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70년 전 일본 미쓰비시에 떼인 ‘월급 도장’ 기증한 고 윤영준 이병 부모
6월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청파로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뜻 깊은 기증식이 열렸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인 고 윤재찬(1917-2010)씨 후손들이 70여 년 전 일본 미쓰비시 탄광에서 3년 넘게 일하고 떼인 ‘월급 통장용’ 도장과 당시 아버지 모습이 담긴 낡은 사진을 기증한 것이다.
이날 아버지 유품을 기증한 고인의 막내아들 윤출호(58)·박윤자(55)씨 부부는 지난 2010년 6월 8일 군 복무 중 사망한 고 윤영준 이병의 부모다. 윤 이병은 지난 2010년 2월 군에 입대한 지 89일 만에 부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생일이 같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슬픈 인생 유전
당시 군 헌병대는 윤 이병이 선임병의 지속적인 괴롭힘 때문에 자살했다고 통보했지만, 아들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윤씨 부부의 오랜 노력으로 지난 2015년 순직 결정을 받았고, 현재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재조사를 벌이고 있다. (관련 기사 : 잔인한 충고 ‘군에서 아들 죽으면 장례 치르지 마라’ http://omn.kr/fuhl)
공교롭게 이날은 9년 전 숨진 윤 이병의 기일이기도 했다.
“이상하게 할아버지(윤재찬씨)와 손자(윤영준씨)가 한 몸인 것 같아요. 제가 이 아이를 아버님 생신에 낳았어요. 아들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 뒤에 군대에 가서 ‘너 제대하고 오면 (할아버지 생신에 묻혔던) 네 생일 제대로 해줄게’라고 했는데 결국 못 했고, 오늘 아버님 유품 기증하는 날도 (아들 기일과) 겹친 거예요.”
윤 이병 어머니 박윤자씨가 아버님 유품을 기증하게 된 것도 아들 의문사 진상규명 과정에서 맺은 인연 덕분이었다. 박씨는 지난 2017년 군 의문사 가족의 아픈 사연들을 담은 연극 <이등병의 엄마>에 직접 출연했고, 공연 영상 순회 상영 도중 알게 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에게 유품 기증 제안을 받았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민변 광주전남지부 등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4월 29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54명과 함께 미쓰비시 광업 등 일본 전범 기업 9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윤씨 부부는 당시 1차 소송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2차 소송을 준비하면서 아버지 유품을 먼저 기증하게 됐다.
“아버지 일로 접수하러 가면서 도장과 사진도 가져갔는데,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박물관에) 기증하자는 제안을 받고 바로 좋다고 했어요. 아버지 물건이지만 귀한 자료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거든요. 식민지 시절 할아버지의 아픔도 담겨있지만, 우리 아이들이 박물관에 와서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해방된 줄도 모르고 일본 탄광서 일하다 3년 치 월급까지 떼여
지난 1917년 2월 25일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태어난 윤재찬씨는 결혼 직후인 지난 1942년 8월부터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까지 3년 4개월간 일본 규슈 후쿠오카 현에 있는 미쓰비시 탄광에서 일했다.
당시 윤씨는 탄광에서 8시간 일하고 8시간 자고 다시 8시간 일하는 하루 16시간 중노동을 했지만, 월급은 구경도 못한 채 ‘휴가’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인은 회사에서 월급 찾을 때 쓰라고 준 도장에 줄을 매달아 들고 다니며 70년 넘게 간직했지만, 지난 2010년 1월 향년 92세로 숨질 때까지 월급을 돌려받지 못했다. 윤출호씨는 그해 12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받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회사에서 우체국 통장에 월급을 넣는다고 들었는데 아버지는 통장 구경도 못했다고 해요. 나오기 직전에 탄광 관리자가 열심히 일 잘 하니까 휴가를 보내주겠다며 월급 찾을 때 쓰라고 도장하고 사진만 들려 보냈어요. 아버지가 여수에 배로 도착해서야 해방이 된 걸 안 거예요. 회사에서 월급 안 주려고 통장도 안 주고 휴가 핑계로 돌려보낸 거죠.”
윤씨 도장과 사진을 기증받은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50년, 100년 전에 쓰던 물건은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의미가 있는데, 우리 아픈 역사까지 얽혀 있는 자료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라면서 “100년 전 도장은 쉽게 볼 순 있겠지만 그 당시 이(강제동원) 용도로 쓰였던 도장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와 독립운동계의 오랜 노력으로 지난 2018년 8월 29일 문을 연 ‘식민지역사박물관(http://historymuseum.or.kr)’은 일제 침탈과 항일 투쟁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일제강점기 전문 박물관이다. 개관 날짜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로 잡은 것도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잊지 말자는 취지다.
때마침 이날 박물관에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제 강제동원, 근로정신대 피해자 관련 기증 자료를 모은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라는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은 “상설전시관 자료 400점 가운데 1/3이 기증품인데, 이렇게 기증 자료가 많은 박물관도 드물 것”이라면서 “자료의 보존가치만 따진다면 국가 박물관에 기증하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만, 시민과 호흡하며 자료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어서 기증자들이 더 믿고 맡기는 것 같다”고 밝혔다.
<2019-06-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강제동원과 의문사, 생일 같은 할아버지-손자의 슬픈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