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2)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4 조각배에 몸을 싣고
상하이를 일본이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연이은 의거로 일제는 대대적인 수색과 검거를 벌였다.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기 어려워진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미국인 피치 목사의 도움으로 비밀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연출로 상하이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싱 백범 피난처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청년백범 1기 답사단
자싱의 지역 유지인 저보성의 집에 숨어들었다. 저보성 일가는 국민당에서 높은 지위의 당원이었고, 윤봉길 의거 등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백범은 중국인처럼 옷을 입고 광동 사람인 척하면서 ‘장진구’ 또는 ‘장진’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동말을 잘 하지 못하는 백범은 벙어리나 다름없는 답답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백범과 임시정부는 따로 또는 같이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백범은 자싱, 하이옌, 항저우 등을 오가며 피신하고 있었고, 임시정부는 항저우, 진강 등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답사단이 자싱의 백범 피난처를 찾으니, 피난처 앞 갑판에는 중국인 강태공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조용하던 호숫가가 우리 답사단 때문에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강태공들은 시끄러운걸 싫어한다. 시끄러운 소리에 고기가 도망가기 때문이다. 조용한 동네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우리 답사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국 강태공들은 자신들의 낚싯대가 펼쳐진 자리를 순순히 비켜주며 단체사진을 찍으란다. 중국인 강태공들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모양이다. 먼 데서부터 제 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온 이방인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싱긋싱긋 웃으며
자리를 비켜준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데도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고마웠다. 서툰 중국말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한다.
자싱은 산이 없고 호수와 수로가 발달한 곳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광을 자랑한다. 땅이 기름지고 각종 생산물이 풍부하여 인심이 좋은 동네라고 한다. 자싱까지 일본 경찰의 감시의 눈길이 다다르자, 저보성의 아들 저봉장의 처가가 있는 하이옌 ‘재청별서’로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재청별서’는 저봉장의 처가에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지은 별장이다. 하이옌은 조용한 동네였다. 역시 호수와 수로가 발달하여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재청별서가 자리한 곳의 풍광은 그중에서도 빼어났다.
백범이 은신했던 재청별서의 유물과 김신이 세운 음수사원비
백범은 후에, 내내 프랑스 조계지에만 묶여 있다가 쫓기는 신세이기는 하였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몇 년 만에 보니, 자연을 감상하는 맛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재청별서에는 백범의 둘째 아들 김신이 세운 비석 하나가 있다.
‘물을 마시며 그 근원을 생각한다(飮水思源)’라고 새겨져있다. 그 당시 중국인들이 백범과 임시정부에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며, 그 의리가 앞으로의 한중관계 발전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저봉장은 홀아비로 쫓기는 백범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는지, 백범에게 결혼을 권하며 중학교 여선생을 소개해 주려고 하였다. 백범은 당시 눈길이 많이 쏠리는 신여성 지식인과 결혼하면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날 확률이 높아진다면서, 일자무식인 여자 뱃사공 주애보와 같이 지내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고, 주애보가 노를 젓는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호수 여기저기를 떠돌며 지내야 했다.
세상은 끝없이 넓은데 내 몸 하나 누일 곳은 자그마한 조각배 한 척뿐이오, 물길 또한 끝없이 이어졌건만, 나더러 오라는 곳 없고 나 또한 갈 곳이 없구나. 달은 높이 떠 천 개의 강과 호수를 비추는데 우리 겨레에게는 작은 희망의 등불 하나 없구나. 호수는 맑고 깊은데 내 마음은 수심(愁心)만 깊구나. 그때 백범의 마음 이러하지 않았을까.
S#5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번 답사 여행 중, 어느 곳 하나 내 마음에 남지 않은 곳이 없다. 타고나기를 울보로 타고난나는 답사 초반에는 가는 곳마다 눈물을 참느라 애를 썼다. 얼마 안 가 그냥 대놓고 아무 때나 훌쩍훌쩍 울었다. 그중에서 잊기 힘든 곳을 한 군데만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있었던 천녕사를 꼽을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는 항일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지도부는 중국국민당과 접촉하여 한중합작 항일운동을 제안했다. 그 결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라는 긴 이름의 학교가 세워졌다.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 활동할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김원봉·윤세주 등이 교편을 잡았다. 1932년부터 1935년 9월까지 운영되었다. 이곳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 훈련을 받았다. 의열단원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길러졌다.
제1기 수료생 중에 의열단원이자 저항시인인 이육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인들은 크게 셋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문학을 팔아 친일을 한 부류이다. 둘째는 차마 친일로 돌아설 수는 없으니 차라리 붓을 꺾고 작품활동을 포기한 부류이다. 마지막은 끝까지 작품으로, 삶으로 투쟁한 경우이다. 친일문학을 했던 이들은 이후 독재세력에게도 아부하는 곡학아세의 삶을 살면서도, 문단의 어른으로 선생으로 대접받으며 살았다. 부끄럽게도 그들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뒤늦었지만 얼마 전부터 친일 논란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은 이제 교과서에서 퇴출되었다. 우리의 부끄럽고 어두웠던 문학사를 밝히는 몇 안 되는 작가들이 있다. 그중 한 분이 바로 이육사이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에서 야간 기념촬영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있던 자리는 난징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쉽게 발각되지 않는 자리이다. 원래는 99.5칸 규모의 절이 있었던 곳인데, 그 절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 폐허처럼 남은 두 채의 건물은 1970년대에 삼림 보호를 하는 사람들
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고 마을 사람에게 들었다. 지금은 도교 사당이라는데, 잘 사용하지 않는지, 창틀은 떨어지고 몇 해 전 태풍에 지붕이 날아갔는데도 고치지 않고 있다.
우리 답사단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두메산골이라 해가 지고 나니, 가로등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완벽한 어둠이다. 우리 답사단은 저마다 휴대전화의 불빛에 의지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20여 분쯤 산길을 걷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있던 곳이 보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벌벌 떨게 했던 김원봉, 윤세주 등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다.
이곳이 원래 어떤 곳이라는 걸 알려주는 비석 하나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준비해간 차와 술을 따라 재배했다. 이곳에서 독립의 꿈을 꾸던 분들의 넋을 기렸다. 그리고 답사단은 돌아가면서 이육사의 시를 낭송했다.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서. 김원봉의 삶을 이야기했다. 윤세주의 삶을 말했다. 김원봉과 윤세주의 빛나는 우정을 떠올렸다.
평생을 조국 독립에 바쳤던 약산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경찰 노덕술에서 뺨을 맞는 모욕을 겪어야만 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된 적이 한번도 없었던 신출귀몰 김원봉. 그러했기에 일본 경찰에게조차도 고문을 받거나 모욕을 당한 적 없는 불세출의 독립운동가는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일제의 개 노릇을 하던 친일경찰에게 뺨을 맞고 희롱을 당하는 모욕을 겪어야 했다. 경찰에서 풀려나서, 김원봉은 꼬박 사흘 동안 문을 잠그고 펑펑 울기만 하다가 월북하였다. 북한이 딱히 좋은 건 아니었지만 남한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해방 후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손에 쥐었고,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었다. 김원봉은 결국 북한에서도 숙청당한다.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려진 불세출의 영웅. 그의 기막힌 신세가 지금 천녕사의 모습과 겹쳐진다.
임시정부 흔적을 더듬는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원봉 선생의 여동생 김학봉 여사가 숨졌다. 김원봉 선생의 월북으로 남쪽에 남은 가족은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초를 겪었다.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약산의 형제 4명과 사촌 5명이 총살당했다. 약산의 형제중 생존자였던 김봉철 씨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된 형제와 사촌들의 주검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5·16 쿠데타 뒤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가족들도 연좌제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평생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김학봉 여사의 아들들은 모두 고아원에 보내졌다. 김학봉 여사도 서울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모진 심문을 받아야 했고, 부친은 연금 상태에서, 남편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숨졌다. 고인은 2001년 북에 있을 약산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며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했고, 2005년에는 약산의 서훈을 신청했으나 약산이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됐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S#6 무엇이 그들을 거기에 가게 했을까? – 우리에게 남은 숙제
답사 내내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 그들을 거기에 가게 했을까? 어떤 힘이 그들을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어린 시절 일화가 떠올랐다. 당시 그리스는 터키에 침략을 받아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고, 터키는 크레타 사람들을 정치적·종교적·문화적인 이유로 박해하고 학살하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미할리스 카잔차키스)는 어린 아들에게 터키인들에게 교수형을 당한 크레타인들의 시신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며, 이렇게 말했다.
“잘보고, 죽을 때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 누가 이 사람들을 죽였나요?” 아버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자유.”
‘터키인들이 그랬다’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나에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 미할리스의 대답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은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크레타 사람들이 당한 것처럼 우리 또한 엄청난 박해, 착취, 살육을 당한 슬프고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 어마어마한 힘을 자랑하던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저항한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그리고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크레타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게 던진 이 한 마디는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비록 죽음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자유를 외치다 죽어간 이들에게 ‘경의(敬意)’를 표해야 하며,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역시 ‘자유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어간 이들은 ‘힘없는 자’로서 ‘힘 있는 자’들에게 ‘무모한 도전’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의미 없이 죽어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종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살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들을 죽였던 자들이 자기만의 이익, 권력, 명예 따위에 얽매여, 탐욕과 욕망에 제 영혼을 판 ‘꼭두각시’이며 ‘허깨비’이다. 힘을 가진 자들이 두려워 굴종(屈從)하는 것은 ‘주인’이 아니고 ‘노예’이다. 진정한 자유인은 돈, 권력, 명예에 자신의 인간성을 팔지 않는다. 그 무엇이 ‘자유’의 대가로 적당하겠는가? 어떠한 폭력 앞에서도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찌 ‘자유인’이 ‘노예’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는가? 그들은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폭력의 가해자 보다 도덕적 우위에서 선다. 그들은 비록 죽임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자유로운 인간’이었고, 가해자들은 ‘꼭두각시’이고 ‘허깨비’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기상을 가졌던 시인 이육사가 의열단에 들어가 결국은 머나먼 이국(異國)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순수를 꿈꾸던 윤동주가 일본의 감옥에서 생체실험으로 죽어간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봉창이 그랬고, 윤봉길이 그랬다. 나석주가 그랬고 김익상이 그랬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모두 불러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현실’을 살았지만, 그들은 ‘인간’으로 역사에 길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현실’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 역사는 그런 이들에게 내어줄 여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끝내 정부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가 내준 귀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상하이로 이동하였다. 중국에 있는한국인들이 환송대회를 열었다.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홍커우공원 바로 그 자리였다.
‘대한독립만세’ 기쁨의 함성이 차츰 울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게 꿈꾸던 것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
기 때문이었으리라. 믿기지 않아서였으리라. 많은 동지들이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같이 돌아갈 수 없는 동지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함께 수십 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동지들이 모두 함께 돌아갈 수 없어서였으리라. 뜻밖의 일제의 항복으로 수년 동안 애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이 허사로 돌아가서였을까? 우리 손으로 직접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였을까? 하지만 그들이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그렇게 그리던 고국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훈장이 아니었다. 고문과 빨갱이라는 모함과 암살의 공포였다. 그게 나는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마태복음 5장 15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斗)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燈檠)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사람에게 비치리라.” 제 정신 가진 사람은 기껏 켠 등불에 됫박을 덮어씌우지 않는다. 당연히 등잔걸이 위에 올려둔다. 그래야 집안이 밝아지기 때문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만주에서 독립군들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출신들이 군대를 장악했다.
광복군 출신들이 아니다. 경찰들도 일제의 개 노릇을 하던 친일경찰이 그대로 자리를 물려받았다. 교육계, 경제계, 정치계, 예술계 모두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친일파의 그늘 아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독립전쟁 중이다.그들은 우리의 빛나는 독립운동사가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불빛을 가리려고 온갖 짓을 다한다. 어렵게 피워 올린 등불에 됫박을 덮어 꺼트리려 한다. 그걸 용납하지 않는 것, 그게 우리에게 남은 숙제이다. 등불이 등불에 머물지 않고 횃불이 되게 하는 것이다. 됫박 따위로는 가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자. 그 불빛을 높이높이 내걸자. 우리 온 나라가 환해질 것이다. 어둠을 틈타 나쁜 짓 하는 쥐새끼들 숨을 곳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길이길이 정의의 깃발 아래, 자유의 깃발 아래, 평등의 깃발 아래 살게 하자. 선열들이 밝히신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높이 들어 올리면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에게는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럽고 빛나는 선열들이 있다. 그분들이 가셨던 길, 우리 아니고 또 누가 있어 따르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