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회의·민족문제연구소 주최 학술세미나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문단의 적폐,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가 열렸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이번 세미나에서 다룬 문학상은 동인문학상(조선일보)과 팔봉비평문학상(한국일보)이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기조 강연으로 시작된 세미나는 동인문학상과 관련해서는 고인환(경희대), 하상일(동의대), 임성용(시인)의 발표와 서영인(국민대), 이동순(조선대), 손남훈(부산대)의 토론이, 팔봉문학상 관련해서는 이명원(경희대)의 발표와 최강민(우석대)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임헌영 소장은 친일파 청산이 ‘빨갱이’로 매도되는 현실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공인된 친일판단기관으로 자리 잡게 됐다고 회고했다. 또 친일문학상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설정함으로써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폐지라는 성과를 거뒀다며 문인 사회의 관심과 노력이 한층 더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친일문학상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설정함으로써 <중앙일보>의 미당문학상 폐지라는 성과를 거두었다며 문인 사회의 관심과 노력이 한층 더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 권위상
학자들의 발제와 토론 가운데 김동인 관련 논의를 중심으로 김동인의 문학과 해방 후 그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기왕에 알려진 동인의 친일 행적이 주로 문학을 통해 드러난 부역이라면, 해방 후의 활동에서 드러난 것은 친일 경력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집요한 노력이다.
1945년 8월 15일, 김동인은 총독부 정보과장을 찾아가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해방 당일까지 일본의 패망을 눈치채지 못했던 김동인에게는 ‘친일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아예 없었다.
김동인, 친일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없었다.
김동인은 해방 후 발표한 <망국인기>를 통해 문예지 <창조>에서 주장한 ‘참예술’에 대한 신념 아래 ‘조선어(조선문학)’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당당하게 진술했다. 그는 자신의 문학이 무엇을 표현하든, 오직 조선어를 지켜 쓸 수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김동인의 이른바 ‘예술가소설’에서 드러나는 “예술가는 창작을 위해 살인, 발광 등 온갖 일상적 금기를 깨뜨릴 수 있고 또 그런 것이 긍정될 수 있”다는 태도와 이어진다. 그에게는 창작을 위해 일제에 협력해 지원병과 징병에 응하라고 선동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식(현실 인식)이 부재한 예술지상주의자의 초라한 몰골”이었다. 김윤식이 김동인은 “문학의 이름으로 눈멀고 귀먹었”다고 이른 것은 이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김동인의 친일 부역은 현실을 외면한 ‘극단적 미학주의’가 초래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또 ‘문학(예술)’이라는 가치를 절대화함으로써 김동인의 문학과 삶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했다.
“… 사흘째 불을 때지 못한 방바닥은 정말 얼음장 이상으로 찬 기운이 거의 체온을 잃은 선생의 뼛속까지 스며든다. 누운 자리 옆에는 가족이 피난을 떠나면서 사다 놓은 빵조각의 그대로 말라비틀어져 있다. 그러니까 선생은 오늘 사흘째 몽땅 굶은 셈이다.
밖엔 거센 바람이 분다.
어디에선지 색다른 함성이 들려온다.
한두 방 소총 소리가 가까이서 난다.
-백철, ‘고 김동인 선생의 인간과 예술’, <신천지>(1953.6) 중에서(세미나 자료집에서 재인용, 이하 같음)
김동인은 1949년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이듬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나 피난을 떠나지 못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는 1951년 1월에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고인환은 백철이 그의 죽음을 상상해 기록한 윗글이 김동인의 문학사적 평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 첫 발제자 고인환(경희대), 토론자 서영인(국민대) 교수 ⓒ 권위상
백철의 감상적 회고는 김동인의 죽음을,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한국전쟁으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북한 출신 문인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김동인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동정적 인정주의를 확산하면서 일제강점기에 그가 저지른 반민족적 친일행위의 심각성을 축소하게 했기 때문이다(이상, 고인환의 발제 ‘김동인의(에 대한) 회고’ 참조).
김동인은 해방 후, <망국인기>(亡國人記) <속 망국인기> 등을 통해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변명했다.
소설 <반역자>와 <망국인기> – 망각과 왜곡의 서사
하상일(동의대)의 발제 ‘해방 이후 김동인의 소설과 친일청산을 위한 자기합리화’는 이 점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하상일은 일제 말 친일 협력 문인들에게 해방 이전의 친일 협력적 글쓰기와 해방 이후 친일청산의 과제는 당면한 현실의 위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발적 생존 전략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라며 이들의 해방 이후의 글쓰기에 나타난 ‘망각과 왜곡의 서사’를 주목했다.
친일문인들은 자신의 친일청산 과제를 수행하고자 친일문인으로 지탄받았던 다른 문인들에 대한 비판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는데 김동인도 다르지 않았다. 김동인은 특히 이광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반역자>(<백민> 1946.10.)로 춘원의 친일 행적을 비판했다. 그것은 일제 말 자신의 행적은 친일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친일문인 비판의 중심에 있었던 이광수와의 철저한 거리 두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일제에 영합하지 않고자 끝까지 조선어를 사용하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노력한 문학주의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자기합리화에 바탕을 둔 소설을 통해 그는 일제 말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쏟아질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다.
“작가로서 재출발함에는 춘원에게는 ‘진실’이 요망되고 민족의 일원으로 재출발함에는 참회와 회오와 솔직한 사죄가 요망된다. 요망을 지나쳐서 명령된다.”
김동인이 소설 속에서 시도한 이광수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이광수에게 ‘진실’, ‘참회’, ‘회오’, ‘사죄’ 등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부각했다. 그는 이광수에 대한 직접비판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부정하는 방어 논리로 유효하다고 여길 만큼 노회했다.
실제로 소설에서 표면적으로는 이광수를 직접비판하고 있지만, 교묘한 변명의 논리를 끼워 넣고 있다. 오직 민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춘원의 생애가 해방 이후에 ‘반역’의 삶으로 규정되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냉소의 형식으로 말이다.
그는 또 <망국인기>(<백민> 1947.3.)와 <속 망국인기>(<백민> 1948.3.) 등 자전소설을 발표하여 자신은 ‘평생을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자리에서 문학이라는 순수성을 지켜오는 데 힘썼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를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 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에서의 저항 행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망국인기>는 해방 직후 서울의 주택난을 제재로 김동인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드러내고 <속 망국인기>는 해방 이후 미 군정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망국인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상 식민지배에 부역한 자신을 피해자로 왜곡하고 있는 작품이다.
“즉 그 김동인이는 과거 오십 년간 단 한 가닥의 길(영리 행위가 아닌)만을 걸어왔고, 더욱이 최근 한동안은, 조선어 사수(死守)를 위하여 총독부 정보과(情報課)와 싸우고 싸우고, 8.15 그날까지도 이 일로 싸워 온 사람임을, 조선이라는 국가가 있고, 그 국가에서 과거의 공로자에게 어떤 보상을 한다 하면, 마땅히 김동인이에게는 어떤 정도의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해방되었다는 이때, 집 한 간 없이 가족이 이산하게까지 된다면 이것은 도리가 아니요 대접이 아니다.” – 소설 <망국인기> 중에서
‘조선어 사수를 위하여 총독부와 싸운 공로자’라는 김동인의 자기 인식에서 드러나는 것은 친일 부역 활동에 대한 철저한 망각과 왜곡이다. 여기엔 “애국열과 보국 정신을 붓의 힘을 빌어서 국민에게 환기시켜 천황폐하의 은혜와 나라의 은혜에 대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다고 썼던 김동인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김동인의 해방 후 소설, 친일 행적에 정당성 부여
하상일은 해방 이전의 친일행위와는 달리 친일 행적을 은폐하고자 한 김동인의 해방 후 소설이 그의 친일 행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왜곡된 근거로 삼고 있는 점을 우려한다. ‘문언유착과 문학권력의 제도화- 조선일보와 <동인문학상>을 중심으로'(<작가와 비평> 2004년 상반기)에서 밝힌 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밖에도 임성용(시인)은 발제 ‘김동인 소설에 나타난 반여성성과 식민지 민족주의의 왜곡- <감자>와 <붉은 산>을 중심으로’를 통해 김동인 소설의 문제점을 살폈다. 그는 이러한 점을 토대로 “언론사가 문학을 문화적 지배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삼는 것”을 문제라고 지적했다.
마지막 발제자 이명원(경희대)은 ‘기억과 책임의 분식 – 팔봉비평문학상의 폐지 문제’를 통해 김팔봉(기진) 같은 신문학의 개척자이면서 친일부역에 종사한 문인은 ‘기념’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기억’돼야 할 인물이라고 밝혔다.
문학 활동 계승은 종합적인 비판과 성찰로, 친일문학상은 폐지돼야
그는 문인과 문학 활동에 대한 계승은 종합적인 비판과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며, 일제 말기의 글쓰기와 행적은 저널리즘은 물론 문학사적 연구에서도 논의되지 않는 기형적 상황을 환기했다.
한편, 그는 팔봉비평상의 수상자들은 김현의 수상 이래 동시대 한국 문단의 문학 권력이자 상징적 지위를 점한 이들이어서 한국문학사에서 ‘친일=대일협력’ 문제는 초점화되지 않고, 분식됐다고 지적하면서 이 문학상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일문학상 문제는 단순히 한 문인을 기리는 방식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 근대사의 문제이면서 한국 문단의 구조, 문인들의 등단 방식, 특정 문예지 중심으로 형성되는 문인 커뮤니티, 출판 자본과의 관계 등 상상을 뛰어넘는 복합적인 문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임성용 시인이 제시한 해법이 정곡을 찌르고 있지만 그게 현실에서 쉽사리 작동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이러한 친일문학상을 없애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국 문단의 평론가, 대학교수, 소설가, 문학 지식인들이 조선일보가 모시고 조선일보가 하사하는 ‘동인문학상’ 심사에서 손을 떼고 작가들은 수상을 거부하면 된다. 그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 임성용, ‘김동인 소설에 나타난 반여성성과 식민지 민족주의의 왜곡’ 중에서
<2019-05-1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동인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