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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피해자들은 아직 해방을 맞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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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를 제대로 된 국가라고 말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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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일 기자

“대법원 판결이 이런 파문을 가져올 줄은 생각 못했죠. 하지만 저희 피해자들 입장은 언제나 같아요. 할아버지(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생전에 제게 항상 하셨던 말씀이 ‘나는 죽어도 너는 포기하지 마라. 우리 죽는다고 재판 끝내지 말고 끝까지 가라’였어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저희는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돌아가신 분들이 생전에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받고 명예회복을 하셨다면 ‘해방된 나라에서 사는 게 맞구나’ 하며 눈물을 흘리셨을 거예요. 여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은 아직 해방을 맞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 죽어도 재판 포기하지 마라”

과거사 문제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전면적으로 치닫는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8월6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희자(76·사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를 만났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족인 그는 2000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과 손잡고 보추협을 만들었다. 보추협은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해 강제동원 피해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 유해 봉환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도 이끌어왔다.

과거 한·일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보추협과 여러 피해자 단체가 노력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일제강점기에 가려진 역사적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 “할아버지들 말대로 포기하지 않고 재판을 계속 끌고 갔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2018년 10월30일 신일철주금에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하도록 명한 판결)이 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희자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말을 되새기며 피해자들이 겪어온 고통과 분노의 시간을 최대한 담담하게 털어놓으려 했다. 한-일 갈등이 정치, 경제, 시민사회 전반으로 퍼지며 뜨겁게 끓고 있다보니 말 한마디가 의도와 다르게 왜곡돼 전달될까봐 표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랐다. 그는 현재 정치와 경제 갈등에 가려진 역사와 피해자의 문제를 봐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결국 일본이 해법을 내놔야 하는 겁니다. 일본의 잘못을 묻기 위해 저희가 소송을 한 것입니다. 답은 일본이 어떤 식으로든 내놔야 하는 거예요.”

이 대표 뒤에 자리잡은 책장에는 그가 30여 년 동안 활동하며 쌓아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재판 자료 등 각종 문서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이 대표의 아버지 이사현씨는 강화도에서 땅을 일구던 평범한 농민이었다. 하지만 1944년 2월 일본군에 징용됐다. 당시 돌을 갓 넘긴 이 대표가 어머니에게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징용을 피하려 도망 다니다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할 수 없으니 빨리 다녀오겠다”며 집을 떠났다. 아버지의 생사를 애타게 알고 싶던 이 대표는 많은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시민사회가 활성화하던 1989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문을 두드렸다. 비슷한 처지로 고통을 겪어온 이가 너무도 많았다. 이 대표는 해방 뒤 힘들게 살아오신 분들 앞에서 “나는 그래도 고생을 덜했다고 생각했다”고 30년 전을 돌아봤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기록을 찾은 날

모든 피해자와 유족이 그렇듯 기록부터 찾기 시작했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기자회견에서 내가 피해자였다고 밝히셨잖아요. 그런데 일본 정부가 ‘근거를 내놔라’ 했고, 할머니가 ‘내 몸이 근거다’라고 받아치셨어요. 일본의 행태에 분노하고, 할머니의 용기에 놀랐어요. 기록이 있어야 일본 정부와 싸울 수 있겠더라고요.” 1992년, 아버지가 1945년 6월 중국 전투에서 숨졌다는 기록을 찾았다. 아버지의 삶을 헤아려보기 위해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아픈 기억을 들었고, 그들을 위해 또 기록 속에 파묻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움직였다. 하지만 1997년 유수명부(강제징용 군인·군속(군무원) 등의 명단이 담긴 일본 후생성 문서)에서 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전사자로 합사됐다는 기록을 찾은 이 대표의 감정은 ‘분노’로 바뀌었다. “온몸의 피가 멎었어요. 이게 일본이구나…. 나는, 우리는 아버지나 오빠가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몰랐잖아요. 강제로 끌고 가서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고 강제로 합사하고 추모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일본 이름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어요. 피해자들은 해방을 맞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군국주의와 전쟁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알려진 야스쿠니신사에는 A급 전범을 포함해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주도한 전쟁에서 전사한 246만 명이 합사됐다. 한국인 2만2천여 명, 대만인 2만8천여 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왕(국가)을 위해 죽은 이들을 추모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즉, 강제로 끌려간 이들이 유족 동의 없이 일본 침략전쟁의 ‘공신’으로 추모되는 것이다.

이것에 항의하기 위해 2001년 이 대표는 야스쿠니신사를 찾았다. 하지만 “더러운 조센진은 물러가라”는 일본 우익단체들의 시위에 시달리며 유족임에도 신사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당시 살아 있었지만 전사자로 처리돼 합사된 피해자가 10여 명 있다는 황당한 진실도 드러났다. 2007년 2월26일 강제동원 생존자 김희종씨는 야스쿠니신사를 찾아 “너희가 합사시킨 사람이 나다. 내가 여기 살아 있다”고 외쳤지만, 신사 관계자로부터 “살아 있는 사람은 신이 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황당합 답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민족문제연구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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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반대 공동행동’ 참가자들이 2006년 8월14일 일본 도쿄 메이지공원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를 규탄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일본 “정부는 종교시설에 관여할 수 없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2001년, 2003년, 2013년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무단 합사를 철폐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상식의 문제다”라는 이 대표의 생각에 따라 위자료는 ‘1엔’을 청구했다. 하지만 번번이 기각되거나 패소했다. 한국인들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은 일본 정부가 신사에 자료를 제공했고, 신사가 유족에게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 재판부는 “일본 정부는 종교시설(야스쿠니신사)에 관여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야스쿠니신사 쪽은 “전사자들이 일본인으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합사는 당연하다”고 버텼다. 2013년 10월 다시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서도 일본 법원(도쿄지방재판소)은 5년7개월이 지난 올해 5월28일 “원고들의 모든 요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합사 문제뿐만 아니라 피해자 유골 송환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사망하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강제동원 피해자의 한 유족은 “유골 기록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답변만 듣고 직접 파푸아뉴기니를 찾아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민족문제연구소, 보추협, 2017)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요구에 귀를 닫는 일본 정부와 사법부를 비판했다. “일본 정치가 그런 것이다. 일본 정치가,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를 입증하는 우리의 논리와 기록은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 그걸 다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를 제대로 된 국가라고 말할 수 있나.”

피해자들에겐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과거 한국 정부와 정치인에 대한 원망도 있다. 이 대표는 이렇게 꼬집었다. “1945년 해방되고, 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맺고, 90년대 들어 피해자들이 소송을 했다. 그런데 과거 정부는 관심이 없었다. 2004년 특별법(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만든다고 국회를 다닐 때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다 끝난 것 아니냐’고 하더라. 지금 아베하고 똑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런 정치인들이 반성하는 꼴을 못 봤다. 이런 상황이 아베와 일본 정부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 대표는 인터뷰 중에 ‘일본’과 ‘일본 정부’를 구분하는 것에 신경 썼다. 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피해자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었다며 일본 정부와 일본 시민사회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안부든 강제동원이든 모든 피해자 운동은 일본에서 시작했어요. 한국에서는 피해자들만의 아우성이었어요. 자료를 찾고 재판을 하는 데 도움을 준 게 모두 일본의 변호사와 시민들이었습니다. 민간 교류가 없었으면 대법원 판결을 끌어낼 수 없었을 거예요. 일본이라고 할 때 양심적인 시민들을 뺀 일본 정부를 가리켜야 해요.” 이 대표가 만난 수많은 일본 시민은 “가해국 국민으로서 우리라도 나서서 일본 정부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일본 정치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지만 일본의 양심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나섰다”고 말했다 한다.

그늘진 역사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출구를 찾기 어려운 한국과 일본의 갈등에 대해 이 대표는 늘 마음에 품고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말로 대신했다. “할아버지들은 항상 그랬어요. ‘내가 불행한 역사 속에 태어나서 불행한 경험을 했는데 그 아픔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싫다. 살아 있을 때 내 손에서 끝내고 싶다.’ 돈 문제가 아니었어요. 본인들의 명예회복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두 가지 숙제를 풀고 싶어 하셨어요. 뒤늦게 한국 사회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해요. 지금 사회 분위기를 맹목적인 반일 감정으로만 보지 말고, 이제는 일본과 얽힌 그늘진 역사에서 벗어날 계기로 삼았으면 해요. 잘못을 인정해야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잖아요.”

이 대표와 만난 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74주년 희생자 위령식에 참석해 “한국이 한일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고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모든 게 끝났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대표는 말했다. “아베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끝내고 싶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우리는 끝난 게 아니에요.”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2019-08-12> 한겨레21 

☞기사원문: “피해자들은 아직 해방을 맞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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