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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국민성금 7억으로 만든 친일인명사전, 벌써 1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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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친일인명사전 그후 10년, ‘기억을 둘러싼 투쟁’ 기획전 열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우리의 현대사는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 전에는 친일파들이 오히려 자신의 경력을 자랑스럽게 쓰기도 했지만 2009년 11월 8일 이후 이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했다.

“친일파와 후손들로 구성된 정당조차 이제는 모든 (인사) 심사에서 친일파를 골라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친일파 여부를 가장 먼저 따진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임 소장은 “근래 들어 화가 나는 것이 하나 있다”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를 옹호하는 세력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최후의 발악이라고 보고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도 우리들의 과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좌측부터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장병화 임종국기념사업회 회장. ⓒ 김종훈

이날 기념식 현장에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과 독립유공자 후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윤 전 총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식 하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 듯 “예정됐던 발간식 장소가 여러 압박으로 대관 취소되면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백범 선생에게 가서 사전을 올리는 결정을 내렸다. 그때 백범 선생께 ‘드디어 해냈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 여전히 생생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윤 전 총장은 “지금까지 사전이 전국적으로 1만 2000권이 판매됐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여전히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친일인명사전이) 인지도가 낮은 편”이라면서 “국민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급판이든 개정증보판이든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친일인명사전이 탄생하기까지

윤 전 총장은 2004년 1월에 쓴 글에서 “친일인명사전이란 구한말 이래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찬양·협력하고, 식량과 토지를 비롯한 수탈행위와 징병·징용·정신대 등 강제동원에 앞장섰으며,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훼손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부문에서 일제의 통치에 협력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친일인명사전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하고 민족에 반역한 4776명 인사들의 친일행각이 상세히 기록됐다.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된 고 임종국 선생이 1966년 <친일문학론>을 세상에 공개한 후 만 43년 만에 해낸 일이다.

임종국 선생은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분노해 그 다음 해인 1966년 이광수 등의 친일행각을 파헤친 <친일문학론>을 썼다. 이후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을 구축한 친일세력들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일생을 친일행적 추적에 바쳤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임종국 선생의 육필 원고. ⓒ 김종훈

1989년 임종국 선생이 생을 마감한 뒤, 선생의 과업을 잇기 위해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2월 탄생했다. 4년 뒤인 95년 지금의 이름인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했고, 2001년 12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2004년 1월 16대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 5억 원이 전액 삭감됐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가 거셌다.

예산이라는 암초에 부딪혔을 때 국민들이 직접 나섰다. <오마이뉴스>가 관련 소식을 전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누리꾼)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모금운동 열흘 만에 목표액 5억 원 전액을 모금했고 이후에도 계속 성금이 쌓여 7억여 원에 달하는 편찬기금이 조성됐다.

그러나 2005년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이적 행위’라는 비판적인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출간을 막으려는 친일사전 발행 금지 가처분 신청도 계속됐다. 하지만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11월 8일 서울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의 묘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식이 진행됐다.

발간 10년, 무엇을 했나?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이날 기념식에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후 지난 10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활동한 내용을 보고하는 시간도 있었다.

대전에서 올라온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를 이장시키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면서 “지난 2월에 현충원 전수조사를 거친 뒤 김창룡 무덤 앞에서 규탄대회를 했고 최종적으로는 친일파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북에서 활동하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역시 “전북 지역에 산개한 친일파를 찾아내 단죄비를 세우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전주 동산동의 이름을 여의동으로 바꾸는 쾌거를 이뤄냈다”라고 전했다.

전주시 동산동은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기업 창업자의 장남이 1907년 자신의 아버지 호 ‘동산(東山)’을 따 창설한 ‘동산농사주식회사’ 전주지점이 위치했던 데서 유래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산리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다.

이들은 또 “전북 고창에서 매년 열리는 미당 서정주 문학제를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라면서 “입구에 50m짜리 욱일기를 깔아놔 입장객들은 반드시 욱일기를 밟아야만 들어갈 수 있게 했다. 행사를 고사시키는 작전을 세워 행동한다”라고 강조했다.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가미카제와 같은 전쟁범죄를 찬양하며 조선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썼다. 해방 후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다 2000년 12월에 사망했고 친일인명사전 문학 부문에 이름이 실렸다.

▲ 9일 서울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행사기 진행됐다. ⓒ 김종훈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10주년을 기념해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기획전을 열고 있다.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 등 국립묘지에 안장된 68명의 친일파 명단과 위치, 시민 박기서가 김구 선생을 시해한 안두희를 처단하는데 사용된 정의봉 등이 전시됐다.

김종훈(moviekjh)

<2019-11-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국민성금 7억으로 만든 친일인명사전, 벌써 1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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