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리랑 애국가’ 제시한 임진택 소리꾼
애국가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온다. 작곡가 안익태(1906~1965)의 일제 강점기 친일 부역 전력이 드러나면서다. 나아가 안익태가 친 나치주의자였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최근 저서 <안익태 케이스>(삼인 펴냄)를 통해 안익태가 유럽에 거주하던 때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친일파로 변절했고, 나치의 재정 지원을 받는 ‘독-일 협회’가 주최한 여러 공연에서 적극적으로 곡을 지휘한 전력을 소개했다. 이를 근거로 이 교수는 안익태가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정보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의 특수공작원으로 의심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미 안익태가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을 찬양하는 <만주국 환상곡>을 작곡하여 연주한 전력도 알려진 바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부역 인물이 작곡한 곡을 국가(國歌)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애국가 논란의 본질이다.
안익태의 <애국가> 자체가 표절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정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안익태의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점화한 후 일각에서 대안이 제시됐다. 일부 민주화 운동 진영은 민주 항쟁의 상징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새로운 국가로 불러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다. 일제에 무력으로 저항한 항일운동가들이 부르던 독립군가를 비롯한 항일음악을 국가로 채택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애국가를 바꾸자는 여론이 나온 배경이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직은 애국가 변경 여론이 거세지 않은데다, 이념 논쟁이 틀림없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안익태 친일 논란이 커지자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 등은 안익태의 친일 전력을 ‘작은 허물’로 치부하고, 국가 교체 요구를 ‘좌익의 선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후폭풍이 만만치 않음이 예고된 마당이라, 안익태 비판을 넘어 대안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좀처럼 조명 받지 못하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소리꾼 임진택(창작판소리연구원 예술총감독)이 최근 우리 민요 아리랑 곡조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새로운 애국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안익태 애국가’를 넘어설 ‘아리랑 애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한 셈이다. <프레시안>은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임 총감독을 만나 주장의 배경을 확인했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협동조합 이사장이 진행했다. 임 총감독이 편곡한 ‘아리랑 애국가’는 기사 최하단 동영상으로 들어볼 수 있다.
임 총감독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서편제 보성소리 명창 정권진 선생의 제자가 되어 소리에 입문, 1985년 창작판소리 ‘똥바다’를 작창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리꾼의 길을 걸었다. 한국 민중문화운동의 첫 세대로 마당극을 주창했으며, 우리 전통문화인 탈춤과 판소리가 민주화운동, 민중예술운동과 결합하게끔 이끈 인물로 첫 손에 꼽힌다. 서울대 외교학과(정치외교학부) 출신의 소리꾼이라는 흔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 임진택 창작판소리연구원 예술총감독. ⓒ임진택 제공
“친일파 애국가 불러서는 곤란”
프레시안 : 최근 기존 애국가를 안익태 작곡이 아닌 우리 민요 아리랑에 얹어서 부르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 계기가 뭔가?
임진택 : 전제해야할 사실이 있는데, 국가(國歌)와 애국가는 다르다. 우리나라는 아직 국가를 공식 제정한 바가 없다. 현재 불리는 ‘안익태 애국가’는 공식적인 국가가 아니다. 애국가에 관한 현행 규정은 대통령 훈령 제368로 ‘국민의례 규정’이고, 법률적 근거는 전혀 없다.
임시정부 시절에도 공식 국가 없이 다만 ‘대한인 애국가’를 만들어 불렀을 뿐이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된 후에도 국가가 제정된 일은 없다. 다만 우리 애국가를 남의 나라 곡조(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부르는 것이 수치스런 일이라는 여론이 있어 대통령 훈령으로 안익태 작곡 곡조를 보급했는데, 그 후 이 ‘안익태 애국가’가 자연스럽게 국가로 간주됐다. 하지만 국가와 애국가는 개념이 다르고, 국가는 하나여야 하지만 애국가는 여럿이어도 상관없다는 점, 이 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안익태가 친일파라는 사실은 예전에도 논란이 됐는데, 최근 이해영 교수가 <안익태 케이스>라는 책을 내면서 그의 친나치 경력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올해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곧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다. 친일 부역자가 만든 곡을 애국가로 계속 부르는 건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안익태 애국가’를 더는 부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이가 적지 않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누구도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로 보였다. 오랫동안 널리 불린 현행 애국가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국민 여론이 여전히 높다는 배경도 있을 것이다. 지난 1월 어떤 여론조사를 보니 애국가 교체 반대 응답자 비율이 거의 60%(리얼미터 조사 결과 58.8%)였더라.
그런데, 이 반대 여론이 온전히 ‘안익태 애국가’를 사수하자는 여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부는 애국가 변경 논의를 일종의 반역 행위로 곡해하는 이도 있겠으나, 대다수 사람은 막상 바꾸자고 해도 그 방향과 대안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테니 일단 신중하자는 생각을 더 크게 했으리라고 본다. 또 일부는 어차피 통일되면 국가를 바꿔야 할 텐데, 그 때 논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다’는 게 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대안을 먼저 제시하자. 그것도 예술계에서, 평생 문화운동을 한 사람이 먼저 대안을 제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나선 거다. ‘이런 애국가는 어떠냐’고 사람들에게 제안하고, 이를 바탕으로 토론이 일어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많은 곡 중 왜 하필 아리랑인가?
임진택 : 내가 제안하고 있는 ‘아리랑 애국가’의 ‘아리랑’은 정확히는 1926년 나운규가 제작 감독 주연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다. 영화 <아리랑>에 나오는 주제곡의 가사는 나운규가 썼고 편곡은 김영환이라는 음악인이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경기지방 아리랑을 바탕으로 편곡한 곡조로 본다. 원래 아리랑은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각기 다른 곡조와 가사로 전승됐는데,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리랑은 바로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이다.
‘나운규 아리랑’은 1926년 영화 상영 이후 오랜 시간 우리 국민 사이에서 애국가 이상으로 사랑받아 왔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람 누구에게나 사랑받은 곡이다. 특히 해외 동포에게 아리랑의 영향력은 애국가보다 더 클 것이다. 적잖은 외국인도 아리랑을 알고 있다. 우리의 역사성과 특수성, 보편성을 모두 갖춘 곡이다. 지역과 파벌, 좌우 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알고 좋아한다. 아리랑을 우리 애국가로 부르면 이른바 ‘친일 애국가 논란’을 깔끔히 넘어설 수 있지 않겠나.
“아리랑은 한국인 누구나 아는 곡”
프레시안 : 예술인으로서 친일 논란을 넘어, ‘안익태 애국가’에 비해 ‘아리랑 애국가’가 갖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임진택 : 근대국가의 국가라면 보통 그 나라의 독립·해방·건국 과정의 지난했던 시기를 통해 축적되고 걸러져 호소력과 보편성을 갖는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이기 마련이다. 많은 나라가 혁명가나 독립군가를 국가로 선택한 이유다. 애초 (친일부역 논란을 떠나) 특정 개인이 작곡한 음악을 국가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 아리랑은 어떤가? ‘나운규 아리랑’에 특정 작곡가의 편곡이 가미되었다고는 하나 이 곡은 애초 전통 민요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겨레의 혼을 담은 민족의 노래고, 민중의 노래다. 아리랑 자체로 애국가다. 아리랑을 애국가의 곡조로 차용할 명분과 자격은 차고 넘친다.
혹자는 아리랑 곡조에 비애의 정서가 너무 강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아리랑 애국가’는 아리랑 곡조에 애국가 가사를 그대로 입히는 소위 ‘노가바(가사를 바꾼 노래)’ 형식이 아니라, 아리랑의 ‘받는 소리’와 ‘메기는 소리’, 애국가의 본가사와 후렴구를 교차시키는 구성을 시도했다. 단순 반복성을 넘어 다채로운 역동성이 살아나도록 구성을 달리 했다.
아리랑은 3박자 리듬의 전통 민요가락이라 국악 연주와 결합하는 것이 제격이지만, 편곡하면 서양 오케스트라와의 결합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민요조로의 합창 뿐 아니라 성악곡으로서의 합창 역시 가능하다. 악기 편성과 템포에 따라 제의적 기념행사는 물론 취주악, 행진곡으로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프레시안 : 이미 임 총감독이 ‘아리랑 애국가’ 편곡까지 완료한 상태다. 동영상까지 제작했더라. 주변 반응이 호의적인가?
임진택 : 편곡이랄 것은 없고, 구성 연출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4월 11일 날짜에 맞춰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동영상을 제작했다. 일단 세상에 곡을 내놓았으니 이제부터 차근차근 준비해나가야 한다. 내가 인사동 소리방에서 회원들에게 ‘아리랑 애국가’를 불러주었더니 다들 금방 따라하더라.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에서 진행하는 치유판소리 모임에서도 함께 불러보니 다들 신나했다.
지난달 27일 DMZ인간띠잇기 행사에 참가하는 ‘3.1혁명과 임시정부100주년기념사업 시민위원회’가 탄 버스에 동승한 김에, 참석자들에게 ‘아리랑 애국가’를 소개하고 가르쳐 드렸다. 반응이 아주 좋았다. 아리랑과 애국가의 결합이 처음 시도됐으나, 사람들에게는 이 곡이 이미 익숙하다.
다시 말하지만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다. 올해 정말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진정 모든 국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애국가를 만드는 일이라고 본다.
아리랑이야말로 탈이념적 곡
프레시안 : 앞으로 ‘아리랑 애국가’를 홍보하고 보급할 새로운 계획이 있나?
임진택 : 현재 제대로 된 이 곡 홍보영상을 만들 합창단 섭외를 논의 중이다. 앞서 급히 만든 영상에서는 내가 소리북을 치면서 날라리와 깽쇠, 장고 등 간단한 국악기로 반주했지만, 가능하다면 서양 오케스트라를 편성해 제대로 된 합창곡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우리 민족의 선율에 기반한 ‘아리랑 애국가’가 얼마나 훌륭한 국가의 격을 갖출 수 있느냐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국민 다수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각급 학교에서 ‘안익태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를 부르는 운동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이런 일은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 아니냐는 얘기도 있지만, 정부가 나설 경우 필요 이상의 이념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 민간의 힘으로 우선 시작하는 게 맞다고 본다. 뜻을 함께 하는 각계각층 시민들과 더불어 가칭 ‘아리랑 애국가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국민운동으로 추진해보려 한다.
프레시안 : 안익태 논란을 대하는 자유한국당이나 보수 언론의 태도를 보면, 이념 논쟁은 불가피해 보인다.
임진택 :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남북 단일팀 구성을 논의할 때 경기장에 공동입장하면서 들고나갈 깃발로 남북이 한반도기를 구상해냈다. 경기장 안에서 공동으로 국가가 울려야 할 때 어떤 국가를 내보내야 하나? ‘아리랑 애국가’만한 대안이 더 있겠나? 한반도기와 같은 역할을 ‘아리랑 애국가’가 할 수 있다고 본다.
통일 후 새로운 국가를 정하고자 할 때 남북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대안으로 ‘아리랑 애국가’만한 답이 있겠나? 가사가 문제라면 그때 가서 별도로 상의하면 될 일이다. 이념과 사상을 넘어 한민족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0순위 곡목이 바로 아리랑이고, ‘아리랑 애국가’라면 그 대안을 준비하는 마중물로서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2019-05-04> 프레시안
☞기사원문: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