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비망록 49]
용산육군묘지, 남산 기슭에 터를 잡은 침략전쟁의 기념공간
이곳이 개인별 묘지가 아닌 합장묘탑의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7)에 수록된 제물포 일본군 묘역의 모습이다. 표목 옆에 기재된 ‘보병 제21연대’라는 구절이 이들의 정체가 청일전쟁 때의 전사자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찍이 우리나라와 관련한 근대시기 서양도서자료에 입문하던 시절에, 영국인 여행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가 지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을 뒤져보다가 개인적으로 꽤나 궁금증이 일던 사진 한 장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제물포(濟物浦)의 어느 언덕 위에 백여 기(基) 남짓한 일본군 묘지가 빼곡히 들어선 모습을 담아낸 사진이 바로 그것이었다.
먼저 떠오는 물음은 저들은 누구이며, 왜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추론컨대 버드 비숍은 1894년 3월에 처음 서울을 찾은 이래로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한 행적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필시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전사자를 가매장(假埋葬)한 광경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표목(標木) 측면에 표시한 ‘보병 제21연대(步兵 第二十一聯隊)’라는 구절은 이들이 일본군 쪽의 선발대인 오시마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의 주력 예하 부대(보병 제11연대와 보병 제21연대)에 소속된 군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곳 묘지에 묻힌 이들 유골이 그 후에 어떻게 수습되어 어디로 옮겨갔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인천부청(仁川府廳)에서 편찬한 <인천부사(仁川府史)>(1933), 1424~ 1425쪽에 수록된 ‘묘지 및 화장장’ 관련 항목을 살펴보면, 진즉에 개항 당시부터 인천지역에 ‘해군묘지’와 더불어 ‘육군묘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육군중위 호리모토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피살된 바로 그 ‘별기군 훈련교관’ 호리모토이다.
(1876년) …… 이들 구로다 전권(黑田 全權) 일행이 강화도(江華島)에 상륙하고자 단정(端艇)이 곧바로 본선(本船)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 전복되어 3명의 수병(水兵)이 행방불명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때는 엄한(嚴寒)인 시기여서 수색이 마음 같지 않았고, 일행이 조선을 떠날 때까지 사체(死體)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인천해안에 표착(漂着)하기에 이르자 조선정부가 그 언덕에 매장한 것이 인연(因緣)이 되어 개항 후에 해육군묘지(海陸軍墓地)가 선정되어졌던 것이다.(중략)
이 묘지 이외에 명치 15년(1882년), 17년(1884년)에 걸친 양차의 사변(즉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조난(遭難)된 육군군인(陸軍軍人) 및 공사관 관원(公使館 館員)을 매장했던 탁계현 육군묘지(濁溪峴 陸軍墓地)가 있었다. 두 사변의 조난자, 육군군인, 군속, 인민(人民)을 불문하고 그 사체를 인천으로 옮겨와 육군중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육군대위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이하 23명을 탁계현묘지에, 나머지는 해군묘지에 매장했던 것이다. 이 탁계현 육군묘지의 위치는 사정(寺町, 데라마치) 11번지 금광교회당(金光敎會堂) 서린(西隣)의 지점이었는데, 명치 38년(1905년) 공동묘지가 지금의 율목리공동묘지(栗木里共同墓地)로 이전되면서 이 자리는 시가지로 개착되는 동시에 역시 현재의 율목리묘지로 이장되었다.
이 가운데 해군묘지는 1926년 7월에 진해요항부(鎭海要港部)의 계획에 따라 진해 도산(鎭海 兜山, 가부토야마)에 새로운 묘지가 마련되어 그곳으로 옮겨졌고, 인천에는 ‘해군묘지기념비(海軍墓地記念碑, 1926년 8월 9일 건립)가 별도로 만들어졌다. 이때 일본군(해군)의 유골은 원산에서 3주(柱), 인천에서 39주, 부산에서 20주, 합계 62주가 진해로 일괄 이장되었다고 알려진다.
<용산시가도> (1929)에 나타난 ‘육군묘지(동빙고리 산 1번지)’의 위치이다. 이곳은 1907년에 조성된 육군매장지이고, 1931년에는 ‘이태원리 산 1-2번지’에 새로 조성된 용산육군묘지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확인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소화 6년) 용산육군용지 관리체인계도공>에 수록된 용산육군묘지 관련 평면도이다. 위쪽에 보이는
260번지 구역과 아래쪽에 보이는 147번지 구역은 지금도 해당 지번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지번 위치를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 국가기록원)
한편, 육군묘지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니 일본군대의 핵심주둔지역인 서울 용산에도 이러한 시설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확연히 드러난다. 우선 러일전쟁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 병영지가 건설되는 과정과 그 내역을 담아낸 조선주차군 경리부(朝鮮駐箚軍 經理部) 편찬,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급 숙사건축경과개요(朝鮮駐箚軍 永久兵營, 官衙 及 宿舍建築經過槪要)> (1914)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띈다.
육군 매장지(陸軍 埋葬地) 및 화장장(火葬場)은 용산의 동남방(東南方) 오바나가오카(尾花ケ岡)에 면적 14,000평을 정하여, 동 매장지 내에 연와조(煉瓦造, 벽돌건물)의 소각조(燒却竈), 회교(灰窖), 목조(木造)의 휴게소 및 번댁(番宅)을 건설했고, 건평은 25평 남짓으로 함. 본 공사는 명치 40년(1907년) 5월 기공하여 동년 7월 준공함. 이 공사비 총액은 3,516원 남짓으로 함. 이상 배치도 참조.
제멋대로 그들 식의 ‘오바나가오카’라는 지명을 붙여놓은 육군 매장지는 <일만분일 경성지도(1915년 측도 및 1921년 수정 측도)>나 <용산시가도>(1927년판 및 1929년판)에 ‘육군묘지’로 표시된 내역을 통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나아가 「지적원도(地籍原圖)」와 「임야조사부(林野調査簿)」와 같은 자료를 통해 관련 내용을 추적하면, 이 자리가 바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동빙고리(東氷庫里) 산 1번지(묘지)”인 것이 어렵잖게 확인된다. 「임야조사부」에는 이곳의 면적이 2.23정보(町步; 6,690평)이며, 1917년 9월 25일에 국유지로 신고된 사항과 함께 조선주차군 경리부가 연고자로 등재되어 있다.
「임야조사부(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동빙고리)」에 나타난 ‘산 1번지(묘지)’ 내역에는 연고자가 조선주차군 경리부라고 기재되어 있다. (ⓒ 국가기록원)
「임야조사부(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에 나타난 ‘산 1-2번지(묘지)’ 관련내역이다. 이곳은 원래 외남산 국유림에 속한 구역이었으나 일부가 분할되어 ‘조선주차군소관보관환지’로 전환된 바 있다. (ⓒ 국가기록원)
그런데 <동아일보> 1938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군사령부서도 요배식 거행, 식후 육군묘지 참배」 제하의 기사를 보면, 당시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를 맞아 고이소(小磯) 조선군사령관이 요배식과 더불어 육군묘지를 참배한 내용이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약간 색다른 대목은 이 기사에서는 육군묘지의 소재지를 ‘동빙고리’가 아닌 ‘이태원’이라고 적고 있다는 부분이다.
정확한 시기는 가늠하기 어려우나 그 사이에 육군묘지의 위치가 변경된 것으로 짐작할 수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한 궁금증을 명쾌하게 풀어주는 자료는 <(소화 6년) 용산육군용지 관리체인계도공(龍山陸軍用地 管理替引繼圖控)> (국가기록원 소장자료)이라는 서류철이다.
여기에는 「용산육군묘지 용지평면도」가 첨부되어 있는데, 해당 위치는 ‘이태원리(梨泰院里) 산 1-2번지(묘지)’로 표시되어 있다. 서류철의 표제에 ‘소화 6년’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태원리 육군묘지는 ‘1931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봐야할 듯싶다.
「임야조사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을종요존 외남산 국유림(乙種要存 外南山 國有林)에 속한 곳이었으나 조선주차군 소관 보관환지(保管換地)로 처리되면서 2.4609정보(7,382.7평)의 면적이 ‘이태원리 산 1-2번지’로 분리되어 육군묘지로 전환된 것으로 확인된다.
<매일신보> 1938년 8월 7일자에 수록된 용산육군묘지의 묘탑 전경이다. 앞에서 작업하는 이들은 사
상보국연맹에 소속된 70명 규모의 사상전향자들이다.
<매일신보> 1940년 3월 11일자에 수록된 보도사진에는 ‘육군기념일’을 맞이하여 용산육군묘지에 참배하는 미나미 조선총독의 모습이 담겨 있다.
경성사범학교 학생들의 근로봉사 장면을 담아낸 <매일신보> 1940년 8월 24일자의 보도사진이다. 잇따른 침략전쟁으로 전사자가 속출하자 묘역을 확장할 필요성이 제기된 상황으로 이해된다.
<매일신보> 1938년 8월 7일자에는 사상보국연맹(思想報國聯盟)의 박영철(朴榮喆) 총무와 함께 사상전향자(思想轉向者) 70명이 이곳에서 근로작업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자료가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당시에 이미 큼직한 묘비(墓碑)가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매일신보> 1940년 9월 19일자에도 만주사변 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국방부인회(國防婦人會)에서 이곳 용산육군묘지 비석 앞에서 위령대법회(慰靈大法會)를 집행하였다는 기사와 더불어 관련 사진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육군묘지와 관련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1938년 5월 5일 육군성령(陸軍省令) 제16호로 제정된 육군묘지규칙(陸軍墓地規則)의 등장이다. 이것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 잇따른 침략전쟁으로 일본군 전사자가 속출하자 이들의 유해를 관리하는 새로운 방안을 고안한 결과물이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38년 5월 6일자에 수록된 「각 위수지(各衛戍地)에 육군묘지 신설(陸軍墓地 新設)」 제하의 기사에 잘 서술되어 있다.
[동경전화동맹(東京電話同盟)] 호국(護國)의 군신(軍神)으로 된 용사들의 훈(勳)을 영구히 예찬코자 육군에서는 금번 내지(內地, 일본), 조선, 대만의 각 위수지마다 1개소 이상 육군묘지를 설치 영령(英靈)을 합장(合葬)하여 각지 국민존숭(國民尊崇)의 중심으로 제사(祭祀)지내기로 하고 5일 성령(省令) 제16호로 ‘육군묘지규칙’을 공포 즉일 시행하였다. 지금까지는 전장(戰場)과 공무 사망(公務 死亡)의 용사들은 ‘육군매장규칙’에 의하여 육군매장지에 매장되었던바 동 규칙은 시대의 변천에 반(伴)하여 불비(不備)의 점이 많고 특히 장교, 준사관, 하사관 등의 병(兵)마다 묘지를 구분하는 등은 황군 건군(皇軍 建 軍)의 정신상으로 보아 재미없다. 우(又) 일인일인(一人一人)의 묘지는 제사에도 불편이 다(多)하므로 금번의 개정이 된 것이다. 신규칙의 내용은 대체 여좌(如左).
1. 군인 군속(軍人 軍屬)의 전상사자(戰傷死者) 급(及) 전시사변 때문에 부상자 우(又)는 전시사변의 상병질병(傷兵疾病)이 원인으로 되어 그날부터 3년 이내에 사망한 자 병(並) 평상에 있어서도 공무(公務)로 상이질병(傷痍疾病)을 수(受)하고 동(同) 2년 이내에 사몰(死歿)한 자는 전부 각 위수지의 육군묘지에 합장한다.
2. 합장은 유골 우(又)는 유발(遺髮)을 나누어 직경(直徑) 약 10촌(吋, 인치), 고(高) 약20촌(吋)의 백색호(白色壺) 우(又)는 백회재(白檜材)의 상(箱)에 넣어 정면(正面)에 용사 등의 계위훈공씨명(階位勳功氏名)을 쓰고 이면(裏面)에 사몰의 연월일을 쓴다.
3. 합장묘탑(合葬墓塔)은 1전쟁(戰爭) 1시도(時度)마다 1기(基)를 건립, 평시(平時)는 공무사몰로 별(別)로 1기를 건립한다.
4. 합장묘탑의 표면(表面)에는 ‘〇〇전역전몰자합사지묘(何何戰役戰歿者合祀之墓)’라고 기입, 이면(裏面)에는 건설 년월일, 희생자의 소속부대도 별기(別記)하고 별개로 묘탑 각기마다 묘탑지(墓塔誌)를 명기, 합사 경과의 상세를 기록하고 번사(番舍)에 비부(備付)한다.
물론 용산육군묘지는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육군묘지규칙’에 따라 신설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후 시기에 존재했던 묘역의 구성과 관리의 현황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참고가 되는 자료인 셈이다. 여길 보면 육군묘지는 개인별 묘지가 아닌 합장묘탑(合葬墓塔)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더구나 “한 전쟁 당(當) 하나의 묘탑”이 조성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하지만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 추도제, 6일, 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를 보면 “전몰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서본원사(西本願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등 일본인 사찰에서 위령제를 지낸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실제에 있어서는 전사자의 유골이 반드시 용산육군묘지에만 봉안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매일신보> 1940년 8월 24일자에는 육군묘지를 확장하기 위한 경성사범학교 생도의 근로봉사 상황이 보도되어 있는데, 전쟁 상황이 확대 지속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에는 평소에도 묘역관리를 위한 근로봉사가 곧잘 이뤄진 기사들이 눈에 띄며, 특히 육군기념일(陸軍記念日; 러일전쟁 당시 1905년 3월 10일 만주 봉천을 포위 점령한 것을 기려 제정한 전승기념일)이나 만주사변 기념일과 같은 때에는 조선총독이나 조선군사령관이 몸소 이곳을 참배하여 위령의 공간으로 사용한 흔적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에 대한 현장탐방을 하고자 한다면, 그랜드 하얏트 호텔(서울)의 진입로가 있는 지점에서 남산순환도로(소월로)를 따라 400미터 남짓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남산체육관’을 기준으로 삼으면 찾아가기가 쉽다. 그곳에서 급경사진 골목길(소월로44길)을 따라 이태원2동 쪽으로 내려가는 행로 전체가 옛 용산육군묘지 자리에 포함된 구역이었다. 이 길을 200미터쯤 내려가면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이면도로(회나무로13가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이 용산육군묘지의 최남단(最南端)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옛 ‘이태원리 산 1-2번지’는 ‘이태원동 258번지’로 흡수되어 이미 해당 지번은 사라진 상태이나, 직사각형의 외곽 경계선은 지금까지도 지적도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이므로 간편하게 해당 구역의 범주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최북단에 해당하는 ‘이태원리 260번지’가 남산순환도로가 지나는 자리에 걸쳐 그대로 남아 있고, 최남단에 해당하는 ‘이태원리 247번지’ 역시 지번분할이 되긴 했지만 옛 구역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므로 이들 지번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유용한 방법이 될 것이다.
남산순환도로 아래 급경사 비탈면에 자리한 용산육군묘지는 지금은 이렇듯 완벽하게 주택지로 변모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일대가 십수 년간에 걸쳐 침략전쟁의 전사자를 기리는 일본군대의 기념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지금은 이 일대가 완벽한 주택지로 변모되었고 별다른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이므로 이곳에 과연 ‘용산육군묘지’가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이를 기억하는 이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곳이 일제가 남긴 침략전쟁의 기념공간이었던 만큼 현장안내판이건 일본군병영지와 관련한 안내물이건 간에 이태원리 산비탈에 일본군 전사자를 영구히 기리기 위한 육군묘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 탐방객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반드시 그 내용과 위치가 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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