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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속 친일파 묘… 이장 어렵다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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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민주올레46] 동작지역 독립운동·민주화운동 역사탐방-서울현충원 친일파길(장군묘역)

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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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서울현충원 장군묘역 국립 서울현충원에는 <장군 제1묘역>, <장군 제2묘역>, <장군 제3묘역>이 있는데, 여기에 일제 강점기 일본군 장교였던 친일군인들의 무덤도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

친일청산 실패와 현충원 친일파들

현충원에 친일파들이 묻혀 있는 현실에 대한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1993년 사망한 임시정부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1900~1993)이 “내가 죽거든 친일파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라고 유언했겠는가(관련 기사 : “국립묘지엔 묻지말라”던 임정 마지막 비서장, 왜냐면).

현재 현충원에는 대전현충원까지 포함해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2005~2009)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1명의 무덤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63명의 친일파가 있다.

현충원에 친일파들이 다수 묻혀 있는 이유는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하는 과정에서 제1과제로 떠올랐던 친일청산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우리의 아픈 역사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이 국군묘지로 시작한 역사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 민족에게 친일청산의 과제는 해방과 동시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였다. 하지만 민족적·민중적 과제였던 친일청산은 미군정 3년 치하에서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1948년 이후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미군정 시기였던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고려혁명당 출신으로 1927년 피체돼 해방된 뒤 감옥에서 나온 독립운동가 정이형(1897~1956)이 주도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를 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이에 대한 선포를 거부하면서 친일청산 문제는 정부수립 이후의 과제로 넘어가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1948년에는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면서 반민특위가 구성돼 활동을 시작하지만, 친일파와 이들과 결탁한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공작으로 결국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친일청산의 과제는 이미 분단정권을 휘감고 있던 ‘반공’의 구호 속에 파묻히게 됐다. 이어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으로 평가되는 6.25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장군 묘역의 친일파들, 국군묘지 시절 입성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동작동이 국군묘지 부지로 지정된 것은 전쟁과정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안장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군 창군 과정에서 주류를 형성한 일제강점기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의 장군들이 이후 국군묘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조성된 장군묘역(현 ‘장군 제1묘역’)에 대거 입성하게 된다.

서울현충원의 장군 묘역은 세 군데에 조성돼 있다. 이들 장군 묘역에는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초대 육군총참모장을 지낸 이응준(1890~1985)을 비롯해 만주군 헌병 상위 출신의 정일권(1917~1994), 독립군 토벌대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백일(1917~1951)과 임충식(1922~1974) 등 하나하나 거명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본군 장교 출신 장군들이 묻혀 있다.

‘장군 제1묘역’의 채병덕, 김백일, 신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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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백일의 묘 장군 제1묘역에 있는 간도특설대 출신 김백일의 묘 ⓒ 김학규

묘역별로 보자. ‘장군 제1묘역’에는 일본육사 49기로 일본군 포병 소좌였던 채병덕(1914~1950),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였던 김백일, 일본육사 53기로 일본 육군 소좌였던 신응균(1921~1996) 등 대표적인 친일 군인이 묻혀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군총참모장이기도 했던 채병덕은 총참모장직에서 사임한 후 영남편성관구 사령관으로 있던 그해 7월 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1933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해 1935년에 졸업한 후 사관후보생으로 6개월간 근무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37년 12월 49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됐다. 1940년에는 포병학교를 수료하고 해방 직전에는 포병소좌로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채병덕의 장인 백홍석도 일본육사 27기 출신으로 일본군 중좌까지 올랐다.

신응균은 한국전쟁 때는 제1야전포병사령관을 지내는 등 한때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1940년 일본육사 53기로 졸업한 후 육군과학학교 포병과를 수료하고 일본군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했다. 1944년 6월부터는 오키나와로 판견돼 중포 중대장으로 근무했는데, 1945년 4월 미군의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오키나와 북부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부상을 입고 산속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는 ‘미군이 조선인은 고향에 돌려보내준다’는 소문을 듣고 귀순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미군 군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귀국했다. 일제의 패망직전 계급은 포병소좌였다.

1951년 3월 육군소장으로 제1군단장 시절 대관령 인근에서 헬기 사고로 사망한 김백일(본명 김찬규)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에서 간도특설대에 참여한 인물이다. 1938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제압한다’는 모토 아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부대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일제 패망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부대였다. 7기까지 모집해 운영한 간도특설대는 총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의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김백일은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 등과 간도특설대의 창설요원이었다. 상위 계급에까지 오르며 간도특설대의 핵심요원으로 활동한 그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중국군으로부터 들은 8월 20일까지 작전을 수행하다 부하들을 이끌고 8월 26일 진저우(錦州)로 이동해 부대 해체식까지 참석했다.

간도특설대가 해체된 이후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에 머물던 김백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같은 간도특설대 요원이었던 백선엽,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장교가 됐다.

한국전쟁 당시 10만이 배를 타고 내려온 흥남철수작전(1950. 12.)의 영웅으로 묘사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동상도 세워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시 미 제10군단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현봉학(1922~2007)의 요청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2014년 12월 현봉학을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해 이를 바로잡았고, 김백일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거제 시민들은 3.1혁명 100주년을 맞은 올해 3월 1일 동상 바로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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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있는 김백일 동상 바로 옆에는 동상철거를 주장하는 거제 시민들이 철거가 당장 여의치 않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 친일김백일동상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

‘장군 제2묘역’의 이응준, 임충식, 신태영

‘장군 제2묘역’은 대한민국 국군의 형성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된다.

‘장군 제2묘역’에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육군 중장, 1976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임충식 육군 대장, 한국전쟁 당시 9사단장으로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 육군 대장(1921~1966), 해군 창설의 주역이면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손원일 해군 중장(1909~1980),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육군 중장(1891~1959), 제12대 합참의장을 역임한 심흥선 육군 대장(1925~1976) 등 6기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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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 제2묘역 장군 제2묘역에 있는 6기 무덤의 주인공 중 1/2인 3명이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이응준, 신태영, 임충식이다. ⓒ 김학규

이중 손원일 제독만이 유일하게 독립운동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는 임정요인묘역에 안장돼 있는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자 스스로가 한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반면, 6명의 장군 중 2/3에 해당하는 4명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였다. 김종오 장군이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위에 오른 인물이라 제외하면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발을 들인 군인은 6명 중 1/2인 3명이 된다.

이응준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 직전까지 일본군 대좌로 있었다. 191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갑(1877~1917)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3.1혁명 직후 나중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지청천(1888~1957), 1920년대 만주에서 ‘백마 탄 김장군’으로 맹위를 떨친 김경천(1888~1942) 등 일본육사 동기들과 중국 망명을 모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둘이 만주로 탈출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과 달리 이응준은 끝내 일본군에 남아 해방을 맞는다.

한국군 ‘군번 1번’이자 1956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1920~2002)도 1942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포병 대위로 있던 인물인데, 이응준의 사위다.

신태영 역시 일본육사 출신으로 해방 직전인 1944년까지 일본군 중좌로 있다가 이후 예비역 중좌로 해주 육군병사부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징병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강연활동을 왕성하게 벌였다. ‘장군 제1묘역’의 신응균은 바로 신태영의 아들이다. 부자가 함께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셈이다.

신태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1943. 11. 17.)에 1918년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할 때 자신의 첫 출진의 목표가 “야스쿠니 신사에 묻히는 것”이었다고 회고해 일찍이 일본화된 인물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자신의 행태가 너무 부끄러웠는지 해방 이후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를 핑계로 군에 입대했으며, 이승만 정권시절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임충식은 간도특설대의 3기로 자원입대해 준위까지 올랐다. 간도특설대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일제 패망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부대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국방부장관과 국회의원(공화당)을 지냈다.

이응준과 신태영은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돼 있고, 임충식은 당사자의 구체적인 개별 행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다.

‘장군 제3묘역’의 정일권과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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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권의 묘 장군 제2묘역에는 일본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만주군 헌병대위로 있던 정일권의 무덤이 있다. ⓒ 김학규

‘장군 제3묘역’에도 두 명의 일본군 장교 출신이 묻혀 있다.

정일권(1917~1994)은 한국전쟁 직후 미국 참모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에 임명됐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무총리와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다.

만주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동기생 김석범과 함께 성적 우수자로 일본육사에 추천돼 1940년 55기로 졸업했고, 이후 만주군 헌병 상위(대위)에 올라 간도헌병대 대장을 지냈다.

정일권의 일본육사 후배였던 장창국(1924~1996)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정일권 장군의 존재는 만주에 있는 모든 군인과 조선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봉천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수석을 했고 일본인 장교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만주고등군사학교를 나와 만주군총사령부의 고급부관으로 근무할 때 그는 화려한 견장에 말을 타고 출근했다. 그 때 계급은 대위.

이 같은 견장이나 승마 출퇴근은 고등군사학교 출신에게 주어지는 명예였다. 고등군사학교란 일본의 육군대학과 같은 격의 현역장교 교육기관인데 그곳을 거치면 중장까지의 진급은 보장되는 것이 관례였다.” – ‘만주군관학교 한인생도’ <중앙일보> 1982.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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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찬의 묘 장군 제2묘역에는 일본육사 출신으로 3대에 걸쳐 친일행위를 한 이종찬의 묘가 있다. ⓒ 김학규

이종찬(1916~1983)은 을사늑약 당시 법부대신이었던 이하영(1858~1929, 자작 작위 받음)의 손자이자 자작 이규원(1890~1945)의 아들로 3대째 친일의 길을 걸은 집안의 인물이다.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1952년 이승만이 벌인 부산정치파동 때 군대동원 요구를 거부해 해임되면서 ‘참군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의 친일행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1937년 일본 육사 49기로 졸업한 후, 중일전쟁에도 참여한 이종찬은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공(功)5급 욱(旭)6등의 금치훈장(金鵄勳章)을 받았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일제 강점기 내내 이종찬이 유일했다.

이종찬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뉴기니에서 육군공병 소좌로 있었는데, 종전 후 현지에 한동안 억류됐다가 1946년 6월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종찬의 묘비에는 드물게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호국의 큰별 이종찬 장군은 (중략) 조(祖)는 정2품 정헌대부 외부대신 법부대신 휘 하영 공이며, 부(父)는 종2품 가선대부 대종원 대종이었던 휘 규원 공이니라, 명문의 혈통으로 지인용을 겸비한 품질(稟質)로서 일찍이 건군의 포부를 지녀(생략)”라고 적혀 있다. 친일파 집안의 역사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정리해놓은 것.

이들 일본군 장교 출신을 비롯한 친일파의 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현충원에서 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장 이장이 불가능하다면 거제에서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운 전례에 따라 이들의 친일행적을 담은 비를 묘 옆에 나란히 세워둬야 어린 학생부터 어른까지 현충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장군묘역 아닌 다른 곳에도 일본군 장교 출신이 둘 더 있으니

서울현충원에는 장군묘역 이외에도 일본군 장교 출신이 둘 더 있다.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일제가 패망할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던 김홍준(1915~1946)은 2015년에 뒤늦게 서울현충원에 위패로 안치돼 있다. 문제는 김홍준의 서울현충원 위패 안치 시점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활동한 대통령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 발표한 이후라는 점이다.

정부 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과 현충원 안장이 별개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적이다.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또 한명의 일본군 장교 출신은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는 문경에서 소학교 훈도를 하던 중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혈서를 쓰고 입교한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성적 우수자로 일본육사에 추천돼 졸업했다. 이후 관동군 장교(중위)로 팔로군과의 전투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

박정희는 전직 대통령 묘에 묻혀 있다. 

<2019-06-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현충원 속 친일파 묘… 이장 어렵다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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