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해 10월 30일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해방 이후 73년 만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법적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겁니다. ‘불법 식민지배’라는 맥락 속에서 피해자들의 고통과 권리, 그리고 일제의 위법성이 또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일철주금 대법원 판결문, 2018.10.30.)
그런데 ‘반일종족주의’는 이 판결이 명백한 역사 왜곡에 근거한 ‘황당한 판결’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판결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강제동원은 과장을 넘어 날조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게 이영훈 전 교수와 이우연 박사를 비롯한 저자들의 생각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가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도 이 ‘강제동원’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지난번 ‘위안부’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강제동원’ 이슈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연관기사]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논박 – ① ‘위안부’는 종족주의의 아성?
■ 이우연 “조선 청년에게 일본은 ‘로망’…수요와 공급 맞아떨어져”
지난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제네바본부 회의실에선 믿기 힘든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일본 극우단체 국제역사논전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참석한 이우연 박사가 강제동원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나선 겁니다.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고, 징병 역시 합법적이었습니다. 일본인, 한국인 구분 없이 임금은 공평하게 지급됐습니다. 오히려 한국인 임금이 더 높았습니다. 전쟁 기간 한국 노무자들은 쉽고 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우연 박사, 2019.7.2. 스위스 제네바 UN 인권이사회)
이러한 주장은 책 반일종족주의에도 그대로 소개됐습니다. 샤머니즘에 가까운 반일종족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사법부와 행정부가 ‘자발적 노무동원’을 강제연행과 노예노동으로 오해했다는 게 골자입니다.
특히 이우연 박사는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게 된 것은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임금 역시 정상적으로 지급됐고, 일본인보다 임금이 낮은 경우는 민족 차별이 아니라 대부분 조선인이 탄광 작업의 경험이 없어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강제저축이나 업무 중 구타와 같은 전근대적 노무관리도 없진 않았지만, 이는 일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습니다.
■ “일베류’ 역사 선동” 반박…일본과 국제사회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
이에 대해 김민철 경희대 교수는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싸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왜곡과 무지, 혐오 발언으로 가득 찬 역사부정론자들의 ‘일베(일간베스트·극우 성향 커뮤니티)류 역사 선동'”이라는 겁니다.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이른바 ‘자유주의사관론자’라 자칭하는 극우 지식인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사학'(自虐史學)에 빠졌다고 공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강제노동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무덤 속에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역사 부정론이 한국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다만 선수만 한국의 뉴라이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치의 발전도 없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면서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인 양 의기양양한 것을 보면 무척 당혹스럽다.”(김민철 경희대 교수)
김 교수는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민족차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증언과 공식 자료들은 차고 넘친다”며 “반일종족주의는 이런 자료와 증언을 모두 무시하고 심지어 일본 사법부와 국제노동기구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 폭력 동원·임금 차별…”인질적 약탈적 납치였다”
일본 내무성이 조선의 민정 동향을 조사한 ‘복명서(復命書)'(1944.7.3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일제의 폭력적인 동원 방식이 잘 설명된 자료 중 하나입니다.
– “조선인 노무자를 일본으로 송출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질적 약탈적 납치 등이 조선 민정에 미치는 악영향도 악영향이지만, 송출이 곧 그들의 가계 수입의 정지를 의미하는 경우가 극히 많은 모양이다.”
– “징용과는 별도로 기타 어떤 방식에 의하든 출동은 모두 납치와 같은 상태이다. 그것은 만약 사전에 이를 알리면, 모두 도망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습, 유출(誘出), 기타 각종 방책을 강구해서 인질적 납치상태의 사례가 많은 것이다.”
일제 말기 전남 장흥의 유생이 쓴 일기에도 강제동원의 실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동원의 폭력성과 강제성은 더욱 짙어졌습니다.
– “1943년에는 면리원들이 마을을 수색하여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사람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잡아가기 시작했다. (…) 도망자가 많아지자 모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군면의 관리들이 밤중에 마을을 습격해서 노동자를 잡아갔으며, 모집된 자가 도망가면 가족 중 1명을 대신 데려가서 머릿수를 채웠다.”
임금 차별 경향 역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김민철 교수는 조선인 임금은 금속광산과 철강업에서는 일본인의 60% 정도였고, 조선인 광부의 임금은 일본인 광부의 70% 전후였다고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업주가 ‘강제저축’을 이유로 들어 매월 임금의 일부를 가져가서, 조선인 광부가 손에 쥘 수 있었던 실제 월급은 10엔 정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강제저축은 퇴직 때 받을 수 있게 돼 있었지만, 조선인의 절반 이상, 지방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도망·소재불명·불량송환 등으로 정상 퇴직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 “학문적 사망선고”…이제 기댈 곳은 대중뿐
이영훈 전 교수 등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우리 안의 견고한 ‘통념’에 대해 거듭 경고합니다. 실증적으로 취약한 한국인의 통념과 달리, 이 책은 실증을 토대로 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 학술적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다며, 잘못으로 판명될 경우 주저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이들이 ‘식민지근대화론’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지만, 지금까지 비판을 수용하거나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이 책의 상당 부분 또한 그동안 많은 지적과 비판을 받았음에도 원래 그대로”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젠 “‘자기 확신에 빠진 오만함’이란 말도 과찬일 정도로 광적인 수준”이라는 지적인데, 박 사무처장은 이들이 책을 낸 의도에 대해서도 이런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필자들은 대부분 뉴라이트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이 주도한 ‘대안교과서’·’교학사 교과서’·’국정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 처분되었다. 이 교과서들이 인정을 못 받았다는 것은 이들에게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기댈 곳은 이제 학계가 아니라 대중들, 그중에서도 과거 독재 정권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층이었다. 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수층을 결집하고, 궁극적으로 극우 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것,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 이들의 의도일 수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주장을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설파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인데, 일본 극우단체 ‘새역모'(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행보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학문의 자유’와 ‘역사 부정’ 사이에서, 이제는 진지한 대응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2019-10-07>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