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현 ㅣ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최근 한-일 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지소미아 연장 문제와 함께 일제하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 방법을 놓고 청와대, 외교부, 국회의장 등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 달리 말해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판결에 따르지 않고 협의 요청마저 거부해 판결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피해자들은 오랜 법정 투쟁 끝에 권리를 인정받았음에도 한·일 사이의 분주한 움직임을 마음 졸이며 불편하게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이런 상황을 만든 직접적 계기는 대법원 판결이지만 그 판결을 가져온 근본적 원인은 일제의 강제동원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80년이 다 되도록 상처는 남아 있고 문제는 풀기 어려운 매듭처럼 보인다. 해법은 진실, 정의, 피해 회복(배상), 재발 방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해법들에는 이 모두를 아우른 ‘사죄’라는 단어가 들리지 않고 돈 이야기만 무성하다. 그것도 누가 내느냐를 놓고 1+1, 2+1, 2+2에 알파까지 공식도 다양하다. 현실적으로 일본이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많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먼저 말하기 껄끄러운 돈 문제부터 따져보고 싶다.
1991년 고 김학순 여사가 ‘위안부’ 피해자로 증언을 한 이래 일본에서 여러 건의 재판이 있었다. 피해자들은 법이 알아듣는 언어는 돈일 것도 같고 하여 사죄 요구와 함께 피해액으로 얼마를 산정해야 할지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생활안정지원자금이 제공될 때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이 지급될 때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들이 속한 국가가 내는 돈이었기에 배상도 보상도 아닌 위로금이었고 인도적 명분의 지원금이었다. 한편 1995년 일본 정부의 관여 속에 일본 시민들이 내놓은 국민기금은 배상도 보상도 아닌 애매한 이름(償い金)을 가진 또 다른 위로금이었고, 2015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내건 일본 정부의 10억엔이라는 출연금 역시 성격이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해자인 일본 쪽에서 나온 돈이라면 배상금이나 보상금이어야 할 것인데 역시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피해자에게 주는 돈이었기에 위로금 차원을 넘지 않는다. 문제를 국제사회나 법정에 제기하지 말라는 속내도 엿보이므로 이들을 무마하기 위한 돈이라고 할 만도 하다. 그런데 2019년인 현재 다시 일본이 책임을 인정하는 것도 아닌데 위자료를 일본 기업만이 아니라 한국 기업과 뜻있는 한국 국민들도 돈을 내어 기금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는 안이 나오고 있다.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 지와, 주면 받아도 괜찮은 지의 문제가 있다. 한국 민법은 불법행위에는 손해배상이 따른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독일 민법은 불법행위가 있으면 원상회복부터 하라고 한다. 국제인권법은 손해배상이 아닌 배상 또는 피해회복을 말하며, 여기에는 원상회복, 금전배상, 사죄,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조치 등이 포함된다.
위자료는 권리로서 당연히 받아내야 할 돈이란 의미를 가지며 금전배상에 속한다. 그런데 판결이 정한 위자료를 판결을 받은 일본 기업 대신 내줄 테니 권리를 포기하라는 식의 논의도 들린다. 개인청구권을 아예 소멸시키면 한·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배상의 권리가 먼저 인정돼야 포기할 것도 생긴다. 피해자가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재판을 제기하는 것이라는 사정을 생각해보면 재판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되고 위자료와 재판할 권리 사이에는 이제 대가관계가 성립한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 사죄를 하건 말건 재판을 제기할 일이 없게 되고, 일본이 괴로울 일도 없게 되며, 한-일 관계가 위협받는 일도 없게 된다. 자칫 인권피해의 실상과 역사는 실종되고 마치 피해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뒤집혀 버린다.
일본이 줄지도 모를 돈이 위로금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책임 문제는 영원히 괄호 안에 들어가 버린다. 과거 국민기금이나 화해·치유재단의 돈을 거부한 분들도 있었다. 왜 안 받느냐는 압박과 함께 성의를 무시하는 반일민족주의라는 비난마저 있었다. 이쯤되면 타협의 강요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위로금을 받을 경우 배상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거꾸로 돈 준 사람에게 고맙다며 머리를 숙여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주객이 전도되고 상하관계 또는 위계질서마저 생긴다.
어떤 이름의 돈이 오간다 해도 돈으로 피해자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다. 돈을 아무리 받아도 달래지지 않는 마음이 남아있다.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경주처럼 이 남은 부분은 배상금이라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 가해 책임의 인정과 사과가 피해자들에게는 자기 삶에 대한 의미가 된다. 가해자로선 돈을 주더라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자기반성의 전제가 되는 자기부정이다. 과거 잘못을 저지른 자기를 부정하고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이 드러날 때 상대는 용서와 화해를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와 정의를 부정하면서 흥정하듯 내놓는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 강제동원 해법 마련을 위해서는 먼저 피해자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들의 어릴 적 삶을 뒤튼 것이 개인이 견뎌야 할 운명이 아니라 국가범죄의 역사였다는 성찰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2019-11-27>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