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사학재단 최초로 전임 이사장들의 민간인 학살과 친일행적을 사죄한 황상익 성신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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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학재단 최초로 전임 이사장들의 민간인 학살과
친일행적을 사죄한 황상익 성신학원 이사장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7월 11일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최근 성신학원 이사장에서 퇴임한 황상익 서울대 명예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황상익 교수는 오랜 기간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교수로 재직했고 대한의사학회, 한국과학사학회, 한국생명윤리학회 회장과 제1, 2대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95년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여 지금껏 후원해왔고 2010년에는 연구소를 방문해 강제병합도록을 기증해 주었다.

문 : 성신학원 이사장으로서 그간 학원 정상화에 노력하시다가 이제 그 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소회를 말
씀해주십시오.

답 : 2017년 7월 교육부로부터 성신학원 임시이사로 부임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학비리와 학내 분규로 성신여자대학교의 상황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어왔기 때문에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요. 9월말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임된 뒤 성신학원 구성원들의 생각과 소망을 듣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심화진 전 총장의 10년간 전횡으로 인해 성신학원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어요. 이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기 위해 이사회에서는 심 전 총장의 탄압에 맞서 성신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온 김호성 교수를 총장으로 선임하여 그분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작년 7월 성신학원의 첫 직선제 총장으로 양보경 교수가 취임하여 학원 정상화의 길을 밟고 있습니다. 성신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한 2년 가까이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교수와 학생, 직원과 동문 등 성신학원의 모든 구성원들과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최소한의 성과는 거두었다고 자평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대한의원 전경. <대한의원개원식 기념사진첩>(1907).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소장.

문 : 2007년 당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문제가 사회적인 이슈였습니다. 연구소도 그해 3월 우정사
업본부를 상대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만 기각되고 말았습니
다. 의사학(醫史學) 전문가로서 우표 발행 등 기념행사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하셨는데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답 : 1907년 3월 만들어진 대한의원은 ‘이토 히로부미의 병원’이자 ‘의료계의 통감부’라고 말할 수 있어요. 대한의원은 통감 이토의 강력한 의지로 설립되었어요. 이토는 대한의원을 내부가 관장하던 병원업무와 학부 소관이던 의학교육, 그리고 위생국이 담당하던 보건위생행정을 모두 포괄하는 기구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보건의료를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일본인의 한국 이주를 촉진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고요. 게다가 국채보상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에 일본으로부터 새로 거액의 빚을 얻어 세운 것이 대한의원입니다. 이렇듯 대한의원이 한국인에게는 온통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기에 이를 기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서울대병원이 이러한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한의원을 자신의 전신인양 끌어안는 것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통감부를 칭송하고 기념하는 것과 마찬가지 행위이지요. 당시 이를 피해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울대병원측은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대한의원 100주년, 제중원 122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이들 병원의 역사적 성격, 그 계승성 등을 정리하는’ 포럼의 위원장직을 맡아달라고 해서 수락했습니다.
포럼은 2006년 8월부터 12월까지 여러 차례 회의를 열어 의견을 모았고 이듬해 1월 기념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서를 서울대병원측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포럼의 결론을 충실히 받아들이겠다는 병원의 애초 약속과는 달리 기념사업은 그대로 강행되었어요. 3월 15일 기념식이 열렸지만 주요 내빈들이 참석하지 않아 얼치기 행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후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더 이상 대규모 기념행사가 열리지는 않았지만 대한의원에 관한 잘못된 잔재가 병원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역사와 진실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문 : 올해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이라 이를 기리는 정부행사나 학술대회가 많았습니다. 의학계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는지요.

답 : 지난 2월 25일에 서울대 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병원 주최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가졌습니다. ‘의학도, 3·1운동의 선두에 서다’라는 주제였는데 저도 ‘의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민족자주의식과 항일운동’이란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사실 의학도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1909년 12월 22일 친일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던 이재명 의사 의거를 도운 의학도 두 분이 있었어요. 오복원과 김용문 선생입니다. 1902년(?) 의학교에 입학한 오복원 선생(1886~1959)은 이재명 거사에 자금을 조달했죠. 10년형을 받고 1919년 출옥 후 모진 옥고 때문인지 속리산에서 은둔생활을 합니다. 1963년 정부로부터 독립장이 추서되었지요.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
에 입학한 김용문 선생(1888~1972)은 이완용의 동정 파악으로 거사를 도왔습니다. 1916년 출옥 후 만주로 망명, 흑룡강성에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군사교육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90년에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3·1운동 때도 의학도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 한위건, 최경하, 나창헌, 이미륵,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김문진, 이용설, 배동석 등이 대표적이죠. 이 가운데 김형기(1896~1950) 선생은 3·1운동 당시 졸업을 눈앞에 둔 경성의전 4학년으로서 학교 대표를 맡아 다른 학교 대표들과 거사준비모임을 가지고 구체적인 만세시위계획을 세웠으며 3월 1일 당일 탑골공원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실제로는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당시 학생으로서는 형량과 실제 수감기간이 가장 길었지요. 출옥 후 복학하여 의사가 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의열단 등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습니다.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의 숙부인 박일형이 김형기 선생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해방 이후 부산에서 민족혁명당과 민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로 인해 6.25 초기 김창룡의 CIC에 체포되어 학살당하고 맙니다. 그나마 다행히 1990년에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전임 이사장들의 수치스러운 행적이 세상에 알려져 성신학원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우려가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대학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난 시대의 과오들에 대해 반성
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또한 전임 이사장들이 살아서 하지 못한 참회와 사죄를 대신하는 것이 피해자들
뿐만 아니라 그분들에 대해서도 진정한 추도라고 생각합니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나치의 만행에 대해 피해자들과 인류에게 사죄한 것은 독일의 위상을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독일이 다시 태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요.

 

문 : 6월 18일 성신여대 성신민주광장에서 열린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 선생 추도식에서 중대 발표를
하셨습니다. 전임 이사장들(이숙종, 조기홍, 심용현)의 죄과를 성신학원 구성원과 국민들께 사죄한다는 것이었죠. 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하고 중대한 사안인데도 <오마이뉴스> 등 일부 인터넷 매체의 보도 외에 주요 방송이나 일간지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중대 발표를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답 : 일차적으로 〈오마이뉴스〉 6월 4일자 「심용현 전 성신학원 이사장, 민간인 학살 주범 입증 문서 발굴」 기사가 계기가 되었지요. 보도가 나가고 며칠 후 ‘대전 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정식으로 면담 요청을 하고 6월 14일 성신학원을 찾아왔습니다. 유족회는 심용현 전 이사장의 만행에 관련하여 성신학원은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기록으로 남기며 운정캠퍼스에 설치된 심용현 전 이사장의 흉상을 철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6월, 2천 명가량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충남지구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되었고 이는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결정했습니다. 그 학살사건 당시 현장 지휘자인 심 아무개 중위가 이번에 발굴된 군 복무 시절 ‘자필이력서’를 통해서 동일인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숙종 설립자의 조카인 심용현은 1954년부터 1986년 사망하기까지 30여 년간 성신학원의 이사를 지냈으며, 그 사이 네 차례에 걸쳐 10년 남짓 이사장까지 맡았어요. 심용현 전 이사장 집단학살 만행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도 사죄도 없었습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이 있고나서도 심용현의 딸인 심화진 전 총장은 사죄는커녕 2011년 심용현 전 이사장의 흉상을 세우는 등 피해자와 유족 등에게 2차, 3차 가해를 지속했습니다. 저는 심용현 전 이사장의 만행과 2차, 3차 가해에 대해 진심어린 사죄를 드릴 뿐 아니라 일련의 과오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기록, 교육 등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천명했지요.
아울러 저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등으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이숙종 설립자와 성신여대 초대 총장을 지낸 조기홍 전 성신학원 이사장의 행위에 대해서도 성신학원을 대표하여 직간접 피해자들과 성신구성원들, 그리고 국민들께 사죄했습니다. 살아생전 이숙종 설립자와 조기홍 전 이사장에게서 반성과 사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화진 전 총장은 2009년 12월 28일 다른 5개 대학 총장들과 연명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의 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대통령 등에게 제출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를 단죄하지도 못했고, 또 그들 스스로도 참회, 사죄하지 않은 것이 해방 후 민간인 학살 등의 만행과 역사왜곡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전임 이사장들의 수치스러운 행적이 세상에 알려져 성신학원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우려가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대학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난 시대의 과오들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또한 전임 이사장들이 살아서 하지 못한 참회와 사죄를 대신하는 것이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그분들에 대해서도 진정한 추도라고 생각합니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나치의 만행에 대해 피해자들과 인류에게 사죄한 것은 독일의 위상을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독일이 다시 태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요.

문 : 끝으로 정년퇴임을 하지 못한 사연과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연구소 회원들에 대한 당부 말씀을 해
주십시오.

답 : 저는 정년퇴임을 두달 앞둔 2016년 12월 교육부로부터 직권 면직되었습니다. 서울대 법인화 반대와 관련된 일이지요. 2012년 1월의 법인화에 즈음하여 교육부는 법인으로 소속을 변경하는 교수는 임기(정년)를 보장하고 교육공무원으로 남는 교수는 5년 동안만 임기를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저는 법인화를 반대해온 사람으로서 법인으로 소속을 변경하는 것은 원칙과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원래 신분을 고수했고 그 결과 2016년 12월 27일자로 면직되었습니다. 교육부 특별징계위원회의 직권 면직이라는 형식이 언짢긴 했지만 별 문제 제기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한편 교육부의 조치가 사회적 물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서울대 본부는 직권 면직되는 6명을 특별 채용하여 정년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저는 5년 전의 제 결정을 스스로 부인하는 그런 미봉책을 유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저는 제 기준에 따라 판단한 것일 뿐이지요. 그와 별도로 서울대는 30여 년 간의 교수 경력 등을 인정하여 저를 명예교수로 위촉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보건과 의료에 관한 그동안의 제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보완, 보충하여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할 숙제입니다. 그리고 올 하반기에는 앞서 언급한 이재명 의거에 함께 한 오복원, 김용문 선생, 3·1민족민주혁명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형기, 한위건 선생 등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확대된 기념사업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박물관 진열장에 누워있는 박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속에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할 때 현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개척할 힘이 나올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바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최근 아베 만행에 동조하는 등 우리 사회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반역사적 망동에 대해 더욱 경각심을 갖고 대처해 나갑시다. 더불어 휴전선 너머의 동포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감싸 안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맙시다.

 


 

〈 설립자 리숙종 선생 추도식 인사말(발췌) 〉

오늘은 성신학원을 세운 운정 리숙종 선생이 별세하신 지 34년이 되는 날입니다. 선생은 1936년 성
신여학교를 설립한 이래 반백년 동안 성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운정 선생과 수많은 성신
가족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성신이 지금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
었습니다.
이제 성신학원은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는 시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전환은 단순히 4년 남짓 임시이사들이 성신학원을 운영해온 시기를 마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신이 실로 오랜 기간의 혼돈과 고통을 끝내고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안정적으로 도모하는 시대를 맞이한다는 역사적인 의의를 갖습니다.
이러한 시점을 맞아 저는 오늘 크게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성신학원을 대표하여 사죄의 말씀을 드리
고자 합니다.(중략)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의 현장 책임자인 심용현 전 이사장은 결코 성신학원에 발을 들여놓
아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심용현 전 이사장의 성신학원 관여에 관련 있는 사람들은 설령 그의 악
행을 몰랐다 하더라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악행을 알고서도 심용현 전 이사장을 성신학
원의 이사로, 상임이사로, 이사장으로 임용하는 데 관계했다면 책임의 성격과 정도는 근본적으로 달
라질 것입니다.
심용현 전 이사장의 집단학살 만행에 대해서 지난 69년 동안 아무런 반성도 참회도 사죄도 없었습니
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이 있고나서도 사죄는커녕 성신학원의 이름으로 피해자와 유족 등
에게 2차, 3차 가해가 지속되었습니다. 집단학살 자체는 성신학원과 무관할 것입니다. 하지만 피해자
와 유족 등에게 계속 가해진 2차, 3차 가해는 성신학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심용현 전 이사장이 성신학원의 이사, 상임이사, 이사장으로 무려 32년 이상 재직한 것 역시 성신학원의 책임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심용현 전 이사장과 관련해서 발생한 성신학원의 모든 과오에 대해 학살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또한 이러한 수치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시정되지 않은데 대해 성신구성원들과 국민들께 진심어린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의 사죄로 그치지 않고 일련의 과오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기록, 교육 등 응분의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입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 민족이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일제강점기 동안 자행된 반민
족행위의 규명과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민족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6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만시지탄이지만 2004년 3월 22일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를 위하여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6개월 동안의 활동을 통해 1,006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습니다. 이 1,006명 가운데 교육계 인사는 22명이며, 우리성신학원과 관련된 사람은 2명입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성신학원의 설립자이며 1985년 6월 18일 별세할 때까지 성신학원을 주도적으로 운영해온 리숙종 전 이사장의 일제강점기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호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제2조 제13호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
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
위”, 제2조 제17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하여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위원회는 성신여대 초대 총장을 지낸 조기홍 전 성신학원 이사장의 행위도 〈특별법〉 제2조 제
13호, 제17호에 규정된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얼마만큼 참회하고 사죄해야 일제로부터 해방된 민족의 국가에서 신성한 교육활
동에 참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립자와 조기홍 전 이사장에게서 반성과 사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법적 절차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되었으면 그에 대해 반성과 사죄가 따라야 마땅할 것이지만
당시 성신여대 총장 심OO씨는 2009년 12월 28일 다른 5개 대학 총장들과 연명으로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보고서”의 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대통령을 비롯한 교육과학기술부, 행정안전부 장
관 등에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4월 12일에는 심용현 전 이사장의 흉상과 함께 설립자의 두번째 대형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친일반민족행위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을 분들께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행각입니다.
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아무런 참회나 사죄 없이 우리 성신학원의 이사장 등 핵심 요직을 지낸
사실에 대해서, 또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된 데 대해 타당한 근거도 없이 시정을 요구한 행위 등에
대해서 성신학원 이사장 자격으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을 모든 분들과 국
민, 그리고 성신학원 구성원들께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학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수
치스러운 과오들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역사기록, 교육 등 응분의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학원은 인간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민주국가의 보루입니다. 반민
족, 반민주, 반인권, 반평화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진실과 정의의 전당입니다. 우상은 한 점 남
김없이 철거되고 이성이 참 빛을 발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학원이 제 구실을 하려면 모름지기 지난
시대의 잘못과 과오들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고 사죄해야만 합니다. 역사와 진실을 외면한 채 미래
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추도란 무엇일까요? 저는 고인들이 살아서 하지 못한 참회와 사죄를 대신 하는 것이 포함되
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피해자들과 고인들이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을 바탕으로 한 참회와 사죄와 화해, 국가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신학원 차원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성신공동체는 유한한 개인을 넘어 지속되어야 하며 성찰과 화합 위에서 발전해야 합니다.
설립자 운정 선생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인사말을 마칩니다.

2019년 6월 18일 학교법인 성신학원 이사장 황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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