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지원금 받아 건립된 ‘이종린 문학기념비’… “단죄비 세우자” 의견도
3.1 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올해 서산시에서는 친일파 기념비가 세워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서산시 지곡면 안견기념관 입구에는 친일부역자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올라있는 황산 이종린의 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친일인명사전 자료에 따르면 이종린(李鍾麟, 1883~1950)은 서산군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언론인·종교인이며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이종린에 대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기록은 무려 4페이지에 이른다.
독립운동 후 변절… 소년들에게 ‘지원병 지원’ 선동
이종린은 변절한 지식인이었다. 친일인명사전 등 현재 남은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일제강점기 3.1 운동과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의 주필로 참여하는 한편, 물산장려회와 신간회에서도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며 독립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주력하다가 옥고를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종교인과 문인으로 활동했다.
여운형, 안창호와 함께 3대 웅변가로 일컫어진 그는 변절 후에 일제를 위해 강연회에 나섰다. 당시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을 통해 일본 식민으로서 지원병에 참여하는 것이 내선일체 완성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여러 편 발표하기도 했다. 나아가 각종 월간지에 “제군들은 머리와 눈이 있는 청년들이다. 일제히 지원병을 지원하라” “징병제가 실시되어 지금 서울 거리거리에는 반도 민중이 모인 자리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소리로 가득찼다”라고 선동했다.
이종린은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조직된 친일단체인 국민동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행위와 관련해 소환장을 발부하자 자진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조직적인 방해로 제대로된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못했고 그 역시 무죄로 풀려난다.
이후 이종린은 제1, 2대 제헌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제헌국회에서 헌법 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돼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린 문학기념비는 당시 서산시와 지곡면 등을 중심으로 ‘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2004년 건립되었다. 이 비는 건립 당시 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와 서산시의 보조금으로 세워졌으며, 서산시 소유 부지에 건립되었다.
기념비에는 이종린의 독립운동 활동 내용은 비문에 상세히 담겨 있으나, 이후 변절해 일본에 부역한 사실은 쏙 빠져 있다.
당시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이었던 A씨는 지난 18일 통화에서 “우리 지역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이종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건립했다”면서도 “당시에 이종린 선생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A씨는 당시 문학비 건립에 약 2천만 원이 들었으며, 추진위가 모금을 하고 서산시가 일부를 지원해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功)과 과(過)를 볼 때 공이 많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건립했다”며 “당시 천도교 수장을 맡은 (이종린) 선생이 천도교를 말살하겠다는 일본의 위협에, 종교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 한번 강연을 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A씨는 “당시 한번 강연한 것을 가지고 친일부역이라고 하면 당시에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문학과 친일은 관계가 없다. (친일이라 하더라도) 주민들이 다 이해하기 때문에 투표를 해서 두 차례나 국회의원으로 시켜줬다. 당시 독립운동으로 정부에서도 훈장(이종린은 지난 1967년 12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을 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어… “철거는 법규 확인해봐야”
서산시는 해당 문학비가 시의 지원을 받아 시 소유 부지에 세워져 있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 관계자는 “정확히 얼마가 지원됐는지 당시 문서를 확인해야 알 수 있다”면서 “법적인 5년의 문서보존기간이 끝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해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권희용 지부장은 “이종린은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으로 3년 간 옥고를 치렀지만 후반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강연을 한 인물로 당시 신문과 문헌에 많은 자료로 나와있다”면서 “공(功)이 있다고 봐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변절하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권 지부장은 이어 “변절한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을 위한 강연에 나서면, 국민들은 ‘독립운동가의 말이 옳은 게 아니냐”하면서 부화뇌동할 수 있다”면서 “(변절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던 사람을 공만 평가해서 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너무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문학비 철거에 대해선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당시 건립추진위원 A씨는 “주민들과 많은 분들의 성금으로 건립된 문학기념비 철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당시 서산시에서도 승인을 해줘 시소유 부지에 건립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시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시소유 부지에 개인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당시에 묵시적 협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철거를 위해서는) 관련 법규를 확인 후에 처리하는 게 맞다”고 신중한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권 지부장은 “잘못된 것을 인정 안 하고 잘한 것만 말하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철거보다는 서산시 또는 시의회에 동의를 얻어 친일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단죄비를 기념비 옆에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최근 충남교육청을 비롯해 전국에서는 교육청에서는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와 학교에 걸린 일본인 교장 사진 등을 교체하는 등 친일잔재 청산에 나서고 있다.
<2019-10-2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서산시 부지에 세워진 ‘친일파 문학비’… 시조차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