는 철도고등학교1에 지원했어요. 250명 정원인데 전국 각지의 수험생이 몰려들어 5천 명이 시험쳤죠. 인기 학과였던 업무과에 30: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어요. 3년 동안 철도고등학교에서 철도 업무를 익힌 후 덕정역 역무원으로 첫 발령을 받았지요. 이후 근무성적이 좋아 철도청 본청 사무관으로 승진했어요.


1 철도고등학교 연혁: 1945년 10월 중앙교통종사원양성소, 1946년 5월 운수학교, 1949년 6월 교통학교, 1951년 9월 교통고등학교, 1967년 3월 철도고등학교로 명칭 변경. 1977년 3월 철도전문학교로 개편되면서 철도고등학교는 전문학교 부설로 되었으며 1986년 2월 28일 폐교되었다.


문 : 1950년 6.25전쟁 때는 어디서 복무하셨나요

답 : 원래 철도사업이 국가기간산업이라 철도공무원은 군대가 면제되는데, 6.25 때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철도공무원들도 징집되었죠. 대구훈련소에 가서 1주일가량 훈련받은 후 총기의 분해 조립이 가능하면 자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장마 때 산악 지대에 있는 부대에 배속되어 어려움이 컸죠. 산속이라 그런지 포성소리가 커서 고막이 떨어질 지경이었어요. 그러다가 1951년 5월 6.25전쟁 기간에 대승으로 손꼽히는 용문산전투에 참전합니다. 중국 인민군 3개 사단이 양평군 용문산 일대로 남하해왔는데 우리 제6보병사단이 그들의 공세를 격퇴하고 패잔병을 화천 저수지(현재의 破虜湖)까지 쫓아가 섬멸시켰어요. 그 덕택에 지금도 6.25참전용사 명예수당으로 매달 10만 원씩 받고 있어요.

문 : 전쟁 후 상황과 4.19혁명 참여 일화를 들려주세요.

답 : 병역을 마치고 철도청으로 돌아왔죠. 이승만 정권 때 공무원 월급이 형편없었어요. 2만 원쯤 받았는데 이 돈으로는 고작 쌀 7말을 살 수 있었죠. 월급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안 될 정도 였죠. 그래서 공무원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촌지나 이권청탁이 오가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했죠. 저는 촌지나 청탁을 일절 받지 않았어요. 간부들이 저를 좋게 보고 열차사무소의 좋은 보직자리를 주었으나 뇌물을 받지 않았고 아울러 윗선에 상납도 안 해 점차 철도계에서 한직으로 물러났죠.
4.19혁명의 도화선은 다들 알다시피 3.15부정선거입니다. 3월 15일 선거 때 이승만 정권은 공무원들에게 선거부정을 암암리에 지시했습니다. 일단 공무원에게 자유당 가입원서를 쓰게 하고 여당이 선거에 이기지 않으면 나라가 큰일 난다는 등 엄포를 놓았어요. 철도청에도 그런 요구가 와서 여러 직원이 자유당에 입당했지만 나는 끝까지 거절했지요. 또 각 지자체에서 반상회 같은 것을 열어 주민들에게 여당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어요.
4.19혁명 기간 내내 나는 일단 직장에 나갔다가 외근 핑계로 외출하여 시위에 참가했죠. 4월19일, 전날 고려대생들의 피습 소식을 듣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서울 중심가로 뛰쳐나왔어요. 나는 대학생 시위대와 함께 다녔는데 종로 네거리의 종로경찰서를 에워싸고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를 외쳤죠. 이때 나는 대학생 몇 명과 함께 근처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를 가져다 종로경찰서에 불을 질렀어요. 이것을 보고 시민들은 환호했죠. 종로경찰서는 일제시대 친일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이 경찰간부로 재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날 서울 시내 10여 곳의 경찰서와 파출소가 불탔다고 합니다. 그만큼 당시 경찰은 이승만 정권의 시녀로 악행을 저질러 시민들의 원성을 많이 샀던 것이죠.

문 : 이후 철도청을 떠나 호남정유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답 : 앞서 말했듯이 공무원 월급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워 다른 직장을 찾고자 했죠. 때마침 1967년 5월 창립된 호남정유가 직원채용 공고를 냅니다. 이 당시 석유업계는 대한석유공사(유공)가 독점하고 있었죠. 정부가 제2의 정유업체를 인가해 경쟁체제를 유도하죠. 그래서 럭키그룹과 미국의 칼텍스가 50 대 50의 지분으로 여수에 호남정유를 세웁니다. 채용시험 때 영어인터뷰와 구두시험이 있었는데 모두 통과하여 입사합니다. 이때부터 정년 58세까지 근무하고 회사의 요청으로 2년 더 연장하여 1988년까지 상무이사로 재직합니다. 여기에는 철도청 공무원 출신이라는 게 많이 작용했어요. 한국 석유시장을 놓고 호남정유와 유공의 경쟁이 치열했죠. 석유를 많이 팔기 위해서는 유가를 낮춰야 하는데 원유 수입가는 똑같아 물류비에서 절감할 수 밖에 없었어요. 석유 수송은 거의 철도를 통해 이루어져서 철도 물류비용 절감이 긴요했는데 철도청의 인맥 관리에 제가 꼭 필요했던 것이죠.

문 : 1995년 연구소에 어떻게 가입하셨나요.

답 : 내가 독서를 좋아하는 편인데 어느 날 교보문고에 갔더니 연구소에서 펴낸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눈에 띄는 거예요. 보자마자 이 책이구나 하고 3권 모두 사서 곧바로 완독했죠. 각 분야의 유력 인사들이 대부분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꽤나 놀랐어요. 그리고는 연구소에 전화해 바로 회원 가입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지금 주소인 동작구 사당1동에 살았는데 가입 후에는 관악동작지부 지부모임에 자주 나가 역사공부와 친일청산 활동에 참여했어요.

▲ 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있던 박흥식 동상. 관악동작지부의 항의가 거세지자 2001년말 학교측이 자진 철거했다.
▲ 2001년 10월경 아침 등교시간에 맞춰 박흥식 동상 철거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박영환 회원

문 : 제가 그때 친일파 박흥식과 김석원 동상 철거 촉구 집회에 꼭 나와 달라고 부탁드렸죠. 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답 : 2001년 당시 관악동작지부장이 조동걸 회원이었어요. 조동걸 지부장의 발의로 지부차원에서 ‘친일파 동상철거운동’를 벌이기로 했어요. 그래서 인근에 있는 친일파 동상을 알아보니 관악구 신림동 광신학원의 박흥식 동상과 동작구 대방동 성남고등학교의 김석원 동상이 있었어요. 먼저 박흥식 동상 철거에 집중하기로 하고 그해 9월에 광신학원에 박흥식 동상 철거 요청 공문을 보냈으나 아무 반응이 없어 흥한재단과 광신학원에 직접 찾아가 보았지만 재단과 학교측의 불응 의사만 확인했죠. 그래서 10월 중순부터 매주 1회 광신학교 앞에서 등교시간인 7시 30분부터 박흥식 동상 철거 촉구 시위를 벌였는데 나도 빠짐없이 참석했어요. 처음에는 학교 측에서 무시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다가 여론이 무서웠는지 그해 12월 13일에 자진 철거를 했고, 바로 그날 우리 지부는 지부 송년모임을 겸해서 동상 철거 자축연을 가졌습니다. 박흥식 동상 철거의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2002년 3월부터 성남고 설립자인 친일군인 김석원 동상 철거운동에 들어갔어요. 박흥식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철거요구 공문을 보내고, 이어 학교 방문, 동상 철거 촉구 시위로 진행되었어요. 성남고는 1년여를 끌더니 결국 2003년 5월에 김석원 동상을 철거했어요. 이 밖에도 박정희기념관 설립반대운동, 서울대 김민수 교수 복직 촉구 시위, 관악산 입구에서 친일예술인작품전 개최 등 다양한 친일청산 활동을 벌인 것이 기억납니다.

문 : 선생님은 그러한 활동으로 연구소에서 2009년 모범회원상, 2010년 올해의 공로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간의 성원과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연구소 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도 후원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답 : 한겨레신문 창간독자이기도 하고 예전부터 범민련(조선통일범민족연합), 경실련, 참여연대 등도 같이 후원해 왔어요. 재작년 촛불집회 때는 참여연대 소속으로 수차례 집회에 나갔어요. 종로 네거리를 지날 때는 4.19혁명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후원에 관해 특기할 만한 일화가 있어요. 바로 백범 암살의 배후를 밝히고자 안두희를 추적한 권중희 씨와의 인연입니다.
2000년쯤인가 권중희 씨(1936~2007)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1996)라는 책을 구입하여 읽었어요. 직장을 그만두고 십수년 간 자비를 들여 안두희를 추적한 권중희 씨가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그래서 조금이나마 돕고자 출판사에 찾아가 권중희의 연락처를 알아냈어요. 권중희 씨는 마포의 어느 허름한 창고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한 3개월간 생활비를 댔고 권중희 씨의 요청으로 팩스 한 대를 놓아주었어요.

문 : 연세에 비해 퍽 건강하십니다. 비결이 있으신가요.

답 : 어렸을 때부터 등산을 좋아했어요. 호남정유 다닐 때 사내에서 산 타는 게 제일 빨라 ‘아마추어 산악인 일인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전국에 안 다닌 산이 없는데 특히 서울 근교의 도봉산(450회), 북한산(50회), 관악산(120회)은 거의 매주 등산한 걸로 기억합니다.

-박 회원은 등반 횟수를 메모지에 적어 왔다. 또 늘 혼자 등산하는데 하산길엔 쓰레기를 배낭에 담아와 주변에서는 ‘환경부장관’이라고들 했고요. 등산이 바로 장수의 비결인 것 같습니다. 또한 독서와 분재, 관악기 연주 등도 즐겨 하는 편입니다. 노령화 시대에는 여러 가지 취미를 갖는 것이 건강상 좋은 듯 싶어요.

문 : 끝으로 연구소와 회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답 :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개관하기까지 연구소 식구들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불철주야 연구와 실천활동에 힘써준 상근자들과 회원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근 연구소 행사나 지부모임에 등한한 데에 미안한 마음입니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연구소 회비를 꼬박꼬박 내고 행사에도 참석할 작정입니다.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이 땅에 친일파들이 온존해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 그날까지 연구소 식구들 모두 정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약간의 고서와 역사책, 정치경제학 관련 서책들을 갖고 있는데 적당한 시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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