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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문학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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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얼마 전 흥미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11일 오후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열린 친일문인기념문학상 관련 세미나에서였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이 세미나 기조강연에서 임 소장은 지난해 작고한 소설가 최인훈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한 후원금을 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임 소장 역시 그 일을 모르고 있었는데, 최인훈의 아들 최윤구(음악 칼럼니스트)씨가 부친 장례 뒤 자신을 찾아와 전후 사정을 들려줘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 그에 따르면 최인훈은 자신이 <친일인명사전> 후원자로 이름을 올리면 불필요한 잡음이 일어날까 염려해 아들 이름으로 후원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친일인명사전> 후원자 명단에는 최윤구씨의 이름이 올라 있다.

임 소장은 이날 강연에서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사례 역시 들려줬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파인 김동환과 그 아들 김영식씨 이야기였다. 파인 김동환은 여느 친일 문인들과 달리 해방 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했으며 회고 글에서도 자신의 친일 행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반성한 바 있다. 경찰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김영식씨는 아버지의 친일 글들을 가감 없이 담은 작품 전집을 간행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1994년에 낸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이라는 책의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 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그러나 최인훈-최윤구나 김동환-김영식 같은 부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씨는 2010년 <근대서지>에 쓴 글 ‘아버님에 대한 추억’에서 “최근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좌익 단체에서 아버님을 친일파로 몰아붙였다. 그 이전에는 친일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는데(…)”라며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그 어려움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일방적인 시각으로 인민재판식의 오만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얼마 전에 낸 산문선집 <인연 없는 것들과의 인연>에는 그가 1973년에 쓴 글 ‘작가와 상황―친일파 작가에 대한 변명’이라는 글이 들어 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그는 ‘문단 반세기’라는 연재 기사에서 춘원 이광수의 친일 훼절을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그 글을 읽은 춘원의 딸 이정화씨가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미국에 거주하던 춘원의 딸은 그 편지에서 “딸로서 아버님 역성을 아니 들 수가 없습니다”라며 “아버님의 애국심이란 열렬하셨습니다. (…) 민족 위해 친일했다는 뜻을 그대로 독자들이 들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자신의 친일이 어디까지나 민족애의 발로였다는 부친의 주장을 되풀이한다.

‘문단 반세기’에서 친일 활동으로 거명된 당사자가 “그 당대에 살아보지 않고 그 시절의 분위기를 체험하지도 못하면서 친일작가 운운하는 것은 무책임한 객기”라 비난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도 김병익의 태도는 단호하다. 그는 “그들이 친일로 훼절한 것은 역사와 정의에 대한 민족적 반역”이라며 “비평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후대인의 권리이며 당대인의 소유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썼다.

11일 세미나에서 팔봉 김기진과 팔봉비평문학상의 문제점에 대해 발표한 이명원 경희대 교수의 말을 이와 관련해 새겨봄직하다. “문인들의 유족이 문학상과 문학사적 평가에 개입하는 것은 월권이다. 사적인 회고와 엄정한 문학사적 평가는 분리해야 한다.”

춘원과 동인, 파인과 팔봉 등의 친일 행적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이 협박에 의한 것이든 판단 착오에 따른 것이든 친일 행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다음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생산적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기리는 일 아닐까.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부친의 중국 침략전쟁 참전과 살육 행위에 대해 고백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모호하고 수상쩍은 태도와는 별개로, 하루키의 그런 고백은 소중하고 바람직하다.

bong@hani.co.kr

<2019-05-16> 한겨레 

☞기사원문: [최재봉의 문학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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