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제주 4・3평화기행 ‘死삶’과 함께 진정한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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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제주 4・3평화기행
‘死삶’과 함께 진정한 평화로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지난 6월 9일부터 11일까지 2박 3일 동안 민족문제연구소 활동가 워크숍으로 제주다크투어에서 진행하는 제주 4・3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제주4・3평화공원과 선흘 목시물굴, 북촌너븐숭이, 이덕구 가족묘 및 이덕구 산전, 사리물궤와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등 평소에 쉽게가 볼 수 없는 4・3 유적지를 찾았다.

 

목시물굴, 은신했던 주민들의 심경을 헤아리며


워크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 중 하나는 목시물굴에 들어가 본 것이었다. 목시물굴은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가 초토화된 후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은신했다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장소이다. 4・3 당시 주민들이 숨어 지냈다던 굴을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하니 놀라웠다. 그러나 막상 목시물굴을 눈앞에 두고 보니 두려움이 조금 엄습했다. 지하로 난 아주 좁은 입구로 몸을 구부려 들어가야 했고, 아무리 몸을 작게 구부려도 통로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천장과 양 옆, 바닥에 있는 울퉁불퉁한 바위에 온몸이 부딪히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조금만 참고 통로를 지나니 넓은 내부의 모습이 나왔다. 넓다고도 하기 어렵지만 비좁은 통로를 뚫고 지나온 터라 내부가 널찍하게 느껴졌다. 동굴 내부에서도 높이가 제각기 달라 어떤 곳에서는 성인 남성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설 수 있는 정도였다. 우리는 잠시 그때 당시 주민들의 마음을 느껴보기 위해 모든 불빛과 소음을 차단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졌다. 굴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4・3 당시 이곳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밖에서 들려오는 토벌대의 목소리에 숨을 죽이며 정체가 들키지 않기를 속으로 얼마나 바랐을지 그 절실한 마음이 느껴졌다. 코를 찌르는 쾨쾨하고 습한 냄새는 나도 잠시 살았던 반지하에서의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이 곰팡이 냄새를 참아가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했다. 목시물굴에 들어와 보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이덕구, 그 의로운 죽음에 대하여, 모든 이유 있는 죽음에 대하여

이덕구라는 인물은 이번 4・3평화기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었으며 무장대 지휘관으로 활동한 4・3항쟁의 마지막 장두였다. 그는 치열한 항쟁 중 배신한 부하들이 끌고 온 경찰들과의 교전과정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업적은 필히 우익 군경토벌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항하여 제주도와 주민들을 지키기 위한 항쟁으로 기억되어야 하지만 남로당이었다는 이유로 빨갛게 색칠되어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남과 북 모두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그의 묘는 이덕구 큰형의 손녀인 이명자 선생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초라히 자리하게 되었다.(1990년이 돼서야 북쪽에서나마 조국통일상을 수여함)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했었다던 사려니숲길 속 이덕구 산전의 움막터에도 후대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놓은 식탁, 그리고 이곳으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음식을 차리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깨진 가마솥이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4・3항쟁으로 돌아가신 모든 영령
들을 위로하며 우리는 가는 곳마다 묵념을 올리고 단출하게나마 제를 지냈다. 비록 남은 것은 볼품없지만 김경훈 시인의 시에서처럼 그의 죽음은,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의 희생은 이유 없는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는, 고귀하고 의로운 죽음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화해와 상생, 그보다 먼저 평화통일과 자주독립
백가윤 제주다크투어 대표님의 말씀 중 “아직 화해, 상생을 말하는 것은 이르지 않나”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 완전한 진상규명과 배・보상 문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피해를 이야기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픈 과거를 딛고 평화로 나아가자는 의미로 ‘평화의 섬’ 이미지 구축을 시도했다 하더라도 그저 ‘덮어놓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평화 상생이라는 이름으로 4・3의 정신이 가려지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워크숍을 4・3평화기행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제주도 온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대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미지가 관광지, 휴양지, 아름다운 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해 제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 제주도는 관광지이기 이전에 의롭게 죽어간 영령들의 부르짖음이 아직도 들려오는 섬이었다. 그렇기에 김경훈 시인의 말마따나 평화통일과 자주독립이 온전히 이루어져야만 제주도를 진정한 화해와 상생, 평화의 섬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4・3평화기행 여정에 특별히 4・3을 노래로 만들어 알리고 있는 가수 최상돈 선생님께서도 동행하셨는데 이덕구 산전에서 말씀하시길 5・18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다면 4・3에는 ‘애기 동백꽃의 노래’가 있다고 하시면서 노래를 불러주셨다. 처음 들었던 이 노래는 구슬픈 멜로디에 처참한 현실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담한 가사로 풀어내어 어쩐지 더 슬프게 느껴졌다.
노래를 다시 듣기 위해 검색해보니 강정합창단의 이름으로 발매된 음원이 있었다. 그런데 앨범 표지와 이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死삶’. 4・3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그 표현에는 4・3 이후에도 죽은 듯이 침묵하며 살아왔던 삶, 살았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제주도민의 삶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죽음과 삶의 끝자락을 기억하는 것부터 남은 한 명까지도 진정한 삶다운 삶에 이를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까지, 모든 과거사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그러하듯, 기억하고 행동해야겠다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적적한 결단으로 마음을 매듭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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