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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총독관저 앞 언덕에 초대형 무선 송신탑이 들어선 까닭은?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의 부산물로 탄생한 육군무선전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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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6]

용산총독관저 앞 언덕에 초대형 무선 송신탑이 들어선 까닭은?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의 부산물로 탄생한 육군무선전신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조선 주둔 일본군대는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듯이 때마다 대규모 기동훈련을 벌였다. 이러한 훈련은 대개 가을철에 시행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용산에 주둔했던 제20사단 의 경우, 이를 ‘경성사단 추계연습(京城師團 秋季演習)’ 또는 ‘추계기동연습(秋季機動演習)’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특히, 사단 예하의 여단끼리 편을 나눠 대항전의 형태로 참가할 때는 이를 ‘여단대항연습(旅團對抗演習)’이라고 불렀다.
이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시행되는 기동훈련으로는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 있었다.
잇따른 침략전쟁에 예하부대의 병력동원이 잦았고 여기에 예산 확보 문제가 겹쳐 사단 규모의 대항전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1930년과 1935년, 단 두 차례 거행하는 것에 그쳤다. 그 가운데 1930년 10월 9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진행된 첫 번째 사단대항연습은 조선에 상주했던 2개 사단, 즉 제19사단(나남)과 제20사단(경성)이 각각 북군(北軍)과 남군(南軍)이 되어 3만여 명의 병력이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가상 공방전을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이었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수많은 군중이 참관하는 가운데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때의 기동훈련과 관병식의 상황은 <소화5년 어조선 사단대항연습사진첩(昭和五年 於朝鮮 師團對抗演習寫眞帖)>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므로 많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이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관병식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의 배경에 높은 철탑들이 솟아있는 모습이 곧잘 포착되어 있어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대규모 기동훈련의 말미에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이 거행되는 장면이다. 왼쪽 위에 다소간 이질적인 철탑 두 개가 포착된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용산철도공원에 일본 군인들이 집결하여 강평회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이 사진에도 뒤쪽 배경에 높은 철탑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시베리아 출병’과 관련하여 군사용 무선전신 중계를 위해 용산 연병장 서북쪽에 육군무선전신소 시설 일체가 건설된 사실이 수록된 <매일신보> 1919년 7월15일자의 관련보도.

 

그래서 이에 관한 연원을 찾아서 관련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19년 7월 15일자에 수록된 「용산(龍山)의 신시설(新施設)!! 군용무선전신(軍用無線電信), 용산 신연병장 서북편에 장치」 제하의 기사가 눈에 띈다.

 

경성 육군무선전신소 건설의 임무를 띄고 지난 3월 이래 경성에 출장중이던 육군무선전신조사위원 공병소좌(工兵少佐) 이시이 에이키츠(石井英橘) 씨는 10일 아침 입항하는 관부연락선 고려환(高麗丸)으로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즉시 귀경하였는데 씨의 말을 듣건대 “우리 육군은 내지에 약간의 무선전신이 있으나 조선에는 무선전신이 없어서 군사상 에 크게 불편하더니 전번에 시베리아 출병과 함께 그 필요함을 깨달았으므로 시베리아에 무선전신을 건설하는 동시에 만주와 조선에도 신설하기로 결정되어 나는 3월부터 경성에 와서 위치의 선정과 기타의 조사를 하고 용산 신연병장의 서북편에 장치하기로 결정한 후 동월하순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부속 가옥은 지난달 20일에 준공하였으며 수신설비도 그달 그믐에 끝났은즉 나머지 공사는 발신설비뿐이나 이것도 거진 이미 완성되었고 기계를 설치하기만 하면 될 터인데 기계가 도착한 후 즉시 설치하여 통신을 개시할 터이며 늦더라도 내월 중순까지에는 전부 준공할 터이라. 무선전신의 능력과 기타의 관하여는 군사상의 비밀이므로 말하지 못하며 무선전신의 기둥은 나무기둥이오, 높이가 삼백 척이며 ○○산 위에 선 것과 별로 틀리지 않다. 조선에 있는 무선전신의 장치는 진해(鎭海)에 해군용이 있고 그 외에 총독부 소속이 있으나 구식이므로 능력이 부족한데 이번에 신설할 육군무선전신으로는 내지와 조선의 연락을 완전케 하며 군사통신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더라.<하관지국>

 

여길 보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에 인접한 신연병장 서북쪽 언덕에 경성육군무선전신소(京城陸軍無線電信所)의 나무기둥탑 건설이 개시된 것은 1919년 3월의 일이었으며, 그 목적은 이른바 ‘서백리 출병(西伯利 出兵)’에 따른 군사용 무선전신의 중계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 출병은 제1차 세계대전의 말미에 소비에트 정권이 독일과 단독강화를 체결하자 러시아혁명에 대한 간섭과 체코군 구원을 명분으로 내세워 동부 시베리아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군사행동을 말한다.

<매일신보> 1918년 3월 6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시베리아 철도연선과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군수품 보호를 위해 군사행동을 취하고자 일본이 미국과 기타 연합국에 출병을 제의한 사실이 표시되어 있다.

 

이때 일본측에서는 우라지오파견군(浦塩派遣軍, 블라디보스토크파견군. 존속기간 1918.8.1~
1922.11.6)을 출동시키고 이들을 통해 연해주와 만주횡단철도는 물론이고 바이칼호 서쪽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역을 크게 확대하였다. 이와 함께 기억해두어야 할 사항은 신한촌사건(新韓村事件, 1920년 4월), 간도참변(間島慘變, 1920년 10월~1921년 4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1921년 6월) 등과 같은 비극이 모두 이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 후 일본의 무모한 영토 야욕과 소비에트 정권의 붕괴를 위한 시베리아 출병이 1922년에 이르러 다수의 전사자만 속출했을 뿐 아무런 소득 없이 막을 내리게 됨에 따라 효용가치를 크게 상실한 육군무선전신소(용산)의 처리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22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용산무선전신소(龍山無線電信所) 이관(移管)」 제하의 기사를 통해 상황 변화의 내막을 읽어낼 수 있다.

 

15일 해항파견군사령관(海港派遣軍司令官) 다치바나 대장(立花大將)의 철병성명(撤兵聲明)과 공(共)히 용산무선전신소의 총독부 이관도 수(遂)히 확정적인 것이 되었는데 본래 차(此) 전신소는 거(去) 대정 8년(1919년) 6월 극동(極東)의 시국(時局)에 반(伴)하는 군사상의 필요로부터 육군이 23만여 원의 경비를 투입하여 동년 12월에 준공된 것으로, 기후(其後)는 해항(海港; 블라디보스톡), 니시(尼市; 니콜리스크), 니항(尼港; 니콜라옙스크), 아항(亞港; 알렉산드롭스크) 등으로부터 하는 동경간(東京間) 무전 병(並) 북경(北京), 천진(天津), 진황도(秦皇島), 대련(大連) 등으로부터 하는 동경간 무전의 중계소(中繼所)가 되어 주로 육군과 기상관계(氣象關係)의 전보, 해저선(海底線)의 사고시(事故時)에는 일반공중전보중계의 어용(御用)도 승(承)하고 수(殊)히 간도사건(間島事件) 등에 제(際)하여는 대단히 활동한 것인데 서백리(西伯利)로부터 철병(撤兵)하게 된 결과 제일 주요한 사무가 전혀 무(無)하게 된 고로 총독부의 소관이 되는 것이며 더욱 총독부에서도 경비(經費)의 관계도 유(有)하므로 본년도 내는 육군이 보관하고 연도체(年度替)와 공(共)히 이관하게 될터인데 (하략)

 

이러한 결과로 기존의 군사용 또는 기상정보 무선전신 중계를 위해 건설된 육군무선전신소의 시설 일체를 1923년 4월 1일부로 조선총독부가 넘겨받아 이를 전담할 기구로 새로 설치한 것이 경성우편국 용산전신분실(京城郵便局 龍山電信分室; 총독부 고시 제96호)이다. 그러나 불과 두 달여 만인 그해 6월 11일에 이를 다시 경성무선전신국(京城無線電信局; 총독부 고시 제172호)으로 분리 승격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진황도(秦皇島, 중국 허베이성) 육군무선전신소와 가나자와(金澤) 무선전신취급소, 츠노시마(角島, 일본 야마구치현) 무선전신국, 대련만(大連灣, 중국 랴오뚱반도) 무선전신국 등과 고정지점간 교신(固定地點間 交信)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국내외 일본어 및 유럽어 전보의 송수신과 무선전신에 의한 탁송전보를 비롯하여 일반 해안국(海岸局, 선박통신) 업무도 함께 취급하였다.

 

경성무선전신국 설치에 관한 변동 연혁

이를 계기로 무선전신의 활용도가 크게 증대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1927년에는 송수신시설을 증대하는 한편 용산과 청량리에 각각 송신소와 수신소를 분리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펴낸 <조선체신사업연혁사(朝鮮遞信事業沿革史)>(1938), 176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육군에서 이관을 받은 경성무선전신국은 그 설비가 모두 구식에 속하여 이미 당시의 통신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체신성(遞信省)에서 계획중이던 대식민지(對殖民地) 무선전신국에 대응하는 시설로서 기설(旣設) 경성무선전신국 설비의 일대개선을 시행하는 것으로 되어, 대정 14년도(1925년도)의 계속사업으로 재래의 화화식(火花式) 송신장치를 진공관식(眞空管式)으로 개장(改裝)해서 이를 송신소로 하며, 별도로 청량리에 지향식(指向式) 수신장치를 하여 수신소를 개설하고, 이들 송수신소는 경성우편국 내에 설치한 중앙통신소(中央通信所)에서 조종하는 중앙집중식(中央集中式)에 의한 통신방식의 확장공사는 소화 원년도(1926년도) 말에 통신에 차질 없을 정도로 준공을 보게 되면서 소화 2년도(1927년도)부터 그 사무를 개시했다.

 

경성 지역 이외에도 서해안 항행선박의 무선교신을 위해 진남포(鎭南浦, 1927년 2월)에, 동해안 지역의 선박통신 연락용으로 청진(淸津, 1929년 8월)에,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정기항공로비행안전을 위해 울산(蔚山, 1930년 7월)에,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항공로의 요충지로 급부상한 신의주(新義州, 1936년 1월)에도 각각 무선전신국이 잇달아 설치되었다. 이에 곁들여 경성무선전신국에서도 급증하는 통신량의 증가에 맞춰 송신소 확장 이전공사가 서둘러졌으며,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부평송신소(富平送信所)였다.

용산총독관저 인근에 자리한 경성무선전신국 용산송신소 지역에 즐비하게 늘어선 송신 철탑들의 모습이다.( <소화 8년 조선요람>, 1932)

 

<매일신보> 1926년 12월 12일자에 수록된 청량리 무선수신소의 준공 소식과 전경 사진이다.

 

<매일신보> 1937년 6월 20일자에는 경성무선전신국의 시설을 크게 확장하기 위해 경기도 부천군 소재 부평평야 일대의 7만 5천 평에 달하는 부지를 사들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비행안전을 위해 울산(蔚山, 1930년 7월)에,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항공로의 요충지로 급부상한 신의주(新義州, 1936년 1월)에도 각각 무선전신국이 잇달아 설치되었다. 이에 곁들여 경성무선전신국에서도 급증하는 통신량의 증가에 맞춰 송신소 확장 이전공사가 서둘러졌으며,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부평송신소(富平送信所)였다.
이곳은 기존의 용산송신소를 대체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매일신보> 1938년 1월 22일자에 수록된 「반도공로(半島空路)의 보강(補强), 항공무전 대확장」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시설확충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코발트 빛 반도의 창공은 이번 일지사변 이후 더욱더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되어 체신국에서는 이에 대한 보강시설(補强施設)을 하기로 되어 13년(1938년)부터 3개년간 계속적으로 1백 40만 원을 들여 항공무선(航空無線)의 확장 개량 계획을 수립하기로 되었는데 그 계획의 대요를 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즉 13년도에 각 10만 원을 들여 우선 함흥(咸興), 평양(平壤)에 항공무전국을 신설하는 외에 13년(1938년), 14년도(1939년도)에는 30만 원을 들여 용산에 있는 경성무전송신소를 부평(富平)으로 옮겨 라디오와 연락하는 기관을 설치할터이며 또 22만 원으로는 청량리수신소(淸涼里受信所)를 확충 개량하는 외에 12만 2천 원을 가지고 청진(淸津) 무전국에 송수신기를 증설, 16만 원의 경비로 신의주(新義州) 무전의 확충, 15만 7천 원으로 추풍령(秋風嶺)에 항공무전국을 신설하는 등 종래 내지(內地)보다 훨씬 뒤진 반도항공무전설비는 이 계획에 의하여 일대 비약을 하기로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내용처럼 1939년 9월에 ‘경성무선전신국 부평송신소’가 신설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청량리수신소를 대체하기 위한 시설로서 1941년 4월에 경성 교외 뚝섬에 건립한 ‘광장수신소(廣壯受信所)’가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관보> 1942년 4월 28일자에게재된 내용에 따르면, 이때 ‘본정 1정목(지금의 충무로 1가)’에 자리하고 있던 경성무선전신국은 청량리분실이 있던 곳으로 위치를 이전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 자료에는 특히 청량리분실, 기상대분실, 용산송신소, 부평송신소, 광장수신소 등이 일체 폐지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단지 직제상의 기구통폐합에 따른 것이지 실체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실제로 해방 이후 시기의 간행물인 <공업신문> 1948년 5월 9일자에 「용산해안송신소(龍山海岸送信所), 미군요청(美軍要請)으로 이전(移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송신소 시설 그 자체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용산총독관저 앞에 자리했던 송신소 철탑들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관련 자료가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이곳이야말로 식민지 조선에서 생성된 통치정보를 신속히 전달하는 것은 물론 일제가 벌인 일련의 침략전쟁을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뒷받침한 일종의 신경망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공간이었다는 점은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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