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용산 서룡사, 일진회의 배후인 일본인 승려 다케다의 활동근거지 을미사변의 대역죄인 이주회의 묘지가 이곳이 만들어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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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48]

용산 서룡사, 일진회의 배후인 일본인 승려 다케다의 활동근거지
을미사변의 대역죄인 이주회의 묘지가 이곳이 만들어진 까닭은?

이순우 책임연구원

 

비록 제도의 개혁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실행력을 갖고 하나의 관행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1895년 9월 9일에 이뤄진 태양력(太陽曆)의 도입 때도 그러했다. 이른바 ‘을미개혁’에 따라 개국 504년(1895년) 11월 16일(음력)의 다음날이 건양 원년(1896년) 1월 1일(양력)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1895년 11월 3일에는 종래에 음력으로 지내던 각전궁(各殿宮; 대군주, 왕태후, 왕태자, 왕태자비)의 탄신월일(誕辰月日)을 양력에 따라 개정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 내각(金弘集 內閣)이 붕괴하고 이들의 불충(不忠)에 대한 국왕의 반감으로 이 조치는 미처 1년도 넘기지 못하고 1896년 8월 22일 다시 ‘음력’으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 이후의 기록을 살펴보았더니, 탄신경절(誕辰慶節)에 양력을 적용하는 방식을 부활한 것은 무려 12년 가량의 세월이 더 흐른 1908년 7월 22일의 일로 드러난다.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27일자에 수록된 ‘궁내부 포달(宮內府 布達) 제178호’에는 탄신경절과 기념경절의 월일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시기의 탄신경절 및 기념경절 (1908년 7월 제정)

이보다 약간 앞서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4일자에 공포된 각령(閣令) 제6호 ‘관청 집무시한 개정건’에 따르면, 탄신경절과 기념경절 가운데 황제의 생일인 건원절을 비롯하여 개국기원절, 즉위예식일, 계천기원절, 묘사서고일은 공휴일로도 지정된 바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국경일 중에서 다른 것들은 그럭저럭 그 뜻을 새길 수 있으나 ‘묘사서고일’은 좀 생소한 말이다.
이것은 순종 황제가 1907년 11월 18일에 묘사(廟社), 즉 태묘(太廟, 종묘)와 사직(社稷)에 나아가 맹서(盟誓)를 고한 날을 가리킨다. 이날 이곳에서는 즉위 사실을 고하는 동시에 “시조지의(時措之宜)를 헤아리고 개현지방(改絃之方)을 물어 확연하게 서정(庶政)을 유신(維新)하고 방명(邦命)의 연장을 기원함을 국시(國是)로 삼겠다”는 것과 응당 행해야할 조목 여섯 가지를 함께 고하였다.
그리고 이때 별도의 조칙(詔勅)을 통해 이러한 경회(慶會, 경사스러운 모임)에 대사(大赦)를 내리는 것이 정해진 법도라 하여 “개국(開國) 이래로 죄적안(罪籍案)에 이름이 든 사람 중에 거병범상(擧兵犯上)한 자와 강도(强盜)를 제외하고는 죄명(罪名)을 모두 탕척(蕩滌)하라”는 뜻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의 주도로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역모의 누명이나 사화(士禍)와 당쟁(黨爭), 그리고 여러 정변(政變)과 변란(變亂)에 얽혀 숨진 223명에 달하는 이들에 대한 신원(伸冤)과 복관작(復官爵)이 대거 이뤄지게 된다.
이들의 명단은 세 차례에 걸쳐 공표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에는 역사서에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킨 함길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이라든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라든가 김삿갓의 조부이자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된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이라든가 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대한제국 관보> 1908년 3월 20일자에 고시된 죄명탕척안에 을미사변의 대역죄인 ‘이주회’의 이름이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이 명단에는 흥미롭게도 ‘이징옥’과 ‘윤원형’과 같은 인물도 들어있다.

 

그런데 1908년 3월 21일에 고시된 죄명탕척안(罪名蕩滌案)을 보면, 여기에도 그냥 스쳐 지나기 어려운 사람이 한 명 포함되어 있다. 을미사변 당시 군부협판(軍部協辦, 육군정령)에서 막 물러나 있던 이주회(李周會, 1843~1895)가 바로 그였다. 그는 왕비 시해 당일 새벽 일본인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1852~1912)와 함께 마포 공덕리(麻浦 孔德里)에 가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호위하여 대궐로 들어왔으며, 왕태자가 있던 장안당(長安堂)까지 범입하였고 궁궐 도처에서 변란을 일으킨 군사들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을미사변에 연루된 조선인으로서 일본인 고용 출신의 박선(朴銑, 당시 26세)과 친위대 부위(親衛隊 副尉)인 윤석우(尹錫禹, 당시 40세)와 더불어 1895년 11월 13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관보> 1895년 11월 13일자(호외)에 수록된 박선, 이주회, 윤석우 등 3인에 대한 재판선고서이다. 자신의 죄를 적극 부인한 박선과 윤석우와는 달리 이주회는 ‘왕비시해사건’을 주도한 일본 낭인들을 감싸기 위해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을 호위하여 대궐로 들어왔으며, 왕태자가 있던 장안당(長安堂)까지 범입하였고 궁궐 도처에서 변란을 일으킨 군사들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을미사변에 연루된 조선인으로서 일본인 고용 출신의 박선(朴銑, 당시 26세)과 친위대 부위(親衛隊 副尉)인 윤석우(尹錫禹, 당시 40세)와 더불어 1895년 11월 13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특히 그는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 자신의 죄를 적극 부인한 박선과 윤석우와는 달리 서울에서 송환되어 히로시마감옥(廣島監獄)에 구금된 미우라 공사(三浦公使)를 비롯한 일본 낭인 48인을 보호하고자 스스로 왕비 시해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대로 흉도소취죄(凶徒嘯聚罪)와 모살죄(謀殺罪)의 적용을 받고 있던 미우라 일행에게 무죄 방면의 빌미가 되었고, 실제로 이들에 대한 예심 결과 1896년 1월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면소(免訴)의 언도가 내려졌다.
이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나 러일전쟁을 거쳐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그 결과 일본이 크게 득세하는 세상이 되자 모든 상황이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헤이그특사사건의 여파로 고종 퇴위 및 순종 즉위에 따른 묘사서고와 대사조칙(大赦詔勅)이 내려지자 그 혜택이 을미사변의 대역죄인이던 이주회에게까지 미친 것 자체가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에 수록된 ‘특별광고’를 보면 훈련원(訓鍊院)에서 거행되는 이른바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의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보인다. 이 행사는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이 회장으로 있던 강구회(講舊會, 옛일을 강구하는 회)의 주최로 갑신(甲申, 1884년)과 갑진(甲辰, 1904년) 사이에 “비록 뜻이 다르고 주장하는 바가 같지 아니할지라도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이들을 기린다”는 취지로 이뤄진 것이며, 여기에는 김옥균이나 홍영식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은 물론이고 특이하게도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1908년 6월 27일 강구회(講舊會)의 주최로 훈련원에서 열린 ‘애국사사추도회’의 추대대상 명단에도 ‘이주회’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

 

한국병합 직후 ‘친일의 기치를 휘날리다 죽은 공로’를 인정하여 일본천황이 이들의 후사에게 은상공채를 내리는 인명에도 어김없이 ‘고 육군정령 이주회’가 포함되어 있다. (<매일신보> 1910년 10월 15일자)

 

일본인들을 위해 죽은 이주회에 대한 특별대우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당연히 이어졌다. <매일신보> 1910년 10월 15일자에 게재된 「은급천양(恩給泉壤)」 제하의 기사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낭자(曩者, 지난번) 조선귀족의 수작(授爵)의 명(命)이 하(下)하였으나 작일에 우(又) 당시 현관(顯官)으로 친일(親日)의 기치(旗幟)를 번(翻)하여 예의(銳意)로 국사(國事)에 분주(奔走)하다가 흉도(凶徒)에게 피살한 인(人)의 공로를 가납(嘉納)하샤 천황폐하께서는 기(其) 사자(嗣子)에게 대하여 은상금(恩賞金) 약간을 하사하시매 성은(聖恩)의 융숭(隆崇)하심을 감읍하여 각기 망부(兦父)의 영(靈)의 고유(告由)할 터이라는데 금(今)에 기(其) 은상금을 수(受)한 인명(人名)을 거(擧)하건대 여좌(如左)하더라.
△ 금일만원(金一萬圓) — 고(故) 호조참판 김옥균(金玉均), 고 이조참판 홍영식(洪英植), 고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 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고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
△ 금오천원(金五千圓) — 고 제학 정병하(鄭秉夏), 고 경무사 권형진(權瀅鎭), 고 학부대신서광범(徐光範), 고 육군정령 우범선(禹範善), 고 육군정령 이주회(李周會), 고 도승지 박영교(朴泳敎), 고 남부도사 조총희(趙寵熙), 고 외부대신 유기환(兪箕煥).
이외(以外) 2명, 합(合) 15명이 사자(嗣子)에게 기(其) 은상공채(恩賞公債)를 하사하실 지(旨)를 데라우치 총독(寺內總督)이 전달하였다더라

 

여길 보면 이주회의 후사(後嗣)에게는 5천 원이라는 거금의 은사공채가 내려진 것으로 드러난다. 그 이후 <매일신보> 1911년 1월 14일자에 실린 「공채본권교부(公債本券交付)」 제하의 기사에는 그 전날 총독부 청사 정무총감실에서 거행된 수령증 교부식에 “이주회 유족(遺族) 이 명렬(李明烈)”이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명단에는 “우범선 유족 우장춘(禹長春)”이라는 대목도 보이는데, 자못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내력을 지닌 이주회의 흔적을 간추리다 보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바로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에 속한 용산 서룡사(龍山 瑞龍寺, 원효로 1가 18번지 구역)이다. 정식 명칭으로는 ‘청파산 서룡사(靑坡山 瑞龍寺)’라고 했으며, 절 이름은 일본 후지야마현 타카오카에 있는 ‘서룡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 일본인 사찰이 만들어진 유래는 후지 토넨(富士洞然)이 러일전쟁 뒤에 한국으로 건너와서 각지를 탁발수행하던 끝에 1907년 2월 용산 청파에 가포교소(假布敎所)를 설립하고 1909년에 본당을 건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용산시가도> (1929)에 나타난 ‘용산 서룡사’의 위치이다. 주변 일대에 또 다른 일본인 사찰 흥국사와 서본원사, 그리고 불교자 제원이 포진한 것이 눈에 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일한합방비사 상권(日韓合邦祕史 上卷)> (흑룡회출판부, 1930)에 수록된 일본인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의 모습이다.

 

특히 1908년에는 경룡인(京龍仁, 경성 용산 인천)의 포교관리소가 이곳에 설치되어 조동종 계열의 승려이자 ‘대륙낭인(大陸浪人)’이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1863~1911)가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시기에 천우협(天佑俠)에 가담하였고 을미사변 때 히로시마감옥에 투옥된 48인의 하나였으며, 이후 1901년 흑룡회(黑龍會) 결성에 참가하는 한편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종하여 한일병합 청원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또한 친일승려 이회광(李晦光, 1862~1932)이 1908년에 불교종단원종(圓宗)을 설립할 때 다케다와 결탁하여 그를 이곳의 고문으로 추대한 일도 있었다. 1911년에 다케다가 죽자 그의 유발(遺髮)을 가져
와 서룡사 내에 조성한 무덤이 남게 되었고, 그해 가을에 묘비도 함께 건립되었다.
이주회가 갑신정변 때 피신하여 일본에 3년간 머문 경험이 있는데다 일찍이 전라남도 여수 앞 바다에 있는 금오도(金鰲島)에서 개간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차에 다케다가 이곳으로 찾아와 이웃 섬인 안도(雁島)에서 크게 어로사업을 벌인 적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미 각별한 교류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사이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그들의 세상이 도래하자 그와 연고를 맺은 일본인들은 ‘은인(恩人)’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이주회와 그의 유가족에 대한 보은과 보호의 조치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탓에 그의 유족은 친일귀족 송병준(宋秉畯)의 사위이자 총독부 경무관이던 구연수(具然壽, 1866~1925)의 보살핌을 받았고, 더구나 경기도 광주군에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그의 유골이 수습되어 1930년 11월 서룡사 국사대(國士臺)에 그의 처와 더불어 합장 묘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이때 그와 함께 처형된 윤석우(尹錫禹)와 박선(朴銑)의 비석도 이곳에 제막된 바 있다. 흑룡회(黑龍會) 편찬,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亞先覺志士記傳) 상권(上卷)> (흑룡회출판부, 1933), 544~545쪽에는 이 과정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사형집행 후 이주회의 유해(遺骸)는 산 속에 버려졌고, 그 유족도 역시 국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지려 하기에 이르자, 미망인 김씨는 유자(遺子) 병구(秉九, 당시 9세)를 데리고 지방으로 도망쳤고 포리(逋吏)의 추궁을 피해 여러 곳을 유랑한 끝에 금강산(金剛山)의 승려에게 구제되어 어린 병구는 절간의 도제(徒弟)가 되었으며 미망인은 애아(愛兒)와 떨어져 정처없이 떠돌며 신산(辛酸)을 맛보게 되면서 바느질과 빨래 등의 삯품팔이로 간신히 노명(露命,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이어나갔다고 전해지는 상태였다.
일본의 유지가(有志家)도 조선의 동지(同志)도 이주회의 유족이 어디서 어찌하고 있는지가 묘연하여 그 소식을 아는 자가 없었는데, 그 후 통감정치(統監政治)의 시대가 되면서 당시의 동지 구연수(具然壽, 1866~1925)가 경무청(警務廳)에 봉직하게 된 것을 기회로 전국에 수배하여 수색한 결과, 명치 43년(1910년)에 간신히 유족을 찾아내어 구연수가 자신의 봉급을 떼어 부양하고 있었다.
…… 또한 이주회의 유해가 일찍이 일본 군대의 힘으로 향리(鄕里)인 경기도 광주군에 가매장(假埋葬)되어 있던 것을 토야마 미츠루(頭山滿), 자작 미우라 마츠지로(子爵 三浦松二郞, 미우라 고로 장군의 후사), 아다치 켄조(安達謙藏),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코쿠보 키시치(小久保喜七) 제씨(諸氏)를 발기인으로 하여 유지(有志) 186명의 찬조 아래 소화 5년(1930년) 11월 이주회와 가장 교분이 깊었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와 연고가 있는 용산의 서룡사(瑞龍寺)에 있는 국사대(國士臺) 묘지로 옮기고 부인 이씨(夫人 李氏; 김씨의 착오?)와 합장하여 멋진 비석을 세워 오래도록 그 의열(義烈)을 전하고 있다.
더욱이 이와 동시에 그 옆에 윤석우(尹錫禹)와 박선(朴銑)의 비석도 세워 혼령을 제사지내고 있다. 미망인 김씨(未亡人 金氏)는 그 전년(前年)에 세상을 떠났으나, 생전에 이주회의 묘를 건립하지 못한 것을 고심하고 있었던 바, 이번에 일본의 유지들에 의해 고인과 인연이 얕지 않은 용산에 비석이 세워져 의인(義人)으로서의 이름을 오래 기념하기에 이르렀는데, 깊이 지하에서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용산 서룡사의 국사대(國士臺)에 조성된 ‘이주회 매골처(埋骨處)’의 모습이다. 뒤로 보이는 것이 타케다 한시의 무덤이고, 다시 그 뒤로 보이는 산자락은 남산이다. (<동아선각지사기전 상권>, 1933)

 

위의 인용구절에 나오는 ‘부인 이씨’라고 하는 것이 ‘미망인 김씨’의 착오인지, 아니면 이씨와 김씨, 이렇게 부인이 두 명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이주회의 아들 이병구(李秉九)에 대해서도 열전(列傳) 편이 수록된 <동아선각지사기전 하권(下卷)>(1936), 134쪽에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덕리”로 적힌 주소지 정도가 겨우 확인될 따름이다.
해방 이후 시기에 이르러 1947년 3월에 용산 서룡사가 전재민 동포(戰災民 同胞)를 수용하는 공간으로 제공되면서 이곳에 20세대 118명이 수용되고 있다는 간략한 기사 한 토막이 눈에 띌 뿐이고, 어느 시기에 어떤 경위로 해당 구역이 해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포착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주회의 무덤이라든가 다케다의 비석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행방은 전혀 알지 못한다.

용산 서룡사에서 거행된 이주회, 윤석우, 박선 3인에 대한 비석 제막식 광경이다. (<동아선각지사기전 상권>, 1933)

 

용산 서룡사에 관한 글을 마무리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면, 뜻밖에도 이곳에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의 폭탄투척의거와 관련된 자취가 남아있었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19년 9월 2일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한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던진 폭탄은 비록 총독 저격에는 실패하였으나 주변에 있던 37명에게 중경상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경기도 순시(巡視) 스에히로 마타지로(末弘又二郞)가 좌편 대퇴부를 뚫은 탄환이 패혈증을 일으켜 사건 8일 뒤인 9월 11일에 숨졌고,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경성특파원 타치바나 코키츠(橘香橘, 1881~1919)도 복부 손상에 따른 복막염과 폐렴 증세로 그해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 이때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경성특파원 야마구치 이사오(山口諫男, 1880~1924) 역시 흉부에 파편을 맞아 여러 해에 걸쳐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도져 마침내 1924년 4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동아일보> 1928년 4월 14일자에 수록된 기사를 보면, 용산 서룡사에서 야마구치 경성지국장의 묘비 제막식이 거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 비석 또한 해방 이후 시기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그 내막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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