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조선인들… 그 비통한 역사에 대하여
2006년 8월, KBS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쟁점을 다루는 다큐 <야스쿠니와 세 여자>를 제작, 방영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장면이 연출된 탓에 1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야스쿠니 관련 이슈로 회자되곤 한다.
바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2013년 사망)’가 출연했기 때문인데, 그녀는 방송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희생된 피해자 유족들(한국, 대만)과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대담을 나눴다.
이희자(한국 측 피해자 유족): “…왜 내 아버지가…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서 죽어야 했던 그 당시 2만 1000명의 조선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야 하는가 (중략) 지금도 그 당시 대만이나 한국, 남의 나라를 지배했던 그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하려고 하니까 문제 삼는 것입니다.”
도조 유코: “그럼 나라의 룰로 그 사람들을 차별해서 당신들의 아버지들을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지 않았다면 ‘일본인으로 싸웠건만 왜 합사시켜주지 않는가?’라고 화내지 않았을까요? 어찌 됐든 일본인으로 싸워주셨으니까… 일본인으로 싸우다 돌아가신 분은 모두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이 전쟁에 나가셨던 당신 아버지 같은 병사와 국가 간의 약속이었어요.”
(중간 생략)
이희자: “그것이 (한국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하는 것) 자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조 유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 없이 신으로 모시는 일본의 시스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 당신의 슬픔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 아버님의 영혼이 평온하게 쉬고 계시는데 이런 식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흔들어대면 아버님이 좋아하시리라 생각하시나요? 분명히 아버님은 슬퍼하고 계실 겁니다.
*(2006.8.13. 방영)
기막힌 대화가 이어졌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는 “야스쿠니 신사에 왜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합사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 신분으로 싸웠으므로, 또 죽어서는 야스쿠니에 간다는 약속을 하고 싸웠으므로 합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요지로 답했다.
나아가 ‘이런 야스쿠니의 시스템이 자랑스럽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평화롭게 쉴 수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도조 유코, 그녀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할아버지 도조 히데키를 제신으로 평안히 모시고 만나며 자부심을 보상받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처럼 비쳤다.
반면 그녀의 망언에 마주한 이희자(76)씨는 1944년 일본군의 강제징용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피할 수 없으니 빨리 다녀오겠다”던 아버지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남겨진 가족들은 그대로 태평양전쟁 피해자 유족이 됐다.
세월이 흘러 이희자씨가 강제 징용된 아버지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97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었다. 일제는 살아 있는 아버지를 빼앗았고, 야스쿠니는 죽은 아버지까지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이희자씨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현존하는 지옥이 아닐 수 없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야스쿠니의 한국인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인지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라 함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미화, 선전하는 데 앞장선 군국주의 시설이다. 이는 주지의 사실로, 야스쿠니 신사를 거론할 때 언론과 매스컴이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하여,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응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에 2만 10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무단으로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학계의 연구가 본격화된 것도 비교적 최근 일이며, 이희자씨와 같은 활동가들의 노력을 통해 조금씩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국회 차원의 관심은 2005년 당시 강창일 의원 등 79명이 낸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합사 취하 및 일본 각료 등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을 촉구하는 대한민국 국회 결의안’이 거의 유일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 결국 문제 해결의 공은 유족, 즉 야스쿠니 신사의 무단 합사로 피해를 입고 있는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유족들은 2001년, 2007년, 2013년 3회에 걸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에 한국인 합사 철회 소송을 제기했으나 앞선 2건은 기각, 마지막 2013년 소송은 1심 패소한 상태다(2019년 5월 28일 도쿄 지방법원 판결).
야스쿠니가 자행한 무형의 폭력과 강압
야스쿠니 신사 합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행위가 유족들의 동의를 전혀 받지 않은 ‘무단’ 합사라는 점이다. 실제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조선, 대만)의 군인, 군속 출신의 전사자 합사에 착수한 것은 1959년경. 그러나 이 행위는 매우 위법적인 행위였다.
왜냐하면 1959년 한국은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으며 ‘국적(國籍)’도 일본에 소속돼 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1952년, 일본 법무부 통지에 의거 일본 내 거주하는 한국인은 일본 국적을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국적 조항을 근거로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전후 보상 대상에서 배제했다. 쉽게 말해, 이제 국적도 바뀌고 국가의 지위 등도 바뀌었으므로 보상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본 정부가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이러한 국제적 지위의 변동과 인식의 변화를 아예 무시하고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무단 합사한다. 실상 이는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일본의 역사학자 아카자와 시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야스쿠니 신사>에서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의 합사를 천황과 국가로부터 받는 은혜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등 패전 후 발생한 커다란 변동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나서 잘못된 상태를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유족들의 요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족들에게 일체의 통지도 하지 않았던 폭력적 무단 합사를 철폐하고 조상들의 넋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은 무엇일까?
납득할 수 없는 야스쿠니의 논리
앞서 소개한 다큐에서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대변한 도조 유코씨가 발언을 통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소개한다, 실제로 도조 유코 씨의 주장은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
도조 유코: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합사했다고 주장하시지만… 이것은 일본의 룰이었어요. 전사한 사람은 어떻든지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은 일본의 룰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타이완도 한국도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차별하지 않고 합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에게) 아버님의 심정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당신의 척도로 아버님의 심정을 전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당시 한국, 타이완의 아버님들은 정말로 용감하게 싸우셨습니다. 그것을 60년도 지난 지금 아버님을 야스쿠니에서 빼내려고 하는 것은 아버님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래도 아버님을 빼내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또 하나, 일단 합사를 하면 영혼들은 하나의 방석처럼 되어버립니다. 이 사람을 빼내고 저 사람을 빼내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합사(合祀)라는 말은 사전에 있어도 분사(分祀)라는 말은 없습니다.”
*<KBS 스페셜-야스쿠니와의 전쟁, 1편 ‘야스쿠니와 세 여자’> (2006.8.13. 방영)
정리하자면 ▲그 당시(전사한 시점)에서는 조선 출신자도 모두 일본인이었으므로 죽은 후에도 일본인이라는 점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다는 생각으로 싸우다 죽었다는 점 ▲교리상 하나의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한국인 합사’를 철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수천 년간 이어 내려오고 지켜온 전통적인 사생관과 죽은 자를 위로하던 풍습 따윈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야스쿠니 신사의 사생관, 종교 교리를 강요하는 논리다. 이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는 민간 풍습에 대한 일본 국가 권력의 폭력적 개입으로 인해 치유되지 않는 평생의 한”이라는 지영임 교수의 비판이 있기도 했다(지영임(2013), 야스쿠니 재판을 통해 본 한일 종교관의 쟁점과 해결방안).
위자료 ‘1엔 소송’
이러한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은 오랜 기간 주위로부터의 오해와 편견에 시달려 왔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전후 사정은 알아보지 않은 채 이들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시선들이다.
“어떤 사람은 속 모르고 야스쿠니에 있다고 하면 뭐라고 말하는 줄 알아요? 친일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얼마나 일본에 충성을 다했으면 야스쿠니에 모셔놓고 그렇게 잘 대접하는데 무슨 그게 한이 되냐고 합니다. 아주 죽을 것 같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출처: 박남순 / 야스쿠니 무단합사 피해자 후손 인터뷰( ‘19.3.5.)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위 박남순(76)씨의 아버지 박만수씨는 1942년 11월에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브라운 섬에서 희생됐다. 그와 함께 야스쿠니 합사 철폐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이명구(81)씨의 아버지 이낙호씨도 마찬가지로 1944년 군속으로 징용, 남양군도 팔라우 섬에서 사망했다. 모두 일제의 강제징용에 의해 가족을 빼앗겼다. 이들의 이야기는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라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증언집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고 야스쿠니의 제신으로 모셔진 한국인 영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경우를 일반적인 일로 전제하고 2001년 이래 20년 가까이 일본 정부, 야스쿠니와 싸워온 유족들을 친일이라 매도할 순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악질적인 오해는 이들 유족들이 ‘돈’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전혀 맞지 않은 사실이다. 실제 소송에 참여한 한국인 유족들은 매번 위자료(손해배상)를 요구하긴 했지만 그 액수는 불과 ‘1엔'(약 10원). 그야말로 상징적인 액수다.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유가족들은 다시 소송(2차 항소심)을 준비 중이다. 1심 도쿄 지방법원 패소의 아픔을 넘어 주저 없이 상급 재판소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1심 판결까지만 해도 5년 7개월이란 긴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항소심에는 유족들이 납득할 만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지난 5월에도 일본 도쿄 지방법원은 판결 당일 5초가량의 판결문 낭독만 하고 판결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무책임하다. 그 한마디를 하려고 5년 7개월을 기다리게 했단 말인가.
이처럼 현 일본 정부와 사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향해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일본이 한국인 합사의 잘못됨을 인정하려면 강제징용의 잘못된 역사를 다시 한번 들추어내고, 무단 합사와 같은 무형적 폭력 행위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우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지금의 일본 정부가 스스로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상이다. 광복 후 7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국제사회가 인정한 전쟁 범죄의 가해자는 여전히 당당하고 피해자는 그 몰염치에 상처받고 있다.
10월 17일(목)부터 3일간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추계예대제’가 거행된다. ‘야스쿠니 뉴스’가 또 한 번 포털의 메인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올해는 한일 양국의 역사 전쟁 한가운데 방치된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는 건 어떨까.
<2019-10-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내 아버지는 야스쿠니라는 ‘생지옥’에 갇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