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일본의 화족(華族) 제도를 모방해 조선에도 귀족제도를 실시했다. 화족이 옛 번주(藩主)와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설정되었듯이 조선귀족도 일본의 정책에 순응한 사람을 기준으로 설정했다. 일본이 강제로 맺은 ‘합병조약’을 보면 ‘이왕가의 종친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예우를 하고(제4조), 훈공이 있는 한국인으로 특히 표창할 만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작위를 수여하고 은금을 하사한다(제5조).’고 명시했다. 이 두 조항과 함께 일본 황실령 제14호로 22개조의 「조선귀족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한 조선귀족을 선정하였다.
작위 범위는 「조선귀족령」 제2조, “이왕의 현존하는 혈족으로서 일본국 황족의 예우를 받지 아니한 자, 가문(門地) 또는 공로 있는 조선인에게 조선귀족을 수여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병합과정에 협력하거나 순응한 이왕가의 종친과 ‘보호정치시대부터 합병 전까지’ 정1품, 종1품 이상에 속하는 고위관료 총 76명에게 귀족 작위가 주어졌다. 특히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자에게는 훈1등, 훈2등의 서훈을 추가했다. 그러나 작위 수여는 항구적인 친일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 충성하지 않거나 정책에 순응하지 않은 행위를 했을 때는 ‘반납’ 또는 ‘예우정지’, ‘세습불허’ 등을 규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귀족령」에 의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던 조선귀족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조선귀족열전>이다. 1910년 12월 13일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귀족열전>은 총 263쪽에 걸쳐 조선왕실과 조선귀족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목차는 ‘이왕가의 영광’과 「조선귀족령」 22개조,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이조선보(李朝璿譜)’, 대한제국 황실에서 일본의 왕공족으로 격하된 ‘창덕궁 이왕전하’ 순종을 비롯한 이왕가 5인과 함께 후작 6인, 백작 3인, 자작 22인, 남작 45인 등 총 81명의 조선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들의 경력과 인물평, 사진을 실었다.
특히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인물평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완용의 경우, “한일합방의 대세가 바뀔 수 없는 것을 간파하고 정국의 추세에 순응, 합방조약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 8월 22일 데라우치 총독과 함께 조인하였다.”고 하며 “난관에 처해 있으면서도 책임을 완수한, 실로 식견이 탁월(卓絶)한 정치가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정부가 발표한 76명(왕공족 제외)의 귀족명단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대한정책에 순응한 자, 특히 강점에 기여한 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의 성공적인 체결을 주도한 이지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정미조약에 앞장섰던 송병준, 정미칠적, 병합조약 체결로 ‘합방’을 완수한 이완용(李完用) 등 경술국적이 모두 조선귀족이 되었다. 특히 각 조약의 책임자인 이지용과 이완용은 등급이 높은 백작을 수여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 큰 훈공이 있고 재상에 있던 자라 하더라도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을 옹호하는 자는 제외되었다.
일제는 귀족이라는 명예와 함께 막대한 부도 제공했다. 작위의 고하, 병합의 공로,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거액의 은사공채를 지급했는데 작위와 은사금은 당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속자에게 세습되었기에 매국적인 조선귀족들은 대를 이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나라를 팔아 얻은 부로 권세를 누리는 자들을 조선민중은 그냥 두지 않았다. 이들을 직접 암살하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졌다. 나인영, 오기호 등이 을사오적 암살을 실행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이근택은 기산도·이근철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으며, 이완용은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뜨거웠다. 그러나 작위를 받고 거액의 은사공채로 부를 축적한 조선귀족들은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저작권자 ⓒ 민족문제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