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친일파 21]
세 차례의 노덕술 재판
권시용 선임연구원
1. 반민특위에 체포되다
노덕술(1899~1968)은 도망자였다. 5개월이 넘도록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과연 경찰이 노덕술을 찾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형편이었다. 그는 고문치사사건의 피의자였다.
사건은 이랬다. 1948년 1월 27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을 저격한 혐의로 박성근이 잡혔다. 박성근은 중부경찰서에서 물을 먹이는 등 잔악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경찰은 박성근이 조사를 받다 도주한 것처럼 가장하고, 사체를 자동차에 실어 1월 28일 새벽 2시경 한강 인도교와 철교 중간에 있는 얼음 구멍에 유기했다.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 듯 했다.
6개월이 지나 사건이 드러났다. 1948년 7월 21일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최운하, 수사과 부과장 김재곤, 사찰과 부과장 박사일 등 일련의 경찰 간부들이 경무부 수사과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7월 26일 경무부는 노덕술, 박사일, 김재곤, 김유하를 폭행, 능욕, 상해치사, 사체유기 등의 죄목으로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사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체가 없는 살인은 입증하기가 어렵다. 이 사건도 그랬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인들은 기존 증언을 번복했다. 허위 진술했다는 것이다. 현장검증에선 국방경비대가 한강을 지키고 있어 시체를 유기할 수 없고, 더구나 날씨가 추워 얼음구멍도 없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게다가 박성근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시간에서 8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성근을 감시했다는 증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건의 실체를 흐리는 주장도 나왔다. 경무부와 수도청 사이의 알력에서 사건이 비롯되었다는, 요즘 말로 가짜뉴스가 유포되었다. 7차례 공판을 거치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는 듯 했다.
1949년 1월 7일 고문치사사건의 제8회 공판에 경무부 수사국장 조병설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사건을 인지한 데서부터 피의자 체포 등 조사과정을 자세히 진술했다. 노덕술이 “징역을 가도 내가 가고 행정처분을 받아도 내가 받겠다”고 하며 전말서를 썼다는 일도 밝혔다. 정치적인 수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강력 부인했다. 3시간에 걸친 조병설의 증언으로 재판은 가장 중요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 재판에 핵심 당사자인 노덕술은 없었다. 노덕술 없는 노덕술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경무부 수사국이 피의자들을 검찰에 송치하기 직전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이 문의할 일이 있다며 노덕술을 잠시 석방해 달라고 해 데리고 나갔다. 그 길로 노덕술은 도주했다. 수도청의 해명이다. 어쨌든 이일로 김태일은 정직처분을 받고 경무부 사문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노덕술은 어디 있나? 못 잡는 건지 안 잡는 건지 의문스런 상황이었다.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노덕술. <연합신문> 1949.1.26.
노덕술을 잡은 것은 경찰이 아니라 반민특위 수사관들이었다. 1949년 1월 25일 새벽 2시쯤 반민특위
수사관들은 장충동1 이두철의 집을 급습, 숨어 있던 노덕술을 체포했다. 반민특위는 반민행위자로서 노덕술을 체포한 것이다. 당시 자가용 운전사와 짚차, 무장한 경관이 노덕술을 보호하고 있다 하여 논란이 되었다. 경찰이 노덕술을 빼내 숨겨주고 있었다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반민특위는 노덕술을 서대문형무소에 가뒀다.
2. 또 다른 사건, 드러난 음모
노덕술이 반민특위 수사관들에게 잡히던 날, 서울시 경찰국2 최란수 경감과 홍택희 경감이 체포됐다. 세상을 놀라게 할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다. 혐의는 엄중했다. 서울지방검찰청은 이들이 반민특위요인들을 암살하려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노덕술도 이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노덕술은 아주 바쁜 몸이 됐다.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는 심문을 시작했다. 고문치사사건을 다루는 검찰은 반민특위에서 노덕술을 인도받아 고문치사 및 은폐 혐의를 조사할 계획이었다. 고문치사사건 재판은 연기됐다.
3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신문을 검색해 보면 1949년 1월부터 12월까지 노덕술은 3가지 사건으로 조사받고, 기소되고, 재판받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반민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 조사에는 최대규 검찰청장이 직접 나섰다. 1949년 2월 1일 최대규는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노덕술을 직접 취조했다. 그리고 소속 검사들은 용산경찰서장 정운창, 중부경찰서장 박경림 등을 소환 조사했다.
1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2회(2002)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편’, 반민특위 특경대장 이병창의 증언. 청파동(반민자대공판기), 효창동(동아일보 1949.1.26)이란 기록도 있다.
2 1948.12.30 수도관구경찰청에서 개칭
1949년 2월 12일 검찰은 살인예비, 폭발물취체규칙위반 등의 죄명으로 일단의 경찰간부들을 기소했다. 백민태의 폭로로 알려진 암살계획은 노덕술과 반민법에 해당되는 친일분자들의 공모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소 사실은 다음과 같다.
① 노덕술, 최란수, 홍택희, 박경림 등은 반민법 제정에 적극적이었던 국회의원과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등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② 계획 실행자로 백민태를 선택했다. ③ 먼저 특
별검찰관 노일환과 김웅진, 특별재판관 김장렬 등을 납치하여 감금한다. 강제로 국회의원을
탈퇴한다는 성명서를 쓰게 하여 대통령과 국회, 신문사에 보낸다. 이들을 38선 근처에서 살
해하여 애국청년이 공산주의자를 살해한 듯이 가장하려는 계획이었다. ④ 암살대상에는 반
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돈, 특별검찰관장 권승렬, 특별검찰관 곽상훈, 서용길,
서상달,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특별재판관 오택관, 최국현, 홍순옥 등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
에다 국회의장 신익희 등도 포함되었다.(<경향신문> 1949.2.15)
이 사건은 반민특위를 대하는 친일파들의 생각과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반민특위에 앞장선 국회의원과 특위요인들을 살해하고,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려는 생각이었다. 북한 정권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반민특위에 앞장서고 있으니, 친일청산을 외치는 사람들은 곧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를 잠식했던 빨갱이 프레임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음모사건은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탄로났지만 얼마 뒤 일어난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은 그들의 계획이 결국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노덕술이 받게 된 두 번째 재판이었다.
3. 반민특위 재판
이제 노덕술의 세 번째 재판, 반민특위 재판을 이야기해 보자. 노덕술은 1949년 1월 25일에 반민특위 수사관들에게 잡혔다. 반민특위는 1949년 2월 5일 첫 조사를 시작, 2월 23일 노덕술을 특별검찰부로 송청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반민혐의자들은 모두 마포형무소로 이감됐다.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는 1949년 3월 15일 노덕술을 반민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당시 특별검찰부는 노덕술의 증인조사를 위해 동래, 통영, 부산을 찾아가기도 했다.
노덕술의 반민특위 첫 재판은 1949년 3월 30일에 시작됐다. 이날 노덕술은 이풍한, 김연수에 이어 3번째로 법정에 들어섰다. 서상달 검찰관이 노덕술의 과거죄상에 대한 기소사실을 낭독했다. 주심 판사 서순영은 일제강점기의 공훈과 경찰관 생활에 대한 간략한 질문을 하고 심리를 마쳤다. 1회 공판은 겨우 20분밖에 안 걸렸다.
1949년 6월 1일 제2회 공판이 열렸다.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기소하며 제시한 각종 반민족행위에 대한 심문이 진행됐다. 노덕술은 시종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오히려 허위조서를 꾸며 일본인을 잡아 수감한 일이 있다며, 자신이 항일투쟁을 했다고 내세우기까지 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법정에 끌려온 반민법 피의자들. 왼쪽부터 노덕술, 김연수, 이풍한. <경향신문> 1949.3.3.
노덕술에 대한 기소사실 낭독과 1차 심리가 진행됨. <동아일보> 1949.3.31.
(재판장) 단기 4261년(1928) 경 피고가 동래서 사법주임으로 있을 당시 반일투쟁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 혁조회 관계자 김규진, 유진흥 두 사람을 고문치사케 하였다던데?
(피고) 피고가 경찰생활을 하면서 고문한 일은 전혀 없으며 동 사건에 관해서도 전혀 모릅니다. 도리어 일본놈들은 잡아다가 허위조서를 꾸며 수감한 일이 있습니다.
(재판장) 그러면 항일투쟁도 했다는 말인가?
(피고) 그렇습니다.
(재판장) 단기 4261년(1928) 반일투쟁단체인 동래청년동맹 위원장, 동래노조정치문화부
장, 신간회 동래지부 간부인 박창양 씨와 ML당원인 김재학 씨 등에 가혹한 고문 끝에 송
국하였다던데.
(피고) 기억에 없습니다. (<연합신문> 1949.6.2)
4. 노덕술은 누구인가
반민특위 법정에서 노덕술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렇다면 식민지 시기 경찰로서 노덕술의 행적을 정리해 보자. 노덕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식민지 경찰로서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해방된 조국의 경찰로서 고문을 하다 사람을 죽이고, 친일행적을 심판하려는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흑조회(혁조회) 사건으로 노덕술에게 고문당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김규직의 옥중 사망기사. <동아일보> 1929.2.15.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통영경찰서 재직 중이던 1932년에는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해 고문했다.
<반민자대공판기>에는 노덕술이 김재학을 직접 검거해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고, 입에 물을 들이붓고, 전신을 구타하는 등 혹독한 고문을 감행’했다는 반민특위의 조사내용을 확인할 수있다. 경찰 경력 초기부터 자신을 드러낼 목적으로 애를 썼던 모양이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그런 과잉충성의 결과였다. 드디어 1932년 경부로 승진해서 서울로 영전했다. 이후 1940년대 초까지 서울, 인천, 양주, 개성 등에서 근무했고 1941년에는 종로경찰서 사법주임을 지냈다. 1943년에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로 옮겨가 보안과장을 맡았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밀려난 틈에 평양경찰서 서장을 지냈다. 그렇지만 곧 소련군이 점령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박상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2개월가량 소련군에 잡혔다 풀려났고, 곧장 월남했다고 한다.
식민지 시기 경찰 계급은 경찰부장-경시-경부-경부보-순사로 구성되었다. 경찰부장은 각도의 경찰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13개 도가 있었으니 경찰부장은 13명이었는데, 모두 일본인이 차지했다. 경시는 적을 때는 37명, 많을 때는 85명 정도였는데 이 중 한국인은 10~20% 정도였다. 경부나 경부보도 15~20% 정도를 한국인이 차지했다. 이런 간부급에서 한국인 비율은 일제 후반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말단 직급인 순사의 경우 한국인이 약 40% 정도를 차지했다. 전체적으로 경찰 내 한국인들의 수적 열세와 직무에서의 민족적 차별이 존재했다. 중요 직책이나 책임자급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장악했고 비교적 고위급에 진출한 한국인들도 사법이나 위생 계통에 근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가장 하급단위인 파출소, 주재소, 출장소에는 보통 순사부장 1명과 순사 1~2명이 배치된다. 순사 가운데 책임자급이 순사부장인데 순사부장은 대개 일본인 경찰이 차지했다.
3 이런 환경에서 고위직에 진급한 한국인 경찰이 일부 존재했다. 해방 직전까지 경시가 된 사람은 노덕술을 포함해 불과 21명인데, 그들이 일제에게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에 잡혔고, 풀려난 후 곧장 월남했다고한다. 그리고 미군정에서 경찰에 복귀했다. 미군정은 왜 친일 경찰을 활용했을까?
3 김민철, 「일제 식민지배하 조선경찰사 연구」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경기도에서 경찰의 출근율은 일본인 90%, 한국인 20%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미군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일제 경찰 소속의 한국인들은 80~90%가 도망치거나 숨어버려 경찰 기능이 완전 마비상태였다. 미군정 초기 경찰업무를 직접 관장했던 로렌스 쉬크준장은 “경찰이 뿔뿔이 흩어져 무기력하다”고 말했다.4
1945년 8월 16일부터 25일까지 한국에서 발생한 사고 건수 914건 중 경찰에 대한 공격이 326건이며, 그 중 한국인 경찰에 대한 폭행 및 협박이 111건으로 전체 사고 건수의 12%를 차지했다.5
해방 공간에서 식민지 시기 경찰로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이렇게 공격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진주한 미점령군은 한국경찰체제 재편을 시작했다. 이것은 미군정이 한국사
회를 어떤 관점에서 인식했는지, 앞으로 시행될 점령정책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가늠자였다. 당시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남한 내 정치그룹을 보수적 민주주의 세력과 급진적 공산주의 세력으로 구분하며, 미군정이 당면한 어려움을 피력하는 한편 최소한 남한만이라도 동유럽과 같은 소비에트화를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미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한편 내부의 좌익세력 견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1945년 10월 21일 군정청에 경무국(뒤에 경무부로 개편)을 창설했다. 이날은 경찰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군정 경찰조직이 체계를 잡아가자 일제 경찰 재직자들의 직장복귀율이 늘어났다. 경찰구성원이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교체되었을 뿐 식민지 경찰제도와 운용 관행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계속 등용하는 일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찰로서의 자질을 천성적으로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일
본인을 위해서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경찰에서 몰아내는 일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미군정 경찰 고문 매글린 대령)6
미군정은 일제 경찰 경력자들이 일제의 하수인으로 충성하는 데 익숙해 있었으므로 새로운 권력자인 미군정에도 충성을 바칠 것으로 믿었다. 이렇게 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경찰들이 해방된 나라의 경찰로 재등장하게 되었고, 노덕술도 그 한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4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986
5 森田芳夫, <조선종전의 기록(자료편)>1, 1979
6 마크 게인, <해방과 미군정>, 까치, 1986
5. 친일파들의 반격, 재판은 어떻게?
다시 반민특위 재판으로 돌아가 보자. 반민특위는 노덕술을 체포하고 조사한 후 기소했다. 재판도 2차례 열렸다. 다음 공판이 1949년 6월 15일로 예정되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노덕술의 재판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이승만 정권에 의한 반민특위 공격이다.
이미 반민법 공포 직후부터 친일파 처리에 반대했던 이승만은 특위가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자 더욱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반민법 시행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특위는 조사만 하고 검거와 재판은 사법부와 행정부로 넘길 것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특위의 존재를 부정했다. 특히 노덕술이 체포되자 반공투쟁이 격렬한 상황에서 좌익세력 타도의 ‘기술’을 가진 경찰이 절대 필요하다는 담화를 발표해 친일경찰을 적극 옹호했다. 이승만은 노덕술을 체포한 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자를 체포, 의법 처리할 것을 지시하고 직접 김상덕 위원장의 집을 찾아가 노덕술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반민특위요인 암살음모가 기획되기도 했으며, 각종 반공궐기대회가 열리는 등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려는 책동이 나타나고 있었다. 1949년 5월 18일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가 지휘하는 경찰이 국회의원 이문원과 최태규를 체포하면서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이 시작되었다. 뒤이어 이구수 의원도 체포, 구속되었다. 세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반민특위 활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친일파들은 국회와 반민특위를 ‘공산당 소굴’이라고 주장하며 공세를 강화해갔다. 이에 반민특위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등을 반민피의자로 체포하며 대응했다. 경찰은 물리력 행사에 나섰다. 1949년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봉쇄하고 특경대원을 폭행하고 체포했다. 이 모든 것은 대통령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에 대해 부정적 입장에 서 있었고, 친일경찰을 보호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반민특위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6월 7일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이 사표를 제출하였고, 이어 오기열, 조규갑, 김경배, 이종순 등도 잇따라 사표를 냈다. 특위 활동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반민특위 요인 암살음모사건과 수도청 고문치사사건 판결은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내려졌다. 노덕술은 두 사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먼저 수도청 고문치사사건 1심 판결은 1949년 4월 29일에 있었다. 재판부는 노덕술과 김재곤, 박사일, 김유하 등 4명에게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유는 증거불충분이었다. 증인들은 재판정에서 증언을 번복했고,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백대봉 최원경 증인은 행방을 감추었다.
피의자는 자백을 하지 않았다. 결국 시체 없는 살인사건을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검찰은 1심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하지만 1949년 11월 26일 항소심 판결은 노덕술을 비롯한 피고 모두 1심과 같이 무죄를 언도했다.
반민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 재판은 1949년 3월 28일(1차), 4월 7일(2차), 4월 18일(3차)로 이어졌다. 노덕술, 박경림, 홍택희, 최란수 등 4명의 피고는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검찰은 백민태 등 증인들을 내세워 이들의 혐의를 입증해갔다. 5월 5일 제5회 공판에서는 위인환이라는 새로운 증인이 등장했다. 노덕술이 도망쳐 숨어 지내던 시기에 1개월 동안 함께 살았다는 위인환은 노덕술에게 암살계획을 모두 들었다고 진술했다. 재판과정을 통해 노덕술 등의 암살음모는 분명히 확인되고 있었다. 검찰은 이들에게 폭발물취체규칙 위반,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각각 징역 4년을 구형했다. 6월 20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최란수와 홍택희에게는 각 징역 2년, 노덕술과 박경림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검찰은 즉각 항소했고, 최란수와 홍택희 역시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그해 12월 26일에 2심 재판이 열렸다. 증인으로 나온 백민태는 끝까지 피고들이 반민특위 요인을 암살하려 음모했음을 증언했다. 검사는 이들에게 각각 징역 4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상황은 범죄자들 편이었다. 이튿날 암살음모를 폭로했던 백민태는 모종의 뇌물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되었다. 결국 1949년 12월 31일 2심 재판부는 1심과 같이 노덕술과 박경림에게 무죄를, 더구나 홍택희와 최란수에게는 1심의 실형 선고와 달리 각각 벌금 20만원과 30만원을 선고했다. 최란수와 홍택희의 형량이 대폭 낮아졌다. 살해를 교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암살계획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사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고 폭발물취체규칙위반죄만을 적용한 것이다.
1심과 2심 판결은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가 실재했음을 인정했다. 훗날 홍택희는 검찰의 기소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처벌이 내려진 것은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친일파 처리문제가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심 판결에 대해 검찰은 즉각 상고했다. <연합신문> 1950년 5월 6일 기사에 따르면, 검찰의 상고를 접수한 대법원은 반민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을 다룬 2심 공판이 부당하다고 보고 차려(差戾)시켰다고 한다. 즉 2심에서는 암살을 교사하고 무기를 준 후 암살행위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불법소지로만 처벌했는데, 대법원은 교사한 후 암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교사자 및 이에 응한 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후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아마도 얼마 안 있어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야무야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각종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49년 7월 23일 반민족행위 피고 노덕술은 10만원의 공탁금을 걸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마포형무소 형무의관이 내린 진단은 장기간의 감방생활로 인해 만성기관지염, 임파선, 저혈압증, 뇌신경쇠약, 만성위장염 등이었다. 재판 분위기는 노덕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949년 9월말 특별검찰부는 노덕술 등 16명의 반민피의자에 대해 공소취소서를 제출했으며, 그 결과 10월 1일 특별재판부는 노덕술에게 공소기각 결정을 내렸다. 결국 노덕술은 법의 심판을 모두 빗겨갔으며 그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단죄도 물거품이 되었다.
6. 노덕술은 여전했다
뇌물수수로 육군범죄수사단 대장에서 파면되고 징역 6개월을 언도받은 노덕술 중령. <동아일보> 1955.11.13.
노덕술은 헌병으로 전직했다. 1950년부터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
단 대장, 1955년 서울 제15육군범죄수사단 대장(중령)을 지냈다. 그에게는 여전히 재판이 따라다녔다.
1955년 11월 11일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번엔 뇌물수수였다. 부산 제2범죄수사대장으로 재임 시 뇌물
을 받은 혐의였다. 미군 군수물자를 빼돌리려 한 사람들과 결탁했다. 노덕술은 범죄수사대장의 신분을 이용해 수사를 가장하고 교묘한 수단으로 빼돌린 물자(주로 피복)의 운반을 맡았다.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는 유죄판결을 내렸고, 노덕술은 파면 및 전 급료 몰수, 징역 6개월의 처분을 받았다.
군에서 파면 당한 노덕술은 이후 고향인 울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고, 사망하기 전에는 서울에서 흥신소를 운영했던 것 같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동양흥신소를 운영하던 노덕술이 1965년 9월에 흥신업단속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어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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