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길을 좇으면 좇을수록 아쉬움이 계속 커졌다. 항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애국지사들은 너무나도 힘겹게 투쟁을 이어갔건만 끝내 영광을 잇지는 못했다. 영광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 <임정로드 4000KM> 15쪽에서
지난 10월 말, 나흘 동안 상하이와 자싱, 항저우, 난징까지 임시정부 독립투사들이 갔던 길을 따라서 갔다. 때로는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숨어서, 또 때로는 희생을 각오하고 당당하게 중국을 누볐던 독립운동가들의 길에는 이제 아주 작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 100년 전의 흔적을 따라 좇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주관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이 지난 10월 28일 상하이에서 출발해 31일 난징에서 마무리했다. 충북 단양의 단성중학교 학생과 교사 총 38명이 함께 했다.
학생들은 꼬박 3박 4일 동안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이 밟았던 길을 다시 밟아나가면서 이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번 역사탐방은 독립운동가들이 100년 전 떠났던 길을 재구성한 책 <임정로드 4000KM>(필로소픽 출판)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동방명주’ 없는 상하이 여행
1919년 4월 최초로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길 ‘서금이로’에는 이 길 어딘가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을 제외하고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두 번째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던 회해중로에는 기념관 대신 스웨덴 의류 브랜드 H&M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였지만 정작 임시정부의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상해에서 임시정부로 사용된 마당로의 마지막 청사까지 가서야 임시정부의 자취를 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낡고 양옆으로는 옷가게들이 있어 지나치기 쉬운 건물에 있었다.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에 동행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이 임시정부 기념관마저도 개발 논리 때문에 없어질 수 있다”면서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주문했다.
단성중 3학년 이우석 학생은 이날 임시정부를 둘러보고 “항상 책으로만 임시정부를 배워왔고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임시정부’라고 하기에는 협소했다”며 “(독립투사들이) 어렵게 활동하셨던 것 같고 그만큼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학생들은 하루종일 상하이를 떠돌아다녔지만 철저하게 독립운동가들이 누빈 길로만 다녔다. 상하이의 명물인 방송 수신탑 ‘동방명주’가 여행코스에 없는 탐방이었다.
대신 학생들은 와이탄 야경을 보면서 의열단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의 의거 장소를 먼저 알았다.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원인 오성륜이 일본 육군 대장에게 권총을 발사했으나 다른 사람이 총에 맞았고 곧바로 김익상이 폭탄을 던졌지만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인이 몇 없었던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유가 있다. 국제도시인 상하이에서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고 외교 정책을 펴서 일본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인기 많은 장소는 위안소 유적 진열관
학생과 교사들에게 이번 역사탐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장소는 난징에 있는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었다. 역사탐방을 마치고 난 뒤 이어진 설문조사에서 38명 중 무려 32명이 리지샹 위안소가 ‘기억에 가장 남았다'(3순위까지 선택 가능)고 했다.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은 이번 역사탐방에서 들른 총 19개의 장소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난징대학살기념관(20표)이었고 3위는 윤봉길 의사가 김구와 의거를 밀의한 상해의 홍커우공원(17표)이었다.
중국의 한 대학에서 유학 중인 강하나씨가 지난 10월 31일 가이드로 나서서 단성중 학생들에게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을 소개해주었다. 강씨는 “벽면을 따라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이는 위안부 할머님들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은 지금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지만 실제 위안소로 사용됐던 공간이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여기 19번 방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3년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에 와서 직접 현장 증언을 했고 중국 정부는 유적 진열관을 만들었다. 난징시에서는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을 복원하고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한 동은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쟁 당시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당시 난징에는 위안소가 60개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단성중학교 학생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생각하면서 관람에 앞서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장난을 치거나 소리를 내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위안부라는 무거운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학교 3학년인 유정희 학생은 “중학교 2학년 때 포스터 그리기 대회를 했을 때 위안부 관련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어서 미리 조사를 했다”며 “그때 참고했던 자료들이 기억에 남아서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 더욱 기대됐는데 오늘을 계기로 많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징에 60개의 위안소가 설치돼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슬픈 역사를 잊지 않고 꼭 기억해두고 나중에 후손들에게도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을”
또 학생들은 난징에서는 다크투어리즘의 결정체인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방문했다. 가이드는 난징대’학살’을 ‘도살’로 표현했다. ‘학대하고 살해’한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죽였다는 의미에서다. 난징대학살 당시 3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해있고 현재 증언을 할 수 있는 생존자는 17명밖에 남지 않았다.
신우정 학생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이렇게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 같으면 무서워서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나라에 (독립 등) 소식을 알리는 게 대단해 보였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이 밖에도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참여자들은 김구가 망명 이후 생활했던 상하이의 영경방(황피남로350농)과 자싱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거주지, 김구 피난처(매만가 76호), 항저우의 오복리(임시정부 요원 가족 거주지), 김구의 숙소 군영반점 등을 둘러보았다.
또 학생들은 실제로 1933년 당시 백범 김구와 장제스가 만남을 위해 머물렀던 호텔 중앙반점에 하룻밤 머무는 등 여러 각도로 체험을 해보았다.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은 단성중 원효연 교사가 교직원공제회 사이트에 신청해 선발됐다. 원효연 교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가 큰 의미를 갖는 해라고 생각했고 가르치는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했다”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2019-11-0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중학생들의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