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만초천 물길이 남겨놓은 흔적, 갈월동 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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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 앞쪽에서 남산 방향으로 담아낸 거리 풍경 사진에는 양 갈래 일방도로의 모습이 잘 포착되어 있다. 오른쪽이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개설된 효창원 진입도로이고, 왼쪽이 1976년에 추가 개설된 통행로이다.
한때 만초천 물길이 흘러내리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갈월동 굴다리’의 최근 모습이다. 일제가 만초천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직선화한 이후에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 돌변하였고, 효창원 진입도로의 기점으로 설정된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에 나타난 만초천 물길의 유역 변경 상황이다. 가운데 경부선 철길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새로 뚫린 개천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옛 본류였던 곳이 지류의 기능을 하는 형태로 바뀐 모습이다.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갈월)에서 갈월동 지하차도를 지나 효창공원 방향으로 길을 걷다보면 해마다 봄꽃향기 그윽한 이팝나무 가로수길을 저절로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이 길은 특이하게도 200미터 남짓 일방통행로가 이어지다가 중간지점에서 숙명여대 쪽에서 내려오는 도로와 합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가지 교통지도를 살펴본즉 와이(Y) 모양으로 펼쳐진 두 갈래 일방통행도로 가운데 ‘원효로 지구대 청파치안센터’가 있는 방향으로 빠지는 길이 직선 형태로 배치된 걸로 보면, 이쪽이 원래부터 있던 옛길이고 숙대입구역 쪽으로 난 것이 뒤늦게 새로 난 길인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몇 가지 신문자료를 찾아보니 <경향신문> 1976년 8월 7일자에 수록된 「숙대 앞 도로확장공사기공식」 제하의 기사가 눈에 띈다.

용산구 관내 주민의 오랜 숙원사업인 청파동~숙명여대앞 도로 확장 기공식이 5일 상오 10시 용산구청에서 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보상비 2억 원과 공사비 5천만 원을 투입, 오는 10월말 완공할 이 공사는 노폭 3미터를 15미터로 확장하는데 총연장 600미터 중 숙명여대 쪽 200미터는 현재의 도로를 확장만 하고 나머지 400미터는 동쪽으로 비스듬히 신설한다.

<조선철도여행안내> (1915)에 수록된 「경성 급 용산」 지도 자료에는 만초천 물길이 경부선 철도와 교차하여 흐르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의 ‘갈월동 굴다리’(위쪽 동그라미)를 통해 물길이 철길의 동쪽으로 나갔다가 삼각지 인근의 지하수로(아래쪽 동그라미)를 거쳐 다시 서쪽으로 넘어오는 형태이다

이 기사에는 확장구역이 200미터, 신설구역이 400미터라고 작성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그리고 신설된 도로가 놓인 방향은 장차 용산고등학교 쪽과 일직선 형태로 관통시키려는 도시계획선에 맞춰 설정되었으며, 실제로 경부선 철길로 양분되어 있던 두 지점은 한참 더지나 1993년 1월 28일에 이르러 2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갈월동 지하차도’가 개통되면서 비로소 완전히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곳 ‘갈월동 지하차도’에서 불과 80미터 남짓 남쪽으로 내려간 지점에도 또 하나의 자그마한 굴다리가 있으니, 이것이 ‘갈월동 굴다리’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굴다리가 만들어진 연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자료를 추적하면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이 자리가 바로 만초천(蔓草川) 물길이 흐르던 흔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하천을 일컬어 욱천(旭川, 아사히카와)이라고 하였고, 이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습관적으로 이 명칭이 오래도록 사용된 시절도 있었으나 이것이 진즉에 폐지되었어야 할 일제잔재라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만초천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간혹 만천(蔓川)이라는 표현으로도 등장하며, 만천평(蔓川坪)의 용례도 곧잘 눈에 띈다. 또한 <수선전도(필사본)> (연세대 박물관 소장자료)에는 특이하게도 우리말로 ‘너추내’라는 표기가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른바 ‘용산팔경(龍山八景)’에도 ‘만천해화(蔓川蟹火, 만초천에서 게잡이를 하는 불빛)’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한다. 고종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만초천의 물길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경성 서쪽 모악(母岳)에서 발원하여 성을 감싸고 돌아 남쪽으로 흐르며, 반송방(盤松坊)의혁교(革橋)와 돈의문 밖 경영교(京營橋, 경교), 소의문 밖 신교(新橋)와 이교(圯橋, 헌다리), 숭례문 밖 염초청(焰硝廳), 청파 남쪽의 주교(舟橋, 배다리)를 거쳐 만초천을 이뤄 서남으로 흘러 용산강(龍山江)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상태에서 만초천 유역의 지형변화가 촉발된 계기는 1899년 경인철도의 등장이었다. 이때 경성정거장(京城停車場, 통칭 ‘서대문정거장’)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구간은 대개 만초천의 물길을 서쪽으로 끼고 철도선로가 부설되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곧이어 경부철도의 착공과 더불어 남대문정거장이 종착역으로 설정되면서 이러한 변화는 크게 가속화하는 상태로 바뀌었다.

1902년 7월 11일에 작성된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 부지협정도(京釜鐵道 南大門停車場 敷地協定圖)」에 따르면 원래 8,800평이던 경인철도 남대문정거장 부지는 29,872평의 규모로 크게 확장되는 것으로 정해졌고, 이에 따라 숭례문에서 청파, 돌모루, 당고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삼남대로(三南大路)가 폐쇄되는 한편 전차선로를 겸한 우회도로인 ‘갈월가도교(葛月架道橋, 동자동과 갈월동 경계면의 쌍굴다리)’가 새롭게 개설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결과로 오랜 세월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의 필수 경유지였던 청파 배다리는 한쪽으로 방치되어 용도가 사실상 폐기되었고, 기존의 물길 흐름을 피해 곡선구간으로 건설된 경인철도역시 일직선(一直線)으로 변경됨에 따라 하천이 철길의 양쪽을 넘나드는 형태로 바뀌고 말았다. 말하자면 만초천과 경부선 철로가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갈월굴다리’였고, 이곳보다 남쪽으로는 물길이 철길 동쪽으로 일단 건너갔다가 지금의 삼각지 부근에 이르러 철길 아래를 관통하여 다시 서쪽으로 넘어오는 광경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보다 좀 더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 남대문정거장 일대의 대규모 개축공사가 다시 벌어지면서 만초천의 물길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경성일보> 1919년 2월 21일자에 수록된 「남대문역 개축 설계」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지형 변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19년 이후 본격 개시된 남대문정거장 확장공사에 따른 만초천 하상이설공사를 통해 직선화한 개천으로 변신한 만초천 일대(경성역 후면)의 전경사진이다. (경성부, <경성부사> 제2권, 1936)

역(驛)의 서부를 흐르는 하상(河床)은 상류 서소문 외 합동(蛤洞) 부근에서 일직선으로 남쪽을 향하도록 교체하고, 현재의 하상 위치는 이를 매립하여 역 구내에 이용하고 곳곳에 교량을 가설하며 …… 새로 변경하는 하상의 폭원(幅員)은 8칸(間; 1칸=1.818미터)으로 이에 부수되는 도로는 10칸 폭이 될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경성일보> 1919년 2월 26일자에 수록된<남대문역 개축에 앞서 가정거장(假停車場)이 등장, 도로의 개수와 욱천(旭川)의 부체(付替)> 제하의 기사에도 만초천 개수공사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만철 경관국(滿鐵 京管局,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에서는 …… 그 도로는 남대문에서 의주통과 중림동의 경계가 되어 있는 욱천 석교(旭川 石橋)까지 12칸(間) 폭의 도로를 하나 신설하는 동시에 동(同) 석교에서 청엽정(靑葉町, 청파동) 1정목에 이르는 도로 약 420칸 가운데 약 280칸을 10칸 폭으로, 나머지 140칸을 6칸 폭으로 개수하여 화물 집산에 편리토록 하기로 되어 있고, 그래서 이 개수구역 내에 있는 천 이백 가옥(家屋)은 4월 말일까지 이전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덧붙여 굽어 있는 욱천(旭川) 780칸 가운데 420칸의 부체공사(附替工事)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이 부체공사는 토지매수비를 제외하고 약 6만 6천 원의 예정으로 있다. (하략)

이때 시도된 직선화 공사로 인해 만초천의 물길은 일체가 경부선 철길의 서쪽으로 옮겨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렇다고 경부선 철길의 동쪽에 남겨진 옛 만초천 본류(本流)가 매립되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는 여전히 용산중학교와 경성제이고등여학교 앞을 흘러 내려오는 후암천(厚岩川)이 존재하였고, 이태원리(利泰院里)에서 시작되어 일본 병영지 안을 관통하고 이른바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 삼각지 부근 병기지창 앞 도로에 놓인 다리)’를 거쳐 흘러가는 지류(支流)가 모여드는 통로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하천의 기능을 상실한 경부선 철길과 만초천의 교차 지점은 ‘굴다리’ 형태로 전환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곳은 기찻길로 차단되어 있던 갈월동 쪽과 청파동 쪽을 손쉽게 이어주어 교통의 요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실제로 1935년에 제작된 「경성전차버스안내도」를 보면, 서계동 버스차고에서 출발하여 중림동, 봉래정, 경성역전, 길야정(吉野町), 남묘 앞, 선은 사택 전(鮮銀舍宅前), 삼판(三坂), 용중전(龍中前, 용산중학교), 제이고녀전(第二高女前, 경성 제2고등여학교), 야포대(野砲隊) 입구를 경유하는 순환버스가 이곳 굴다리를 거쳐 청파동 쪽으로 넘어간 다음, 효창원(孝昌園)과 녹구(綠丘, 미도리가오카) 정류장을 지나다닌 것으로 확인된다.

오카다 코의 기고문(<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수록된 이른바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의 모습이다. 이 물길은 이태원리 일대에서 시작되어 일본군 병영지를 관통하여 흐르는 만초천 지류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나, 정작 이 하천을 지칭하는 명칭이 뭔지는 아직 들어보질 못했다.
경성제이고등여학교(해방 이후 수도여고 자리) 교문 앞에 걸쳐 있는 ‘갈월교(葛月橋)’의 모습이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것은 통칭 ‘후암천’의 물길이며, 이 역시 만초천으로 합류하는 지류의 하나이다. (<일본지리풍속대계> 제16권, 1930)

이리하여 ‘갈월동 굴다리’는 자연스레 효창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까닭에 1927년에 개설된 효창원 진입도로는 바로 이 지점에 맞춰 공사설계가 이뤄진 바 있다. 그러니까 이때 개설된 효창원 진입도로가 곧 오늘날 양 갈래 일방통행로의 한쪽을 이루고 있는 ‘원효로지구대 청파치안센터~숙명여대’ 구간인 것이다.

이 도로의 개설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7년 8월 18일자에 수록된 「효창원에 신작로(新作路), 통학상 편의」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경성부 도로개수의 금년 예정계획으로 되어 있는 청엽정(靑葉町) 2정목과 3정목의 간선(幹線) 279칸(넓이 5칸) 지도(枝道) 45칸(넓이 3칸 5부) 도로 국부개선공사는 금월중으로 기공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지도는 청엽정과 효창공원(孝昌公園) 사이의 연락을 목적으로 하는 외에 효창공보교(孝昌公普校)로 통하는 도로가 아직 개수되지 않았으므로 통과 또는 통학상 불편한 점이 적지 않으므로 그렇게 새길을 내는 것이라더라.

해방 이후 1962년 8월 22일에 이르러 서울역 뒤에서 원효로에 이르는 만초천 2킬로미터 가운데 원효로 상류 쪽 약 300미터 구간에 대한 복개공사에 착수하는 한편 만초천 본류의 잔여 구간에 대해서도 그 이듬해에 연차적으로 공사가 개시되었다. 이와 함께 수도여고 앞을 흐르던 후암천에 대한 하천복개공사도 동시에 진행되면서 청파동 주변의 만초천은 점차 땅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1967년 8월 15일에는 남영동 굴다리와 삼각지 구간(길이 515미터, 폭 15미터) 역시 복개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이제는 물길의 흐름 자체를 구경하기가 무척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비록 옹색한 몰골로 남았을지언정 그나마 ‘갈월동 굴다리’ 하나만이 이곳이 유서 깊은 만초천 물길이 흘러내리던 옛 흔적이라는 사실을 묵묵히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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