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법적 배상 책임·역사적 책임 구분 대응 필요” VS “피해자가 배제될 수 있어”
일본 정부가 한국을 상대로 수출 규제를 단행한 근본 원인은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 식민지 역사 문제다. 이러한 역사 문제의 해법으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중재위원회를 통해 일본에 법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을 구분해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반면 중재위 결과에 따라 피해자가 배제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에 따른 보복 조치를 실행했다. 지난 4일부터 반도체 소재 등에 대해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외환법상 우대 제도인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한국 대법원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최종적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현재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제3국을 통한 중재위에서 결정을 받자는 입장이다.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라 제3국 중재위 설치를 지난달 19일 요청했다. 한국 정부의 답변 시한은 이달 18일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중재위 설치 요청에 소극적인 모습이다. 중재위 결정에서 질 경우와 이에 대한 국민 감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한·일 양국 기업이 함께 출연한 재원으로 위자료를 지급하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한·일 역사 문제 전문가들의 입장도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결정을 받는 것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우선 한·일 역사 문제가 경제로 번진 상황에서 역사 문제에 대해 일본에 법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을 구분해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 법적 책임의 경우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의 배상금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됐는지 여부에 대해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과정도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한국이 중재위나 국제적 판결에서 이기든 지든 이는 법적 배상 책임에 한정된 해석일 뿐 일본의 역사적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0일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미 일본이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 경제 보복으로 나온 상황에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법적 배상이 해결됐는지에 대해서는 중재 절차를 받아야 한다”며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배에 따른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책임, 즉 진상규명과 진정한 사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 등은 별도로 추진해야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2018년 일본의 전문가 등 100여명이 한일청구권 협정에 강제징용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선언도 했었다. 국제적 중재에서 한국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며 “만약 한국이 지더라도 이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법적 배상을 더 이상 받기 어렵다는 해석일 뿐이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재 결과와 별개로 한국은 일본에 역사적 책임을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한국이 이기면 대법원 판결대로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 한국이 중재에서 지면 정부가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대신 배상을 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법적 문제를 피하면 역사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본 정부가 무역 보복 조치까지 나서면서 이제는 배상과 관련한 법적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다”고 했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 “한국 정부는 국제 중재나 유엔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배상금 판결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배상이 해결됐는지 판결을 받을 필요성이 있다”며 “한국이 국제적 판결에서 지면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한국 정부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재 결과나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에서 이기든 지든 이는 법적 배상 책임에 한정된 해석일 뿐이며 일본의 역사적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 교수는 “한국 정부는 국제적 판결을 받는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불법성, 2015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피해자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은 점 등에 대해 국제사회에 적극 알려야 한다. 이는 한국이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부분을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며 “이는 의미가 크다. 한국이 국제적 판결에서 지더라도 역사적 의미에서 승리다”라고 주장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 정부가 중재위로 가는 것을 더 이상 피하기 어렵다. 한국이 중재위에서 지더라도 일본의 역사적 책임과 과거사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며 “한국 정부는 중재 절차로 가면 배상 문제 뿐 아니라 일본 정부의 사과, 재발 방지 약속 등 피해자의 인권적 요소도 함께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인지에 대해 중재 절차를 받으면 안 된다는 의견들도 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을 지낸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과 일본 간 역사 문제를 제3국에 판단을 받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중재를 받는다고 해서 한일 간 역사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일본 정부의 현재 목적은 한일 갈등 해결이 아닌 긴장 조성에 있다”고 말했다.
오성희 정의기억연대 인권연대처장은 “법적 배상 문제에 대해 중재나 국제적 판결을 받아선 안 된다. 지게 되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법적 구제가 불가능하다”며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범죄 사실 인정과 이에 따른 법적 배상이다. 한국 정부로부터 돈을 대신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피해자들은 돈이 없어서 달라는 게 아니라 일본 정부의 범죄 사실 인정이 목적이다”고 말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한일 간 역사 문제를 중재 등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중재나 국제사법재판소 결정에서 한국이 지면 일본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는 데도 정당성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19-07-11> 시사저널
☞기사원문: 경제로 번진 한·일 역사 문제···‘중재위 수용 여부’ 전문가 의견 갈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