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1702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1]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조한성 선임연구원

 

경성고보 학생들, 시위에 나서다

3월 1일 오후 1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박노영, 박쾌인은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을 모아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각 교실에 들어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있을 만세시위운동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했다. 교사들은 평소와 달리 쉬는 시간에 너무 조용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학교 내에서 불온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경성고보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인 많은 시민, 학생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덕수궁과 동대문 방면으로 나뉘어 행진을 하면서 각국 대사관을 들려 조선의 독립 선언을 알리고, 조선총독부가 있는 진고개(현 충무로2가)로 집결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박노영

 

예심판사가 박노영에게 물었다.
“조선 독립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일합방의 취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총독정치는 마치 조선을 식민지와 같이 취급하고,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하지 않습니다. 총독정치의 근본정책은 동화정책이라 하는데, 민족을 달리하고 역사를 달리하는 두
민족이 동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다른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날이 보고 듣는 일 중에 우리의 감정을 해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긴 것입니다.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3월 1일 오후 3시 경운동에 있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은밀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기숙사 창밖으로 시위 군중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학생들이었다. 학교 당국이 기숙사 문을 잠그고 학생들의 참여를 막았지만, 여학생들은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와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학생들은 종로, 대한문, 광화문, 창덕궁, 서대문 등을 오가며 만세를 불렀다. 해질 무렵 학생들은 진고개까지 진출했다가 헌병과 경찰에 포위되어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체포된 학생은 모두 30여 명에 달했다. 대부분은 다행히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어 훈방 조치 되었다. 하지만 경찰과 학교당국에 의해 주모자로 지목된 학생 2명은 풀려나지 못했다. 사범과 3학년 최정숙과 본과 3학년 최은희였다.
예심판사가 최정숙에게 물었다.
“독립운동에 찬성한 이유가 무엇인가?”
최정숙은 당당히 대답했다.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조선도 자유의 나라가 되고 싶어서 독립을 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었지만…

서울에서는 3월 5일 다시 한 번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독립운동의 열기를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이날 시위는 3월 1일의 시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언제나 터무니없이 축소해 기록하던 일제 경찰도 3월 1일보다 3배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3월 5일 시위에서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선전하는 전단을 제작해 뿌린 학생들이 있었다. 사립 국어보급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채순병(16세), 중동 야학교에 다니던 김종현(19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강윤(19세)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3월 5일 시위의 시간과 장소를 다르게 알고 있자 종이를 사고 등사를 해서 전단을 만들었다.

서울에서는 3월 5일 다시 한 번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독립운동의 열기를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이날 시위는 3월 1일의 시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
이 모였다. 언제나 터무니없이 축소해 기록하던 일제 경찰도 3월 1일보다 3배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3월 5일 시위에서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선전하는
전단을 제작해 뿌린 학생들이 있었다. 사립 국어보급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채순병(16세), 중동
야학교에 다니던 김종현(19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강윤(19세)이 그들이었다. 이들
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3월 5일 시위의 시간과 장소를 다르게 알고 있자 종이를 사고 등사
를 해서 전단을 만들었다.

적으론 조선의 산물을 수출할 때 고액의 세금을 부과해 조선의 공업 발전을 방해합니다. 정치
적으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가 없고, 교육적으론 제도가 불완전합니다. 개인과 개인 간을 말
하면 일본사람은 조선 사람을 멸시하고 압박합니다. 이런 불평을 없애려면 독립을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소동을 일으키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는가?”
예심판사의 물음에 정석도는 대답했다.
“만세를 부르는 것은 독립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선언서에 최후의 일각,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운다고 하였으나, 우리들 조선 사람이 독립목적을 관철하려면 먼저 조선 사람이 그 사상을 갖
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는가?”
“누구한테 들은 것이 아니라 나의 사상일 뿐 입니다”
당시 나이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정석도가 당찬 주장을 쏟아내자 예심판사는 믿기지 않는다
는 듯 누구한테 들은 말이냐며 캐물었다. 일본의 부당한 정치와 독립만세운동 외에 다른 이유
가 또 무엇이 있겠는가.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독립은 기쁜 일입니다”

3월 5일 시위에는 이화학당과 정신여학교의 학생들도 함께 했다. 3월 1일 시위 때는 학교가 만류해 참석하지 못했지만 2차 시위 때는 참여 학생의 대부분이 미리 학교를 빠져나가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화학당 고등과 3학년 노예달(19세)도 그랬다. 그녀는 1차 시위 때 프랑스영사관으로 향하던 군중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자 기숙사에서 만세를 불렀지만 학교 당국이 막아 거리로 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2차 시위 때는 짚신을 신고 담장을 넘어 남대문역의 시위 군중과 합류했다.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이 피고의 마음에 든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자립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은 하늘이 정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본과 병합되어 타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독립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이런 것을 배웠는가?”
“특별히 이런 일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배운 결과 혼자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피고는 여자이면서 어떻게 이 같은 일에 참가했는가?”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독립이라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기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자이지만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입니다.”
만세시위에 나선 여학생들은 체포된 후 성폭력에 가까운 치욕을 겪었다. 1919년 7월 미국 기독교교회연합평의회 동양관계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의 정세????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사실들이 적혀있다. 이 보고서는 한국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의 비밀보고서를 모아 엮은 것으로, ‘극단적인 진술’을 제외하고 비교적 온건한 내용만을 모은 것임에도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 가운데 3월 5일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한 여학생은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사랑하는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하여 남대문에서 행진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표시로 붉은 띠와 붉은 완장을 둘렀다. (…) 덕수궁에 가까이 왔을 때 돌연 한 일본인 순사가 뒤에서 나의 머리채를 잡아 당겨 땅에 콱 넘어졌다. 사정없이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나는 거의 의식을 잃었다. 순사는 나의 머리를 잡아끌어 종로경찰서로 연행했다. 경찰서 입구에 줄지어 서있던 20여 명의 일본인 경찰들이 나를 구타했다. 잔인이 너무 지나쳐, 나는 때로 그들이 나를 때리는지, 다른 사람을 때리는지 깨닫지 못했다. (…) 얼마후 우리는 한 사람씩 심문을 받았다. 심문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다른사람에게 알리기는 내 힘에 벅차다.

 

그녀는 망설였을 것이다. 자신이 당했던 모든 악행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이고, 여성으로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대답할 때마다 얼굴을 한 대씩 얻어맞았다. 그들은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이 더러운 창녀야, 너 애 뱄지?”하며 욕했고, 가슴을 드러내 보이라는 명령을 듣지 않자 윗옷을 찢어버리고 몸서리쳐지는 온갖 못된 말을 했다. 그들은 내 손가락들을 한데 묶고 이를 홱 잡아당기기도 했는데, 마치 손가락들이 모두 손에서 빠지는 것 같았다. (…) 나는 경찰서에서 5일을 지낸 후 서대문감옥으로 송치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나를 발가벗겼으며 남자들이 모두 내 몸을 보았다. 옷을 입고 방으로 인도되었는데 방에는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이 16명이나 있었다. (…) 이튿날 여러 명이 들어와 나를 발가벗
긴 채 저울로 몸무게를 달았다. 이들도 비웃으면서 내게 침을 뱉었다. 간수는 내게 공개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 사정을 털어놓을 기회로 보고 공개재판에 기대를 걸었으나, 어느 날 재판도 받아보지 못하고, 나의 죄상이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못한 채 석방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3월 1일과 3월 5일 서울에서 만세를 부른 학생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불렀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제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놀라운 자발성이 그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깨를 부딪치며 한데 뭉쳐 높이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어머님!”

경성고보 학생으로 후일 소설가 겸 시인으로 유명해지는 심훈(본명 심대섭)은 서대문감옥에서 어렵게 구한 종이와 연필로 어머니께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고의적삼 차입해 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있다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심훈은 3월 5일 체포 이후 겪었던 모든 고통을 기록삼아 몰래몰래 적어나갈 생각이었다.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 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짓무른 살을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심훈은 감옥살이의 힘겨움을 담담히 털어 놓는다. 그런데 글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글은 아픔과 슬픔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어딘가에 가 닿는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그려!”
왜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왜 후회하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똑같은 죄로 감옥에 온 사람들이었다. 만세를 부른 죄, 독립을 말한 죄. 그것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다. 괴로워도 괴로워하지 않고, 슬퍼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랬다. 그 큰 힘이 있어 역사가 앞으로 나갔다. 아무리 큰 폭력과 억압이 있어도 그 힘을 누를 수 있는 건 고작 10년, 20년뿐이었다.
심훈은 그 큰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만세 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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