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2020년 새해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기대하며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2019년 역시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 해일 것이다. 연초에 비하면 남북 간 관계 개선의 전망은 어두워졌고, 북미 간의 교섭은 퇴보를 거듭하는 상황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 전범 기업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상식적인 보복 대응은 동아시아 외교환경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게다 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몰상식한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면서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촛불의 힘으로 수립되었던 문재인 정부의 내치 성과도 그다지 신통치 않아 보인다. 지난 8월 이래 조국 사태가 부각되면서 검찰 개혁의 시대적 소명보다도 공정 가치의 실현이 더 근원적인 사회 이슈로 떠오른 상황이다. 다만 새로운 법무부 수장 임명을 계기로 검찰 개혁의 동력이 다시 탄력을 받기를 기대한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반환점을 돈 지금 시점에서 민생문제 역시 시급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가시적으로 내세울 만한 경제적 성과가 별로 없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재인 정부의 노동 개혁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어 실망감을 주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한두 달 새 에는 수도권 집값이 급등 양상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이 절망과 허탈감에 빠져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의 보수세력은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례성을 강화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 개편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보수 야당의 행태에서, 지역주의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와 같은 보수세력의 모습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공정 가치의 실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9년의 마지막 호인 이번 77호에서도 다양한 내용을 구성하였다. ‘통일에세이’에서는 김오석이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가치와 활용에 대하여 다루었다. 비무장지대를 여러 차례 답사한 환경지리학자의 입장에서 비무장지대 경관 보존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현재의 군사시설 또한 미래의 역사유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번 호의 특집은 ‘한국과 일본,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제목 아래 네 편의 글로 구성하였다. 석주희는 일본 우경화의 핵심 조직으로 일본회의라는 비정당 우익세력에 주목하고 아베 내각과의 관련성을 살폈다. 아울러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민간차원에서 한일 간 상호이해를 위한 시민연대를 지속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진우는 오늘날 일본의 상징 천황제가 과거와 같이 군국주의와 결부하여 부활할 가능성은 작으나, 아베 내각의 우경화 행보 속에서 천황제가 일본 우익 내셔널리즘의 중추로 떠오를 수 있음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하였다.
양기호는 해방 이전 일본 전범 기업 강제동원 피해 보상에 대한 해법으로, 한국 정부는 피해자와 원고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반성이 담긴 기금의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영채는 일본군 위안부합의 문제와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를 계기로 한일시민사회가 문화교류와 상호 네트워크 형성을 활성화하여, 한일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획들을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박상수가 동아시아론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동아시아 담론들이 그 자체에 담긴 인식론적 한계들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동아시아를 ‘트랜스 내셔널리즘’의 공간으로 사유 한다면 동아시아가 서구 근대의 성취까지 왜곡 없이 온전히 포용하는 더 큰 보편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지금 우리는?’ 코너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미동맹의 미래, 용산 미군기지의 공원 조성 문제, 그리고 홍콩의 송환법 반대 투쟁 등 세 개의 주제를 다뤘다. 오혜란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촉진하고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한미동맹에의 지나친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염복규는 용산이라는 장소가 지녀왔던 역사적 시간대의 기억을 최대한 남겨, 그 역사성을 후대에 전승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용산공원이 조성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강인화는 2019년을 뜨겁게 달궜던 홍콩시위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면서, 기존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은 홍콩 주민들이 스스로 신뢰를 회복하며 새로운 사회와 정치를 만들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인물로 보는 역사에서는 임경석이 지난 호에 이어 이탈리아어판 『코 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남만춘, 장건상, 이동휘, 김규식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사실 체크에서는 두 편의 글이 기획되었다. 이정희는 식민지 시기 조선 거주 화교가 한국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음을 실증적으로 살펴보았다. 김용흠은 전근대 우리 역사 속에 존재했던 유교 문화를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유교 문화에 가졌던 문제의식과 고민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내일을 여는 책에서는 두 권의 책을 다뤘다. 정명현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임원경제지』의 재해석을 통해, 조선 후기의 문명을 창조적으로 되살려 활용하는 실용적 복고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정대성은 독일 태생의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인간의 조건』을 다루면서, 그의 연구가 신자유주의 적폐해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21세기에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음을 살펴보았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서민교가 3·1운동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 관이었던 우츠노미야 타로의 일기를 소개하였다. 북한의 이해에서는 정우영이 북한에서 대집단체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고 대집단체조로 대표되는 북한 공연예술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예인열전에서는 최열이 겸재 정선의 작품들에 대한 글을 실었다. 겸재의 작품 전반을 싣기에는 이번 호의 지면이 넉넉지 않아, 이 글은 다음 호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호에서는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 그리고 한양과 그 주변 지역을 소재로 한 겸재의 실경산수화를 다루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이나바 마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 예술제인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평화의 소녀상>이라는 작품이 전시 중단되는 사태를 조명하였다. 한진금은 2019년 한해 전국 각지의 박물관과 전시관에서 기획, 진행되었던 3·1운동 100주년 기념 전시를 검토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3·1운동 서사의 주체가 되는 경향성에 주목하였다.
역사와 공간에서는 꾸준히 좋은 글을 연재하는 김창회가 충남 홍성의 조선 시대 읍치 유적에 관한 내용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이번 호의 서평에서는, 『3월 1일의 밤–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권보드래 저, 돌베개, 2019)에 대한 이찬수의 글을 실었다. 그는 이 책이 향후 근현대 문학과 한국사는 물론, 한반도 평화사 분야에서도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번 호에는 자유 기고의 형태로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최병택은 친일 청산의 문제는 권선징악의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 자리 잡은 국가주의와 비민주성의 잔재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사 람들을 미화하는 책인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엄중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양조훈은 제주 4·3의 비극에, 이승만 정권뿐만 아니라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책임과 역할이 작지 않았음을 장문의 글을 통해 강조하였다.
2020년 새해 벽두부터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총선 정국이 시작될 것 이다. 하지만 총선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풀어야 할 산적한 과제들이 잊히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의 개선, 검찰 개혁 등도 시급히 성과를 거두어야 할 사안이지만, 정부의 각종 정책을 비웃는 듯한 수도권 집값의 급등은 다주 택자들에 대한 더욱 강력한 징세 정책을 요청하는 형국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 시에 내세웠던 각종 노동공약의 실천은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 전교조는 여전히 법외노조의 상태에 있고, 최저임금 1만원 시대의 도래도 언제 실현될지 기약하기 힘들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역시 너무나 미진하며, 주 52시간 노동 상한제 적용 역시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김용균법의 국회 통과에도 불구하고 ‘위험의 외주화 금지’ 문제는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저무는 해를 아쉬워하면서도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년 연말에는 올 연말에 가졌던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내일을 여는 역사』 현 편집위원들의 역할도 2019년을 끝으로 종료된다. 2020년 새해에는 새로운 편집위원들과 함께 『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더 나은 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편집위원 정요근
<내일을 여는 역사> 77호 겨울호 목차
04 여는 글
○ 2020년 새해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기대하며 / 정요근
11 통일에세이
○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 김오석
19 특집 : 한국과 일본, 어디로 갈 것인가?
○ 일본 우익에 대한 소고 – 아베내각과 일본회의 / 석주희
○ 현대 일본인의 천황관과 역사인식 / 박진우
○ 1965년 체제의 한계, 극복은 가능한가 / 양기호
○ 아베정권의 대한국 무역보복조치이후 한일시민연대운동의 현황과 과제 / 이영채
81 쟁점으로 보는 역사
○ 한국의 ‘동아시아’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 / 박상수
95 지금 우리는?
○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미동맹의 장래: 주한미군 철수는 가능한가? / 오혜란
○ 용산공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염복규
○ 2019년 홍콩시위와 민주주의, 그리고 ‘탈식민’ / 강인화
131 인물로 보는 역사
[코민테른인명사전]
○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2) – 남만춘, 장건상, 이동휘, 김규식 / 임경석
149 사실 체크
○ 조선화교가 우리 근대사에 던지는 문제 제기 / 이정희
○ 유교 문화에 대한 오해와 이해 / 김용흠
173 내일을 여는 책
○ 조선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에서 구하는 실용적 복고 / 정명현
○ ‘인간의 조건’의 상실과 정치 –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 정대성
193 예인열전
○ 동방산수의 화종(畵宗) 겸재 정선 – 정선, 실경산수화의 동국제일명가 3 작품사 (상) / 최열
229 사료의 재발견
○ 3.1운동 100주년에 다시 보는 당시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일기 / 서민교
239 북한의 이해
○ 북한의 대집단체조와 공연예술의 특징 / 이우영
249 예술과 현실의 소통
○ 침해된 표현의 자유 –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 / 이나바 마이
○ 기미 이후 백년,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2019년 3·1운동 기념 전시를 돌아보며 / 한진금
271 역사와 공간
○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충청도의 대읍이자 내포(內浦)의 중심, 홍주목 / 김창회
299 서평
○ 선언, 미래를 당긴 가상적 독립 –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2019 / 이찬수
311 기고
○ 제주4․3 학살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책임 / 양조훈
○ 친일 잔재 청산과 민주화 / 최병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