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운동 이유로 처형… 유족 등 “학암 이관술 선생 유공자 서훈 검토해야” 움직임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사회주의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 당하고 가족들까지 고통 받았던 울산 출신 학암 이관술(1905-1950) 선생의 재조명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등은 “학암 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유공자 서훈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약산 김원봉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유공자 서훈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라, 이들의 활동이 더 주목된다.
앞서 이관술 선생 유족은 지난 2012년 “학암 선생이 국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국가가 유가족들에게 그동안 입은 피해를 배상을 해야 한다”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같은 대법원 판결에도 이관술에 덧씌워진 ‘빨갱이’ 프레임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에 지난 4월, 시민사회단체와 연구자, 이관술의 후손은 뜻을 모아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재조명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울산 동구 지역구인 김종훈 의원(민중당)이 주관한 ‘항일운동가 이관술 국회 세미나’가 22일 오전 10시30분 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열렸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우리역사바로세우기운동본부가 후원했다.
해방 후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로 꼽힌 이관술
1902년 울산 입암에서 출생한 이관술은 서울 중동고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동덕여고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학암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1930~40년대 국내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수배, 체포를 거듭하며 투옥돼 모진 고문을 겪었다.
해방 직후 잡지 <선구>의 최초 정치여론조사(1945.12)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5위에 선정될 만큼 현대사 속 중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해방 직후인 1945년 발생한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일제가 사용하다가 남겨둔 지폐원판을 이용해 거액의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으로 1946년 체포돼 주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 투옥됐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법 절차를 위반하며 처형했다.
유가족과 일부 학자들은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을 미군정이 주도해 조작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학암 이관술은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4명의 딸을, 두 번째 부인과는 1명의 딸을 두었다. 하지만 장녀의 남편은 장인이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에 가입해 처형당했다. 둘째 딸과 둘째 부인 및 그 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현재 유일한 유족은 막내딸(85)로, 지난 2012년 국가 상대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서 명예를 되찾았다. 현재 시민단체 등과 함께 아버지 이관술 재조명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비운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명예회복 필요”
한편 이날 열린 세미나에서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연구해온 역사학자와 항일운동사를 다루어온 작가 등이 이관술 재조명을 위한 주제 발표에 나섰다.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사상’이란 제목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반병률 교수가 기조 강연을 진행하고, 주제 발표자로 나선 역사학연구소 최규진 박사가 ‘1930년대 정세변화와 민족해방운동의 방향전환’을 발표했다.
이어 <경성트로이카>를 쓴 안재성 작가가 ‘나의 조국은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란 제목으로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집중 조명했다. 또 ‘정판사 위폐사건의 조작과 진실’이란 제목으로 임성욱 박사가 해방 직후 최대의 정치사건 중 하나인 조선정판사사건이 조작됐음을 주장했다. 이후 손문호 전 서원대 총장의 진행으로 자유토론이 진행됐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 배성동 공동대표는 “이관술 선생은 부유한 유력가문의 엘리트 지식인이란 지위를 모두 버리고 최전선에서 항일투쟁에 나섰다”며 “해방 후 이념 대립에 희생된 비운의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행사를 주관한 김종훈 의원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은커녕 빨갱이로 낙인 찍혀 후손들까지 피해를 입어왔다”며 “이관술 선생의 경우에도 최근 국가 상대 손배소에서 유족들이 승소하면서 진실이 조금씩 밝혀졌지만 역사적 재조명은 여전히 미약하다”고 개최 취지를 설명했다.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이관술의 독립운동자 유공자 신청을 하고 독립운동마을조사, 이관술유적비 복원, 이관술기념관 등의 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2019-05-2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했는데 ‘빨갱이’ 낙인… “재조명해 유공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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