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신흥무관학교는 스스로 독립하려는 독립군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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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신흥무관학교는 스스로 독립하려는
독립군을 돕는다

 

김수빈 2019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단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다(7.26)

집을 나서기 10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의 첫 답사,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꿈속에서 헤맨다면 모를까, 그곳을 내가 직접 밟게 된다니 꿈속에서도 꿈처럼 느껴 질 것 같은 현실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답사한다는 소식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청서를 낸 것은 이번에 휴학하면서 나 스스로와 한 다짐 때문이었다.
‘힘들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삶을 들려주자. 내가 방황하고 좌절했을 때 독립운동가의 삶을 알아가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듯이,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운동가를 심어 준다면 그들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결심을 한 나도 사실은 책이나 유물로밖에 독립운동가들을 접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답사가 더욱 간절했다. 독립운동 중 무장투쟁 노선을 택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분들이 걸었던 길을 직접 밟아본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개무량하였다.
답사지에서 설명해주는 내용을 내가 알아듣지 못할까봐 합격한 날부터 출발하기 직전까지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고 내 나름대로 답사 일정동안 스스로 수행할 미션들을 정해놓았다. 신흥무관학교 옛터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부를 것, 백두산 천지에서는 백기완 선생님 사진과 책을 들고 사진 찍을 것, 내가 준비해 간 질문들을 방학진 국장님께 꼭 여쭐 것 등등… 사소하지만 나름의 미션을 정하면서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가 국군의 뿌리로 인정받은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독립군 양성학교로 명성이 이미 드높았다. 우리가 잘 아는 신동천(신팔균), 지청천(이청천), 김경천(김광서) 장군 등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이동녕, 윤기섭, 이상룡 선생 등이 교장직을 맡았고,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과 의열단장 김원봉이 신흥무관학교 생도 출신이다. 이런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천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벽 5시의 인천공항은 한산했다. 공항에서 만난 답사 동지들이 정말 반가워서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먼 길을 나 혼자서 가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동지들과 반갑게 인사하면서 느꼈던 든든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8시 5분 발 대한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서도 계속 든 생각은 ‘이회영 선생님은 이 길을 걸어가셨다’였다. 답사가 끝난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아니, 이젠 독립군들의 ‘독’만 읊어도 가슴이 미어진다.

심양공항기념촬영

“우리는 지금 돌아올 조국이 있고 가족이 있지만, 100년 전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신 분들은 온 가족을 데리고 배수진을 치듯 고국을 떠나신 분들이에요.”
방학진 국장님의 말씀에 저절로 숨이 훅 멎었다. 2시간여를 비행기에서 보낸 뒤 심양공항에 내리고 가이드 선생을 만나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버스에 타서도 얼굴이 뜨뜻해질 때까지 밖의 풍경을 쳐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몇 시간을 달리자 사진으로만 보았던 서간도의 드넓은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중간 중간 있는 논은 모두 서간도로 이주해 온 한국인이 일궈 놓은 논이라는 말에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실루엣이 보이는 듯했다. 서간도에는 ‘울로덩이’라고 불리는 식물이 많은데, 그 식물의 뿌리가 깊고 서로 얽혀있어 뽑아내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그것을 손이 부르트도록 뽑아내고 땅을 다지고 수로를 지어 논농사를 지었을 우리 민족의 휘어진 허리가 내 동공에 맺혔다.
옥수수 밭 가운데 간간히 붉은 지붕의 긴 집들이 보였다. 108년 전 신흥무관학교 건물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꼭 그리고 싶은데, 알 방법이 없으니 현지 건축 양식이라도 잘 봐놓아야겠다는 마음에 사진부터 열심히 찍었다. 오후 6시가 훨씬 넘어서야 유하현 매화구의 호텔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니 그제서야 피곤이 마구 몰려왔다.

 

우리가 나라를 잃었지 희망을 잃었더냐(7.27)

1911년 6월 설립한 신흥강습소 터. 현재는 벽돌공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다음날, 첫 번째로 찾아간 신흥무관학교 옛터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위치해 있다. 1911년 6월 10일 개교 당시에는 옥수수 창고였지만 지금은 벽돌공장으로 쓰이고 있다. 붉은 지붕에 기다란 흰색 벽. 크게 난 창문들에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간살이가 얼핏 비쳤다. ‘추가가’라는 명칭은 ‘추씨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추가가로 오는 길에도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많다고 들었는데, 신흥무관학교의 첫 번째 터가 있는 이곳 역시 재중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108년 전, 허름한 옥수수 창고와 농사지을 땅을 얻기 위해 이회영 선생은 동분서주하셨다. 한인촌이 갑자기 서간도에 들어서자 이를 핑계로 일본군이 중국으로 쳐들어올까 봐 걱정했던 현지인들이 한인들에겐 토지매매뿐만 아니라 물자의 판매도 모두 금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이회영 선생은 직접 유하현 감독 장영운, 동삼성 총독 조이풍, 총리대신 위안스카이를 만나러 뛰어다녔다. 그렇게 꼬박 1년여를 고생하시며 본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식솔들, 이주민들도 중국으로 입적시키며 한인촌의 근거지를 마련하려 애썼다고 한다.
처음 개교할 당시 ‘무관학교’ 대신 ‘강습소’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중국인들의 감시와 일본 군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비록 ‘신흥강습소’라고 적힌 현판도 없어지고 당시 분주했을 생도들의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지만, 이곳에 신흥강습소가 서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지들 모두가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흙도 그냥 흙으로 안 보이고 벼도 그냥 벼로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과 손길 한 번이라도 스치고 싶었다. 혹시나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손길이 닿았을까 상상하면서 말이다.
신흥강습소가 처음 개교했을 때는 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의 자제 40여 명이 이곳에서 훈련받았다. 벽돌공장 앞 공터를 연병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곳의 규모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크지 않았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로 이주해오는 조선인이 많아지자 1년만에 더 넓은 합니하로 다시 학교를 옮길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고산 밑에서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이동녕의 조회사를 낭독하는 윤경로 답사단 단장

대고산. 신흥강습소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대고산이 채굴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대고산은 이회영, 이상룡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노천회의를 열어 한인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한 역사적인 산이다. 경학사를 설립하고 무장투쟁의 효시로 신흥강습소도 세웠던 것인데 채굴되고 있다니 정말 애꿎은 하늘에게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어떻게 지키지?’ 하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터져 나왔다. 동지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자본주의 시장체제 앞에 우린 잃어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김문수 의원님 말씀대로 ‘서간도 이주단’을 꾸리기라도 해야 할 성 싶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께서 108년 전 신흥강습소 연병장에 울려 퍼졌을 이동녕 선생의 조회사를 낭독하셨다.

대한의 청년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추운 땅 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소정의 교육을 받는 것은 조국을 다시 찾겠다는 군인정신의 총아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견디는 고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을 길러 무관으로서의 기백과 담력을 키우자는 겁니다.

만주의 추위가 얼마나 매서웠냐면, 생도들의 손톱과 발톱이 추위에 다 빠져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따뜻한 발싸개 하나 없어 짚을 엮어 발을 싸맸다던 생도들의 고생을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매일 아침 온 민족의 존경을 받는 분의 기백 있는 조회사를 시작으로 하루를 열어갔을 그 당시의 생도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돌아 나오는 길이 너무나 아쉬워 다들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신흥무관학교의 세 번째 터, 유하현 고산자 하동 고산자(현재의 길림성 유하현 전승향 대두자 승리촌)로 향했다. 순서상 두 번째 터인 통화현 합니하부터 들렀어야 했지만 지리상으로 고산자가 추가가와 가까워서 세 번째 터부터 들르게 되었다.
고산자에서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찾아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여름이라 옥수수가 3m 정도 자라 있어서 지리 구분이 안됐기 때문에 길을 찾기 위해 옥수수밭을 헤집고 나아가야했다. 옥수수 이파리가 이렇게나 까슬까슬한 지 몰랐다. 모두들 웃으며 “신흥무관학교까지 왔는데, 옛날 생도들이 했던 훈련 중에 만분의 일이라도 체험해 봐야지” 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수는 1919년 3·1혁명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그래서 넓은 합니하로도 인원이 모두 수용되지 않아 1919년 5월에 고산자로 옮기게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학제는 6개월, 3개월, 1개월(일반인)로 나눠져 있었으며 중등교육과 군사교육을 실행했다. 고산자로 옮긴 뒤로는 김경천, 신팔균, 지청천 등의 훌륭한 무관들이 교관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학생 수가 나날이 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 본교가 있던 고산자진 대두자. 본교 터는 현재 대두자촌민위원회 부근이다.

고산자는 사방이 탁 트여있다. 내 눈이 닿는 데까지 다 벌판이고, 그 벌판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이곳 고산자에서 훈련을 받았다. ‘고산’은 높은둑산이라는 의미이다. 그 둑산 맨 위에 자그마한 집이 있는데, 그 집 앞에 서면 훈련장이 다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님은 그 집 양 옆에 커다란 태극기를 게양하여 훈련받는 모든 생도들이 태극기를 올려다볼 수있게 했다. 무성한 옥수수밭 때문에 그 집까지 올라가보진 못했지만 국기 게양대에 너무나 태극기를 걸고 싶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님의 고산자 옛터 설명을 듣고 합창한 ‘올드랭 사인’ 애국가는 우리 동지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셨다. 목청높여 부르다 너른 들판에 가득 핀 옥수수밭을 바라보았는데, 순간 옥수수들이 바르게 서 있는 독립군들로 보였다.
고산자로 본교를 옮긴 뒤 1년여 만에 일제의 강압으로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된다. 그러나 이후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줄줄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웠다. 대부분이 내 또래였을 텐데…. 고산자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불렀다. 방학진 국장님이 함께 불러주셔서 행복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부르는 신흥무관학교 교가. 바람결에라도 그분들의 영혼에 가 닿았으면…

제2의 신흥무관학교 터인 합니하. 앞에는 합니하 강물이 흐르고 뒤로는 산들이 있어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는 지형이다.

세 번째로 찾아간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옛터는 신흥강습소가 개교한 지 1년 만에 다시 옮긴 두 번째 터인 통화현 합니하(현재의 길림성 통화현 광화진 광화촌 제7촌민소조)다. 처음에는 이주한 독립운동가 자제들만 주로 입학하였던 신흥강습소였지만, 계속되는 일제의 만행에 압록강을 건너 무장투쟁을 하러 오는 청년들이 많아지자 그들을 다 수용하기 위해 1912년 7월에 신흥강습소를 더 넓은 합니하로 이전하였다.
합니하는 ‘천험의 요새’로 평가되고 있는 지형이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져 있되 가운데는 드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주변을 흐르는 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이때 비로소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적인 무관양성교육이 실시된다.
합니하 옛터는 1912년부터 1919년 5월까지 7여 년 간 유지되었던 터로, 이곳에서 ‘신흥학우단’이 결성되었다. 이 혁명단체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신흥학우보」를 발간하여 계몽활동을 펼쳤고, 1915년 1월에 쏘배차에 세운 백서농장 군영을 통한 혁명활동, 그리고 국내외로 퍼져나가 한국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라 잃은 분노와 설움을 금할 길 없어 이곳을 향했을 생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이렇게 다양한 노선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나와 비슷한 나이였겠지, 여기서 훈련받았던 생도들은. ’ 이 생각이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답사하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배도 자주 고프고, 친구들과 한창 놀고 싶고, 연애도 해보고 싶었을 텐데, 그런 생각들을 다 떨쳐내고 다짐했을 그들의 장래희망은 조국을 해방하는 ‘독립군’이었을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옛터 3곳을 모두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지영도 민족문제 연구소 광주지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불현듯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나라를 잃은 판국에 민족에게 도움 되는 일을 단 하나라도 할 수 있다면 죽음은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었겠다. ’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삶. 죽음을 초월한 삶! 그래서 그분들만 생각하면 그렇게 심장이 뛰었나보다. 나도 내 생을 바칠 일을 찾으면 그분들보다 더 뜨거운 삶을 살아야지. 아마 그 일은, 어떤 형태로든 역시 독립운동이지 않을까. 그날 밤 송강하의 숙소 앞 숲길에서 밤하늘을 구경했다. 이곳에 가면 별천지를 볼 수 있다는 동지들의 말씀에 피곤함은 접어두고 총총거리며 나갔는데, 난생처음 은하수를 보았다. 어둠 속에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독립운동가 윤세주 의사가 생각났다.
그분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1942년 일본군과 전투하다 부상을 당해 3일 동안 전쟁터에 누워계셨다고 한다. 부상당한 자기 대신 다른 부상병들부터 옮기라고 동지들의 등을 떠밀었던 윤세주 의사. 그때 윤세주 의사도 저 은하수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셨을까. 그러면 고통 속에서 조금이나마 덜 외롭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은 내 바람이다. 옆에 서 계시던 지영도 지부장님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나보다.
“수빈아, 100년 전 독립군들도 저 별을 보면서 잠에 드셨겠지?”
땅을 베개 삼고 은하수를 이불 삼아 용진했던 독립군들이 동지들의 가슴에 사무치는 밤이었다.

21세기의 독립군이 되어야겠다(7.28)

백두산 천지에서. 왼쪽부터 정재환 박사, 필자 김수빈 학생, 정준호 은평구의원.

백두산! 조선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산을 보고 어찌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수 있을까. 오롯이 우리 땅이었고, 우리민족의 정기를 품은 영산이었다. 백두산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기백을 상징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백두산 호랑이는 멸종되었고, 분단 이후 중국에게 백두산의 일부를 넘겨 주면서 지금 우리는 중국을 통해서만 백두산에 오를 수 있다. 이날 우리 답사단이 오른 길은 백두산의 서쪽 길이었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길에는 동서남북 4곳이 있는데, 서남북쪽의 길은 중국 땅, 동쪽이 북한 땅이다. 내가 이곳에 와 있다니, 백두산 천지를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백두산에서 북한을 바라보자 ‘이 능선만 따라가면 북한인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혹시 그 당시 독립군들도 ‘이 고개 혹은 저 고개만 넘어가면 조국 땅인데’ 하며 총을 더 단 단히 쥐지 않으셨을까. 이날 나는 백기완 선생님의 <버선발 이야기>와 선생님의 사진을 업고 백두산을 등반했다. 나의 사소한 미션 중 하나였는데, 백기완 선생님의 뜻을 이어 꼭 통일을 이루겠다는 내 나름의 다짐으로 챙겨갔다. 그 다짐은 백두산 천지를 본 이후에 더 확실히 내 가슴에 뿌리를 내렸다. 정말 말로도,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푸르름이다, 백두산은. 그 형세가 우리 민족의 솥단지 같기도 했고, 하늘을 그대로 지고 있는 대들보 같기도 했다.
‘저 물을 움푹 떠다 목말랐을 독립군들에게 퍼주었으면…’하는 상상도 잠깐 했다.
“수빈아, 중국이 백두산을 처음 개방했을 때 여기 온 한국인들이 똑같이 했던 행동이 있어. 뭔지 알아? 다들 일단 소주를 한 병씩 챙겨 와. 천지 앞에서 소주를 꺼내가지고 그걸 따서 한 컵 부어. 그러고는 천지 앞 난간에 놓고 절을 해. 그리고 울어. 그땐 다 그랬어.”
정준호 은평구의원님께서 천지를 보고 내려가는 길에 해 주신 말씀이다. 이 DNA를 어찌하면 좋을까, 사실 나도 울고만 싶었다.

민족의 아픔을 지고서 통일의 희망을 향해(7.29)

이날의 일정은 총 3개였다. 신흥무관학교 쾌대모자 분교 터 방문, 압록강 유람선 타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압록강 단교를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1919년 이후 고산자 본교로도 부족하여 쾌대모자에도 분교를 두었다고 하니, 규모가 실로 짐작이 안 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나는 쾌대모자 분교터를 보자마자 무릎이 퍽 꺾이는 느낌이었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세가 확대되면서 설치된 통화현 쾌대모자 분교 터에는 현재 통화현 유아원이 들어서 있다.

터의 규모가 작아서가 아니었다. 물론 작기도 작았지만, 그것보다 더 속이 상했던 건 현지인들의 삶이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터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쾌대모자 옛터는 그곳이 신흥무관학교 분교였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바로 옆에는 커다란 유치원과 아파트 단지들이, 앞에는 큰 도로가, 그리고 터는 채석 집하장이 되어 어수선했다. 동지들도 나와 같은 마음에 “비석을 어떻게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물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우린 물으면서도 알고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가 더 개선되지 않는다면, 아니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타국에서 군사훈련을 했다는 사실에 비석을 세우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에 윤경로 위원장님께서 크게 신흥학도들이 외쳤던 ‘ 선열의 시범’을 선창하시고, 우리가 더욱 크게 따라 읽었다.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를 잊었노라
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 맡기노라
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켜라

선열의 시범 5문장 모두가 우릴 숙연하게 했지만 그중 마지막 두 문장이 동지들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팠다. 이곳에 기념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는 후손으로서, 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민족의 아픔이 너무도 많아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 부끄러웠고 너무나 죄송했다. “내 이번 생에 덕을 많이 쌓아서 다음 생엔 꼭 신흥무관학교 기념비석으로 태어나리라.” 아마 너무 우울하니까 내가 이런 생각이라도 해서 나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었나보다. ‘저기가 북한땅인데, 이회영 선생님 일가와 이상룡 선생님, 이동녕 선생님 그리고 망명했던 독립군들이 모두 저 땅에서 나룻배를 내려 이쪽 중국으로 건너오셨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자 지금까지도 우리 동포들과 함께 살 수 없는 현실이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싫었다. 배를 타고 북한 땅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북한 동포에게 손을 흔드는 동지들을 따라 나도 열심히 흔들었다. 그러자 북한 동포들도 우리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게 아닌가! 강가에서 물고기 잡는 어린아이부터 나와 동갑처럼 보이는 학생들, 염소 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독립군들이 해방된 조국을 후대에 물려주시고자 치열하게 싸우셨듯이, 이젠 우리가 1초라도 빨리 통일을 이뤄 내 후손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반드시 물려주리라.
한참을 그렇게 “통일합시다!”를 외치던 방학진 국장님께서 이렇게 말했다.
“참…. 깎아지른 절벽에다가 옥수수를 심어놓은 우리 동포들을 보니까,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이런 불균형이 어디 있습니까, 같은 민족으로써…

간도의 재중동포들도 고된 농사일로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곳보다 더 열악한 북한의 상황에 나도 마음이 참 착잡하고 속 쓰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마음에 배에서 내린 뒤에도 가슴이 먹먹했다.

 

압록강 단교

이후 압록강 단교로 이동한 뒤에는 먹먹한 마음을 추슬리려 애썼다. 그나마 이곳은 서간도에서 관광산업이 활발히 진행된 곳이라 사람도 많고 활기가 있었다. 압록강 단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세운 다리로, 중국인들이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공간 중 하나다. 한국전쟁 때 UN군의 폭격에 의해 끊어져 지금의 ‘단교’로 불리게 됐다. 단교 관람 이후 북한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바로 눈앞에 북한동포를 보니 밥이 귀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정재환 박사님은 동포들과 잠시라도 말씀을 나누고 싶어 메뉴도 질문하고, 없던 질문도 즉석에서 만들어내며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나도 사실 동포를 만나 긴장되고 떨리고, 반갑기도 해서 밥을 다 먹고 난 뒤에 탈이 났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식당을 나오면서 동포들께 배꼽인사를 드리고 밖에서도 계속 아련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송지호 선생님께서 “가서 악수라도 한 번 하고 와.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오겠어.”라는 말씀에 냉큼 다시 들어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북한 동포분과 악수를 나눴다. 그분도 웃으며 반가워했다. 나와 동갑처럼 보이는 참 고우신 분이라 손도 보드라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이 거칠었다.
“(북한 동포와 악수한) 이 손 다시는 안 씻을 거예요!” 아직도 그 손의 감촉이 남아있다.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제국주의와 싸운다면, 우린 모두 독립군이다(7.30)

꿈같았던 5일간의 답사가 끝나고, 결국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공항에 가기 전에 9.18 기념관에 방문했다(‘만주사변’을 중국인들은 ‘9.18사변’이라고 부른다).
만주사변 때 중국인들도 일본에게 입은 피해가 상당했다. 중국의 위인들도 너무나 많이 죽었고, 민간인들의 피해는 더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했던 것 그대로 중국인들을 괴롭혔다. 민간인들의 잘린 목을 늘어놓고 사진 찍는 것은 기본이고 산 사람을 데려다가 생체실험 하는 것까지, 일제의 만행에 다시 치를 떨었다.
‘만주’라는 지명도 중국인들은 싫어한다. 일본이 간도지역에 세운 괴뢰국이 ‘만주국’이었기 때문이다.

9.18기념관에는 일본에게 저항하기 위해 투신했던 여성운동가들을 따로 전시해 놓은 곳도 있어서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모두 중국어로 되어있어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그 여성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포스터로 만들어 기리는 것이 부러웠다. 어린 아이들도 그 인물 포스터 앞에서 자랑스레 사진 찍는 것을 보니 우리도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찾는 노력을 더 활발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18기념광장 한켠에 비석들이 눕혀져 있었는데, 이 비석은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자신들의 업적이라며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그걸 후손들이 뽑아다가 이곳에 쓰러뜨려 놓은 것이었다.
“부역자들이 세운 비석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아주 좋은 예를 여기서 찾았습니다.”
우리도 나라 차원에서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친일비석 옆에 단죄비를 세우던지 부역자들의 비석을 쓰러뜨려 놓던지 했으면 좋겠다. 9.18기념관을 관람하고 심양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너무 아쉬워서 발이 동동 굴러졌다. 이렇게 멋진 동지들과 보낸 5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전환점을 22살에 만났다. 그것이 신흥무관학교라서 나는 더욱 축복받은 기분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과 한국에 남은 제국주의, 군국주의와 어떻게 싸워나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고 친일청산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의 일방적인 도발로 ‘반아베’ 운동이 국내외로 퍼지고 있다. 불매운동은 이미 하고 있고,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술인으로서 더욱 집요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국과 일본에 남은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장항쟁으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동양평화를 이루려 했던 독립군들의 염원을 이어받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위업이자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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