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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염치는 전염된다… 친일인명사전으로 옮아간 부자의 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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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주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② 그가 민주주의 위기를 주장하는 이유

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친일 세력, 민족 정기라는 걸 우리가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거든요? 거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우리 자신이 친일파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되어 버렸어요. 자손들한테 ‘민족 정기다, 애국해라’, 무슨 얼굴을 갖고 그런 얘기하겠어요? 친일파를 처벌하지도 못했고, 그 사람들이 날뛰는 꼴을 그대로 봐놨고, 그들에 대한 단죄가 없는 그 세대로서…”

부끄러워하는 그 마음이 느껴졌다. 평생을 친일반민족 행위 연구에 헌신했던 임종국 선생이 1988년 CBS 라디오 대담에서 했던 말이다. “무슨 얼굴로 애국을 얘기하겠냐”는 그 말을 당시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이가 바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다.

그로부터 23년 후, 임 소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일제 식민통치는 염치없는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니 일제 잔재 청산이란 것도 단순히 인적 청산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염치없는 인간 대량 생산’이라는 식민통치 이데올로기를 청산하는 일이기도 하다”며 이렇게 확언했었다.

“이걸 못하면 민주주의도 허상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하는 등 역시 친일 청산에 힘을 썼던 그였기에, ‘일제시대 염치없는 인간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염치와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지난 12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와 마주 앉았던 이유다. 먼저 염치의 정의에 대해 물었다.

인간다움, 그리고 부끄러움과 참회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 이정환

– 염치없다는 말이 인간의 기본을 버렸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그들의 이야기를 다 합치면 그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다움.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염치가 있어요. 예의가 됐든 사회규범이 됐든 그 기본이 되는 게 염치입니다.”

임 소장은 “지구상에 인간을 공존하게 만드는 모든 질서 자체가 예의에서 비롯된다”며 “인사를 잘 하거나 어르신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그런 게 아니다, 사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와 같은 예의를 어겼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인간답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염치없음은 “수치를 모르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반대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은 참회로 이어질 수 있다. 임 소장은 이렇게 예를 들었다.

“굴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갇혔어요. ‘누구 하나 때려잡아 먹자’, 그런 상황에서 사람 고기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워먹었던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 후 그 사람이 참회를 하느냐 마느냐, 이런 차이인 거죠.”

– 인간다움을 잃어버렸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염치다?
“그렇죠.”

“염치없는 친일파 가면 미국이 더 예쁘게 만들어 줘”

▲ 1966년 9월 10일 <동아일보>에 실린 “친일문학론” 광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임종국 선생이 당시 유명 작가들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와 반대로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사람, 철면피란 말의 사전적 정의다. 임 소장의 말이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철면피가 양산되는 건 전쟁이 끝난 다음입니다. 전쟁으로 윤리 의식이 허물어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제시대부터 생겨요.”

임 소장에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철면피는 당연히 이완용이었다. 그는 “법이 규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죄가 민족 배반 아니냐”며 “그런 큰 죄를 저지르고 나면 다른 건 우습게 보인다, 이완용은 나라만 팔아먹은 게 아니라 불법적인 재산 탈취까지 다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는 “친일파들의 본질은 ‘염치없음'”이라고 강조했다. “잘못을 알고도 행한 사람들”이며 또한 그래서 “자기가 잘했다고 우겨요”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임 소장은 “식민지 시대가 염치없는 사람들을 만들었고, 우리나라에 내려오던 염치의 근본이 그 때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도 이어진 뒤틀림을 임 소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광복이 된 후에도 친일파들은 가면을 바꿀 필요가 없었어요. 그 가면 그대로 쓰고 일본으로 향했던 눈을 미국에 돌리면 다 예쁘게 봐줬어. 그대로 이승만 독재에 핵심 인사들이 됐죠. 염치없는 친일파들의 가면을 미국이 더 예쁘게 만들어줬거든.”

그러면서 임 소장은 친일파들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민주주의와 안 맞는다고 강조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파시즘”이며, 그렇기에 “노동자들이 배부르고 잘 사는 거 못 보고, 인권이나 여성 인권 등에 체질 자체가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자기 머슴이어야 하며, 그래서 독재를 찬양하는 것”이란 주장도 잇따랐다. 그를 만나게 만든 질문으로 이어졌다.

“염치는 전염된다”… 친일인명사전 또한 그랬다

▲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임종국 선생의 유고. 친일반민족행위 연구에 헌신한 그의 아버지는 친일부역자였다. <친일문학론>을 쓰던 아들에게 “내 이름이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넣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임종국 선생이 평생을 바쳐 기록한 “친일인명카드”는 훗날 친일인명사전의 밑거름이 됐으며, 그의 뜻을 담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졌다. ⓒ 이정환

– ‘염치없는 인간들이 지금도, 미래에도 나오는 한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하셨습니다.
“투표의 자유가 있다고 자유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정치적 자유 뿐 아니라 사상의 자유, 경제적 자유, 생존의 자유도 보장되는 게 올바른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몰염치가 많으면 사회가 불안해지는 건 당연하죠. 특히 파시즘적인, 극우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있는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불안해집니다. 올바른 민주주의가 그냥 선거하는 것만이 아니잖아요.”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염치없음이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가 서늘하게 들렸다.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 염치, 전염성이 있나요?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도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동지’, 임종국 선생의 경우가 그랬다.

“1966년 1월쯤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빠가 그때 코트를 입고 있었으니까.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면서 헌 신문을 뒤지다보니 학병 지원 연설을 나간 아버지의 기사가 났습니다. 오빠는 그 글을 쓰다 말고 집에 와서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친일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하자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고 하셨습니다.” (정운현, 임종국 선생 평전 중에서)

그리고 임종국 선생은 평생을 바쳐 친일인명카드를 기록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염치가 훗날 친일인명사전으로 옮아왔던 셈이다.

염치 없음도 전염되지만 염치 있음도 전염된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방문자들의 관람 소감. 2019년 12월 7일 방문자의 글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는 “나라에 부끄러운 짓을 한 친일파들은 저리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자들은 항상 탄압 받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건 잘못되었다. 바로 잡아야 한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18년 8월 개관했다. ⓒ 이정환

글: 이정환(bangzza) 이주연 (ld84)

<2019-12-1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염치는 전염된다… 친일인명사전으로 옮아간 부자의 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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