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박자혜의 삶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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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3]

 

박자혜의 삶과 투쟁

예지숙 선임연구원

 

박자혜(1895~1943)는 당대에 흔치 않은 직업여성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간 신채호의 부인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페미니즘의 부상에 따라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호응하여 이 글은 ‘직업여성’ ‘사회인’으로서 박자혜의 성장과 활동에 방점을 두고자 한다.

 

근대문명으로의 전환과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의 등장
박자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근대문명으로의 전환기의 여성의 위상과 젠더 규범의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사에서 ‘여성’이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 활동기인 1898년이었다. 양반 부인들은 조선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讚揚會)’를 결성하고 한국 최초의 여권선언이라고 불리는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하여 관립여학교 설립을 청원하였다. 이들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근대적 정치운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퇴위를 당하고 국권 침탈의 위기에 직면하자, 양반부인과 기생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다.
근대문명의 유입과 함께 여학교가 생기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에는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은 여성들이 전면에 나섰다. 여학생, 교사, 전도부인, 간호부 등은 기존의 내외규범을 위배하고 집과 학교의 담장을 넘어 거리로 진출했다. 3·1운동 이후 “가장 열렬하게 급진한 것은 부인계”라는 평가나, <개벽> 창간호(1920.6)의 논설에 “노동문제, 부인문제, 인종문제, 사회문제”를 전인류의 문제라 언급한 것은 ‘여성’의 등장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누군가의 아내/딸이 아닌 대체 불가의 자아를 가진 개인으로 성장한 여성들이 공적 공간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학교, 교회, 직장 등을 기반으로 한 ‘여성 네트워크’를 통하여 3·1운동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여학교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 유학은 필수였다. 졸업 후 각 지역으로 흩어서 교사나 전도부인으로 생활했기에 ‘여성 네트워크’는 전국적이라 할만 했다. 일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최초의 여성의원인 김마리아는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이후 국내로 들어와 부산, 광주, 황해도, 경성 등지로 이동하면서 3·1운동을 전국화 하였다. 이러한 여성들의 활약은 3·1운동의 결과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장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에 ‘남녀평등’의 조항이, 의회 구성에 관련한 법인 임시의정원법에 여성 참정권이 포함된 것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이 등장한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직업여성으로 성장한 박자혜
박자혜는 근대로의 전환기인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하였다. 출생 연도와 출생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음을 밝혀둔다. 4세의 어린 나이에 입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출궁하였다. 박자혜는 대한제국궁녀에게 필요한 근대적 지식의 위탁 교육처인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들어가 여학생이 되었다. 1914년에 기예과를 2회로 졸업하고 사립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산파교육을 받았다. 졸업과 함께 산파면허증을 획득하였고, 1916년경부터는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산파는 당대의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새롭고도 드믄 전문직이었다. 우선 산파는 간호사로 병원에 취직할 수 있었다. 개업할 수도 있어 결혼의 제약에서 자유로웠으며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근대적 위생을 실현하는 의료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질 만한 직업이었다. 한 신문기사에는 산파의 직업적 가치를 “새 생명의 탄생을 취급하는 것이므로 그 사회적 중요성은 실로 크며, 인간사회의 운명을 위하야 가장 축복받아야 할 거룩한 직업”이라고 평가하였다. 경제적 이득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역할 때문에 일제 시기 활약한 여성명사 중 산파를 직업으로 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유명한 정종명도, 진주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하여 모자보건사업을 한 한신광도 산파였다.

3•1운동이 몰고 온 변화
박자혜는 궁인, 학생, 간호부로 생활하면서 경제적 능력을 보유하고 나아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여성 주체로 성장하였다. 이때까지 그녀의 삶에 민족의식 정치의식의 영향이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3·1운동 전까지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목도하지도 않았고, 민족의식에 접속할 만한 사회집단에 가까이 있지도 않았다. 사립조산원양성소의 교육은 전문인을 양성하고 더 나아가 근대적인 의학을 보급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졸업생들은 신문에 사진이 나오고 이력이 소개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출산위생을 책임질 재원으로 각광받았으며, 위생으로 대표되는 근대문명을 전파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조선총독부의원의 경우에도 의료인력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전체 간호사 중 한국인 간호사의 비중을 보면 1916년 23%, 1917년 16%, 1918년 8%, 1919년 10% 정도였다. 조산부양성소도 조선총독부의원도 일본이 주도하는 근대문명의 우월성이 압도하는 공간이었다. 일제의 항시적 차별을 매일 목격하고 인식하였겠으나 그것이 저항의식과 행동으로 곧바로 전화하지는 않는다. 근대문명에 내재한 차별적 인식과 타자화를 내면화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시위는 직업인 박자혜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의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만세시위를 경험하였다. 연일 만세시위가 계속되고 부상자들이 실려오자 박자혜의 정치적 각성이 시작되었다. 박자혜는 병원에 실려 온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3월 6일 오후 6시 동료 간호사들을 모아 함께 시국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10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또한 다른 병원의 한국인 간호사들과 연락을 취하여 태업을 주도하였으며 ‘간우회’라는 간호사 조직을 만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행동을 하면서 박자혜는 일본 경찰에 주목을 받았다.

1920년 박자혜와 신채호 결혼사진

 

신채호와의 결혼과 ‘재생산노동’

만세운동에 가담하면서 당국의 주목을 받은 박자혜는 병원을 그만두고 북경으로 떠났다. 연경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서 공부를 하던 중 1920년 이은숙의 소개로 신채호(1880~1936)를 만나 결혼하였다. 신채호는 1895년에 이미 결혼했으나 아들의 급작스런 사망과 중국 망명을 계기로 1910년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에 밭 5마지기의 재산을 주어 친정으로 부인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박자혜가 신채호와 같이 산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신채호는 “자신은 가정에 등한한 사람이니 미리 알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921년 첫 아이를 출산한 박자혜는 1922년에 임신 5개월의 상태로 육아와 생계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극장 뒷골목에 소재한 인사동 122번지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아이들과 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산원은 요청이 있을 때 산모의 집으로 왕진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월수입 40원 정도는 올린다는 말도 있었지만 실상 수익은 시원찮았다. 우선 산파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근대 의학이 출산에 개입하는 정도도 낮았고 계몽적인 수준이었다. 조산원이 도시에 집중되어 실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편이었다. 또한 손님보다 일본 경찰이 더 많이 드나드는 통에 조산원 운영에 차질이 많았다. 육아와 가사노동에 가장 역할까지 도맡으면서 박자혜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박자혜 여사와 그가 운영했던 산파소 모습. 동아일보 1928.12.12.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박자혜는 신채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부의 연을 이어갔다. 1926년 12월 나석주 의거 때에는 서울 지리에 어두운 의열단의 길잡이가 되어 활동을 도왔다. 박자혜가 신채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경이었다. 1928년이라는 주장도 있음을 여기서 밝힌다. 실명의 위기에 빠진 신채호가 아이가 보고 싶으니 북경에서 들어오라고 하여 그곳에서 한 달간 생활했다. 비록 오랜 기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신채호는 소맷동냥이라도 해서 아이들을 외국 유학시키고 싶다는 살가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기쁨도 잠시 1928년 4월 신채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고 영어의 몸이 되자 박자혜는 옥바라지까지 하게 되었다. 대련의 가혹한 추위에 지친 신채호는 조선 솜을 두텁게 넣은 옷을 넣어달라고 청하기도 했고 한 달 벌이보다 훨씬 비싼 <국보조감> 같은 책을 부쳐 달라기도 했다.
가난한 형편에 이를 감당하지 못한 박자혜는 끝끝내 죄스러워하였다. 1936년 2월 21일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후 박자혜의 삶은 더욱 어렵고 고독하였다. 상주라고 손님들이 찾아오지도 않았고 신채호 생전에 가끔 들르던 인간관계도 뜸해졌다. 1943년에 박자혜는 셋방에서 쓸쓸히 사망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신채호 선생의 유골함을 안고 있는 박자혜 여사. 동아일보 1936.2.25.

 

박자혜를 통해 본 여성독립운동의 의의
3·1운동에 동참하기 전의 박자혜는 열혈의 독립운동가보다 보통의 한국인들에 더 가깝다.
일상의 고단함을 겪으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한국인들은 1919년 3월에서 4월에 벌어진 다 양한 저항을 경험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였다. 3·1운동을 외면하였더라면 박자혜의 삶은 일제가 주도하는 세계 속에서 평온했을 것이다.
3·1운동 이후 그녀의 행보는 보다 과감해졌다. 북경 유학을 감행하였고 신채호와의 사랑을 선택하여 독립운동의 고단한 길에 동참하였다. 박자혜는 결혼 이후 공적 영역에서 활동이 거의 없고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을 유지하는데 주력하였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밝혀진바 기록상 거의 유일한 공적 활동인 의열단원조를 높게 사거나 그 외에 이러저러한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독립운동을 공적 영역의 것으로 한정해보았을 경우 박자혜와 같은 인물이 행적은 다소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박자혜는 신채호가 안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가정이라는 근거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활동을 하였다.
남성들이 밖으로 떠돌 때 여성들이 수행한 재생산노동, 돌봄노동은 독립운동이 장기 지속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었다. 누군가의 부인, 며느리로 불려온 이은숙, 허은, 한도신, 정정화와 같은 여성들의 노동이 아니었으면 장기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했을까? 독립운동의 역사가 매일의 거사로 기록되지는 않는다. 매순간 생존 자체가 절박했으며 이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근거지를 유지하는 것이 평상시 보다 중요했던 곳이 바로 독립운동의 공간이었다.
박자혜는 20세기 초 궁인으로 시작하여 근대적 여성교육을 받고 당대에 드믄 직업인·사회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신채호와 결혼하였고 가정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박자혜를 통하여 젠더사적 맥락에서 근대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등장을 살필 수 있으며 독립운동 상에서 ‘재생산노동’의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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